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고(最古)의 옛길은?… 온달장군도 그곳서 전사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아달라이사금 3년 하4월 개계립령로)’라고 적힌 글이 나온다.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 4월에 계립령로를 열었다는 의미다. 길에 대한 첫 기록이고 기록상 최고(最古)의 옛길이다. 이어 2년 뒤인 서기 158년에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의 경계에 있는 최고의 길, 그 계립령 하늘재는 삼국시대의 정치 군사적 요충지였고, 불교문화 전승로와 민초들의 생활통로 역할을 했다.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역사가 만들어졌고, 삶의 애환을 스미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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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장군이 공기놀이하며 갖고 놀았다는 충주 미륵리에 있는 온달공기돌.

신라로서는 이 길이 육상, 해상 교통로로서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했다. 계립령을 넘어 송계계곡을 지나 지금의 충주호에 이르면 남한강에 이르게 된다. 남한강은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해상 교통로서 중요한 교두보였다. 또한 북으로 진출하기 위한 육상 진출로로서도 중요한 길목이었다. 신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길인 셈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신라가 가만히 그 길을 차지하게끔 고구려와 백제가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으며 논란거리도 제공하고 있는 길이 바로 계립령이다.

먼저 애초의 기록에 대한 의문이다. 길이 열렸다는 서기 156년이면 신라는 한반도 남부지방의 삼한, 삼한 중에서도 진한의 변방에 불과한 부족국가였다. 김부식(1075~1151)이 쓴 삼국사기보다 900여년 앞선 시대에 살았던 중국의 진수(233~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한반도 남부는 신라보다 삼한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히 기록돼 있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은 50여 개 소국으로 구성돼 있으며, 신지(臣智), 읍차(邑次) 등이 그 수장(首長)이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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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리사지를 지나 하늘재 입구에 있는 장승과 솟대.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과 경계,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등 다양한 역할을 했으며, 솟대는 나뭇가지 위에 새를 달아놓아 풍년과 안녕을 기원했다.

우리나라 역사서가 아니긴 하지만 삼국사기보다는 900년 이상 앞섰고 계립령길이 개통됐다고 주장하는 시기와는 불과 70~80년 밖에 차이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더욱 있어 보인다. 더욱이 삼국지는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쓰이는 역사서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지금의 경주와 울산에 근거지를 둔 진한의 변방에 불과했던 신라가 2세기 중반에 중부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기록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신라의 후손이라 그렇게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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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에 있는 하늘재 이정표.

충주 가금면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첫 발견한 예성문화연구회의 이상기(52) 박사는 “신라가 그때 그 길을 열었다고 보기엔 시대적, 상황적으로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다”며 “당시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분명 활발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하늘재도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나중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다보니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한반도에 유일한 고구려비인 중원고구려비가 4~5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면 고구려가 당시까지 중부지방 영토를 계속 확장에 나선 점도 ‘156년 신라의 계립령 개통’기록은 설득력이 조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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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의 옛길이 시작된다.

국내 기행문학의 대가인 소설가 박태순씨도 “시기는 좀 유동적이고 탄력이 있어 보이지만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육상과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선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옛길박물관의 안태현 학예사도 “시기적으로 좀 맞지 않다고 보여진다”며 “하지만 이미 누군가 사용하고 있었고, 정치, 군사적 교두보였던 이 길을 놓고 삼국이 치열한 전투와 신경전을 벌였던 것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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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바로 옆으로 자연탐방로가 있어 숲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김부식은 왜, 어떤 근거로 신라가 계립령을 156년에 개통했다고 썼을까? 그것도 1,000년 전의 사실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정답은 없지만 이에 대한 가장 근사한 답으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당위성과 ‘김부식은 신라의 후손이기 때문에’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계립령 개통시기의 유동성과 맞물려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계립령은 조령이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계립령과 조령을 동일한 길로 보고 있다. 또 중원군의 <미륵리 석굴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충주 미륵리에서 대원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하늘재 계립령과 미륵리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대사리 고개인 지릅재까지 합쳐 계립령으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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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계속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조에 ‘계립령은 속칭 겨릅산(=마골산 麻骨山)이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서로 비슷하다. 문경현의 북쪽 28리에 있으며, 신라의 옛길이다’이라고 돼 있다. 또 같은 책 연풍조에는 ‘계립령은 마골재라고 하며 현 북쪽 43리에 있다. 고구려의 온달왕이 말한 계립현․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라고 말한 땅이 바로 이곳이다’라고 적혀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비슷한 표현으로 개념을 구분하고 있다.

미륵리에 있는 김동기 문화해설가도 “지릅재와 하늘재를 포함한 고갯길을 범칭해서 계립령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안태현 학예사는 “아직까지 통일된 개념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설가들이 본 책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과 이를 독자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을 때 생기는 오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성문화연구회 이상기 박사도 “계립령은 하늘재를 말하며, 계립령과 조령을 동일시하는 견해는 넓게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드는 고갯길이 불과 4~5㎞ 밖에 떨어지지 않아 부주의해서 그렇게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계립령은 시대에 따라 중요도도 달라졌고, 이름도 다양했다. 즉 명칭에 따라 그 길의 운명도 달라졌던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다. 계립령은 신라에서는 계립령이라고 불렀지만 고구려에서는 계립현, 마목현으로 불렀다. 또 지름재, 지릅재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저름재의 음을 딴 것이 계립령이고 뜻을 딴 것이 마목(痲木, 麻骨)현이었다. 저름은 지릅의 방언으로 베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베는 한자로 표기하면 마(麻)가 된다. 당시 이두문자가 유행하던 상황을 감안하면 다양한 이름이 나올 법도 하다. 결국 삼국시대에는 계립령, 계립현, 마목현, 마골현(산), 지릅재 등으로 불렸고, 이는 방언과 한자의 음과 뜻을 차용해 불린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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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목과 관목, 초목 등 다양하게 어우러진 숲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선 대원령으로 불렸다. 충주 미륵리사지에서 ‘대원사주지’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미륵리절 이름이 고려시대엔 대원사라고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갯길도 미륵리의 절 이름을 본떠 대원령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리사지 바로 옆에는 대원사에서 관리했을 법한 주막과 휴식을 겸한 미륵대원터가 발견돼 그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주요한 통로역할을 했음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선 조령이 개통되면서 대원령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게 된다. 조령이 관로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계립령은 민초들의 길인 한휜령, 하늘재로 변했다. 삼국시대 정치, 군사, 교통 교두보로서 길이 관로의 길로, 민중의 길로 변해가는 역사의 길이 바로 계립령인 것이다. 역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길이다. 하나의 길이 이만큼 많은 이름을 간직한 길도 드물 것이다.

하늘재로 계속된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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