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만에 지리산에서 하산했지만 공단에서 마련해준 피아골 탐방지원센터 바로 옆 숙소에서 직원들과 잘 지내고 있어요. 내가 어디 갈 수 있겠어요. 내 청춘을 모두 바친 산인데…. 지리산이 내 집이죠.”
1971년 노고단 산장이 조성되자, 인천의 집에서 매주 내려와 산장을 관리하다 이듬 해(1972년) 아예 짐을 싸들고 지리산에 입산한 함태식(咸太式)씨가 지난 2009년 4월 만 38년 만에 하산한 뒤 지내는 근황을 전했다.
“요즘 힘이 들어 산에는 못 올라가겠어. 저만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 나도 나이가 먹었어. 내가 43세에 지리산에 들어와 82세에 내려왔으니 꼬박 39년을 보냈지. 이젠 지리산에 묻힐 일 외에 별 할일이 없어.”
1928년생으로 목소리에도 기력이 다소 떨어진 듯한 함 옹은 요즘 공단 피아골탐방지원센터가 그의 놀이터다. 누구라도 오면 즉시 건너와 먼저 자리 잡고 대화에 나선다. 찾는 손님이 없어도 슬쩍 건너와 직원들과 농담을 곧잘 주고받는다.
“함 선생님 오늘을 술 안 드셨어요? 술 드시면 건강이 나빠져 안돼요. 드시지 마세요.”
“응, 알았어, 술 안 먹어. 나중 밥 먹을 때 딱 한잔만 할께.”
함태식 옹이 지리산 피아골탐방지원센터 앞에 서 있다. 그의 오른쪽 주머니에 든 게 물일까? 술일까?
함 옹은 지리산에서 오래 지낸 만큼 그의 별명도 많다. ‘지리산 산장지기 1호’ ‘노고단 호랑이’ ‘지리산 털보’ 등이 그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노고단에 산장이 생길 때 산에 들어왔다 1988년 1월 피아골 산장으로 옮겨 2009년까지 지냈으니 산장지기의 산역사다. 지리산 털보는 항상 기른 턱수염 때문에 붙은 애칭이다. 노고단 호랑이는 노고단 산장지기를 할 때 산장을 이용하는 등산객들에게 원체 엄격하게 ‘조용히, 깨끗이’를 주지시켜서 붙었다.
지리산에서 살았다면 그의 전력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사실 그도 아내와 아들, 딸 3남매를 뒀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의 조선기계에서 10여년 근무한 뒤 산이 좋아 산으로 떠났다. 부인은 4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인천에서 살고, 딸은 수녀가 돼 로마에 있다.
가족을 팽개치고 떠나 살 수 있었던 ‘낭만 1세대’ 산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가족과 단절하고 살았던 건 아니다. 20여 년 전 아들이 이돈명 변호사의 주례로 내로라하는 산꾼과 명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피아골대피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피아골 취재하고 다시 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취재 후 만나 잠시 대화하다 시간 때문에 그냥 가야 된다고 하니, “그냥 가면 안 되는데, 소주 한잔 하고 가야 하는데 섭섭하게 그냥 가냐”며 문 밖까지 나와 차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낭만 1세대 산꾼’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