우리의 옛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묻힐 뻔했던 문화와 역사와 사람이 우리 앞으로 뚜벅뚜벅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 이젠 역사를 되돌아볼 여유를 찾았는가 여겨진다. 그 대표적인 길이 문경의 토끼비리다. 한때 360㎞에 이르는 동래에서 서울까지의 영남대로 중에 가장 험한 길로 유명했던 토끼비리는 <영남대로>를 쓴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에 의해 1980년대 재발견되기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내버려져 있었다. 최 교수는 토끼비리를 발견하고 "이 길에 한국의 모든 옛길 역사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길이는 길지 않지만 길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 축대공법, 사연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길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31호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토끼비리 출발지점인 돌고개 마을 서낭당. 주변엔 돌탑과 마을 지키는 당산나무가 있다.
문경새재와는 15㎞거리에 있는 문경의 토끼비리는 이름도 사연만큼이나 많다. 토끼길이라고 해서 토천(兎遷)이라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며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렀다. 절벽과 낭떠러지에 길이 막혀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걸 보고 쫓아가보니 길을 낼만한 곳이 보였다.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
문경시에서 영남대로 토끼비리 가는 길에 주막과 쉼터를 마련했다.
토끼가 지나간 길, 즉 토끼길이며 그것을 한자로 토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비리’는 ‘벼루’의 문경방언으로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벼랑의 개념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절벽과도 같은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6~7리나 이어진 길이 토끼비리다.
토끼비리 진입하기 바로 직전 석현성이 나온다. 중앙에 있는 문은 진남문.
이 길은 관갑천잔도, 곶갑천잔도, 토잔 등으로도 불렸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나무사다리길을 말하며, 천도는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만든 벼랑길을 뜻한다. 용어로 볼 때 강가의 벼랑을 이루는 절벽을 깎아 낸 길과 나무 등을 이용해서 만든 길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토끼비리는 벼랑을 깎아만든 아슬아슬한 길이다.
고려 말 조선 초 명문장가였던 권근의 기문(記文)에도 관갑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여 벼랑에 의지해서 사다리길을 만들었고, 관갑천(串岬遷)은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며 토천이라고도 한다.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를 넘는다.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관갑, 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이 곶갑(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넌다.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절벽을 깎고 돌을 받쳐 길을 만들었다.
여기서 관갑은 경사가 급하고 험한 산허리를 뜻하며, 관갑천은 산허리에 난 길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연은 관갑 바로 밑에 흐르는 영강을 가리킨다. 토잔은 토끼비리와 잔도의 합성어로 볼 수 있다.
영남대로 상에 주요 천도는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아래의 용추부근, 밀양의 작천, 양산의 황산천 등에 있었으나 지금은 문경의 토끼비리와 밀양의 작천잔도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사라지고 없다.
관갑천잔도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다. 총연장 2㎞를 조금 넘는 이 잔도는 세 가지 공법을 이용하여 건설했다. 1구간은 급한 암벽을 깎아내어 그 토석을 다져 평탄하게 만들었으며,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 3m 높이의 축대를 쌓았다.
좁지만 호젓한 길도 나온다.
2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곳으로, 석회암과 역암을 절단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잔도의 폭이 급히 좁아지는 지점에는 축대를 쌓아 길폭을 넓히거나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여 길을 넓혔음을 입증하는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3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이루는 부분으로 석회암맥이 돌출한 부분으로 인공으로 암석안부를 만들었다. 이 안부는 영남대로 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고 권근의 기문에 기록돼 있다.
원래는 나무 받침대로 길을 만들었으나 문경시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데크로 깔았다.
그러나 인간이 바꾸었을까? 홍수와 같은 자연의 순리로 변했을까? 현재 가본 그 길이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암벽을 깎아 만든 천도와 절벽에 나무사다리길을 놓은 잔도길은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고 방지를 위해 문경시청과 옛길박물관에서 탐방로 형태의 나무데크를 덧대어두었다. 운치와 사고 위험을 동시에 줄여놓은 셈이었다. 옛길인 전통도로와 근대도로의 부조화인지, 조화 내지 화해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토끼비리로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문경새재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계속 내려와 성황당이 있는 돌고개 마을, 일명 석현마을 고갯길에서 출발할 수 있고, 고모산성 바로 아래 3번국도변에 있는 진남휴게소에서도 원점회귀할 수 있다.
첫날은 옛길박물관 안태현 학예연구사와 함께 성황당에서 출발했다. 돌고개 마을 입구에 있는 성황당은 마을수호신이자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가던 선비와 보부상이 토끼비리를 넘어와 쉬어가던 쉼터 역할도 했다. 문경시청에서 주막 2채를 지어 옛날 분위기를 재현했다.
어느 곳에 가든 성황당에 얽힌 사연은 있기 마련이다. 돌고개 마을의 성황당도 예외는 아니다. 안태현 학예사가 전설을 전했다.
지금은 탐방객만 사용하고 있지만 반들반들한 돌길이옛날 사용한 흔적을 말하고 있다.
성황당 바로 앞 돌고개 고갯길을 꿀떡고개, 혹은 꼴딱고개라고도 한다고 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 꿀떡고개에서 반드시 꿀떡을 먹어야만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꿀떡같이 과거에 착 달라붙으라는 의미다. 꼴딱고개는 험한 토끼비리를 넘어오면서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꼴딱고개라 했다고 한다. 코재나 깔딱고개와 비슷한 개념이다.
성황당을 지나면 바로 눈앞에 석현성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축성한 성이다. 바로 옆 고모산성 남문과 연결돼 있다.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 3개의 성이 바로 뚫리는 비극을 교훈삼아 외적을 사전에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일자형 성이며, 중앙 성문엔 진남문(鎭南門)이라 쓰여 있다.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축성 이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좁고 가파른 길에 돌을 덧대 길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다.
석현성 왼쪽을 따라 토끼비리길로 접어들었다. 잠시 숲속길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오솔길이 나왔다. 길 폭은 매우 좁았다. 나무가 무성할 땐 길을 찾기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바위를 깎아 만든 천도가 이어졌다. 바닥이 반들반들한 바위는 세월이 흘러도 그 옛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잔도는 붕괴 위험이 있어 나무데크로 교체했다. 안태현 학예사는 "길폭은 옛날엔 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2~3m로 추정되나 지금은 1m도 채 되지 않아 정비하고 있다"고 했다. 정비가 끝나고 나면 노새를 끌고 이 길을 가볼까 생각중이라고 했다.
천도와 잔도를 지나니 거의 60~70도의 각도에 깎아 만든 아슬아슬한 길이 나왔다. 아래는 기록에 나온 대로 20~30m의 낭떠러지였다. 쳐다보면 아찔했다.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험한 낭떠러지에 길을 닦았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옛날 길을 간 사람은 무심코 이 길을 지났을까. <계속>
토끼비리 끝부분에 적혀있는 안내판.
염영대
07.20,2009 at 3:27 오후
좋은 경치, 오솔길, 주막집 등
좋은 경치 감상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