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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진도 삼별초의 길 - 마운틴
진도 삼별초의 길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삼별초의 그 용장산성에 들어섰다. 웅장한 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궁터만 남아있고, 저 멀리 산 위로 성곽이 보였다. 바닷바람이 간질이듯 살살 속삭이는 듯했다.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육지에서 느끼던 감촉과는 확실히 달랐다. 상쾌한 느낌이다. 머리 위로는 푸르른 하늘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역시 육지에서 항상 보던 것보다 훨씬 맑고 푸른 세상이다.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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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용장산성터.

진도군에서는 최근 용장산성 홍보관을 건립하고, 고려 삼별초의 자주적인 대몽항쟁사를 본격 알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성곽을 다시 복원하고, 성곽 주변엔 등산로를 조성했다. 궁궐도 빠르면 내년 행궁부터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궁터와 성곽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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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산성 성곽으로 올라가는 길은 등산로로 잘 조성돼 있다.

용장산성 입구엔 ‘사적 126호 용장산성’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이 용장산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용장산성에 오는 관광객과 탐방객이 비수기엔 한 달 평균 1,000명, 성수기엔 3,000~4,000명 정도까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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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산성 안내판

궁터의 흔적을 따라 올라갔다. 궁터는 계단식으로 층층이 궁궐이 있었던 흔적을 대변하고 있었다. 용장산성 홍보관에 근무하는 진도군청 직원 서일윤씨는 “예산이 확정되는 대로 궁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예산만 내려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홍보관에 있는 서씨와 군청 문화관광과에 있는 김민우씨가 용장산성길 답사에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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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맑은 용장산성의 하늘.

궁터의 흔적은 썰렁했지만 그 역사성으로 인해 첫 발걸음부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1964년에 ‘사적’지로 지정됐지만 방치해 두다가 2000년대 들어 본격 발굴이 이뤄졌다. 부서진 기와조각과 주춧돌 등이 곳곳에서 나왔다. 전부 12C 전후 유물로 확인됐다. 치열한 전투에 승리한 여몽연합군은 다시는 이런 항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뿌리 뽑고, 그 일벌백계로 삼별초의 근거지가 된 용장산성을 아예 흔적도 없이 완전히 초토화 시켜버렸다. 수백 년 동안 사라졌던 그 흔적이 최근 ‘삼별초의 역사’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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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터는 완전히 복원됐고,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궁궐을 복원할 계획이다.

궁터 끝 지점에서 등산로가 시작됐다. 등산로 주변은 울창한 숲은 아니지만 다양한 수종을 보여줬다. 진도 군목인 후박나무가 궁터 끝 지점에서 방문객을 반갑게 맞았고, 진달래도 활짝 꽃을 피워 상쾌하게 했다. 군데군데 야생화도 군락을 이뤄 꽃을 피우고 있었다. 동백나무와 측백나무도 맵시를 뽐내는 듯했다. 특히 군화(郡花)인 동백나무는 제법 큰 군락을 보여줬다. 자연적으로 자란 동백에 매년 조금씩 식목해서 면적을 넓히고 있다고 했다. 대나무, 팽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등도 한창 새순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건강한 숲을 이룬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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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주변에는 동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젠 등산로 끝 지점이자, 동시에 좌우로 둘러싸인 성곽길에 도착했다. 성 위에서 용장산성 입구격인 벽파진을 멀리서 둘러보니, 용장산성은 정말 천혜의 요새 같았다. 삼면은 성으로 둘러싸져 있고, 앞으로 트인 한 면은 동양 최대의 조류속도를 자랑하는 울돌목이었다. 이만한 요새도 없을 것 같았다. 성곽의 높이도 2m에서 최대 4m까지 된다고 했다. 성벽 밖으로는 급경사였다. 도저히 적이 침입하지 못할 것 같이 가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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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터에서 발굴된 기와 유물. 12세기 전후 유물로 확인됐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삼별초군은 방심했고, 여몽연합군은 그 방심을 놓치지 않고 허를 찔렀다. 뿐만 아니라 여몽연합군의 많은 병력에 당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중과부적이었다. 삼별초군의 비명과 아우성이 마치 지금 들리는 듯 다시 상상의 나래를 폈다.

1271년 5월 삼별초군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여몽연합군은 다수의 전함을 확보하는 등 대규모 군사를 조직하여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몇 차례 진도 함락에 실패한 여몽연합군은 중, 좌, 우익의 세 부대로 나누어 총공격했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삼별초군은 정면의 벽파진을 향해 오는 연합군은 잘 막았으나 측면과 후방을 뚫고 들어오는 연합군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게 진도 삼별초를 조직한지 10개월 만인 1271년 5월이었다.

용장산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왕과 배중손 장군은 죽임을 당하고 군사들도 지리멸렬했다.

당시 <고려사절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군이 진도를 토벌했다.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을 거느리고 벽파정에서부터 들어가며, 희옹 및 홍다구는 좌군을 거느리고 장항에서부터 들어가고, 대장군 김석과 고을마는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에서부터 들어가니 전함이 총 100여척이었다. 적이 벽파정으로 모여 중군을 항거하려 했으나 좌군과 우군이 뚫어 완전히 괴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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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당시 나온 기와 유물 찌꺼기들.

진도를 잃은 삼별초군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제주도로 건너간 뒤 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미 기세는 꺾인 뒤라 그도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게 된다. 이 땅의 삼별초 역사의 종언이다.

비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성곽 위에 서 있다. 주변을 한번 죽 둘러봤다. 도저히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은 뒷성벽을 타고 삼별초의 허를 찌른 여몽연합군의 전략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한번의 방심이 결국 운명을 단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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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는 완전히 단장됐다.

그 성벽을 지금 걷고 있다. 정상까지 복원된 상태였다. 성벽 정상으로 가는 길은 조금 가팔랐지만 억새밭이 하늘거리며 맞았다. 이 억새들은 그 때의 역사를 알고 있을까?

마침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성곽 정상 가는 길의 억새와 맑은 하늘이 잘 아울린 한 편의 그림 같았다. 그림 속에서 역사와 자연에 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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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주변엔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정상은 GPS상으로 267m를 가리켰다. 용장산성 홍보관에서 출발한지 1시간 만에 약 1.5㎞거리를 지나왔다. 사방이 확 트여 북쪽으로 연육교인 진도대교와 울돌목(명랑해협)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조력발전소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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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육교인 진도대교. 명랑해협이고, 그 옆에 하얀 조력발전소가 보인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가는 성곽은 아직 복원이 안 된 상태다. 다시 갔던 길로 되돌아와 서쪽으로 복원된 성곽을 따라 걸었다. 복원된 성곽은 총 700m. 성곽 바로 옆으로 조성한 호젓한 등산로가 성곽을 따라 나란히 나 있었다. 등산로 양쪽으로는 키 큰 나무들이 가로수같이 죽죽 뻗어 여름에도 그늘을 만들어 줄 것 같았다.

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아직 결론나지 않은 상태다. 군사정권 시절엔 ‘삼별초의 난’으로 불리다 지금은 ‘삼별초의 항쟁’으로 조금 순화된 상태다. 무인정권의 하수인으로 복잡한 배경을 간직한 채 출발했지만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항거를 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삼별초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반역의 역사’와 ‘자주의 역사’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까? 용장산성의 길, 아니 진도 삼별초의 길을 걸으며 문득 생각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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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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