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은 절묘한 산세와 수려한 계곡, 절경의 단풍으로 일찍이 작은 금강산으로 불려왔다. 우리에게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를 노래한 봉래 양사언, 율곡 이이, 허목 등 당대의 문인‧학자‧시인들이 소요산을 찾아 단풍의 절경을 노래했다.
자재암 대웅전 바로 앞에 폭포가 흐르고 있다.
소요산에 머물며 수행하던 매월당 김시습은 소요산의 단풍을 노래한 시는 아직도 전하고 있다.
‘길 따라 계곡에 드니 / 봉우리마다 노을이 곱다 / 험준한 산봉우리 둘러섰는데 / 한 줄기 계곡물이 맑고 시리다’
이와 같이 양사언, 송도삼절과 황진이와 관련 일화로 유명한 서화담(경덕), 매월당 김시습 등이 자주 이 산을 찾아 유유자적하듯 소요하는 모습을 보고, 소요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자재암 석등 주위로 많은 등산객들이 붐비고 있다
그러나 더 오래된 유래는 신라시대 원효대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효대사가 이 산을 열면서 산 이름을 소요라 했고, 수도를 하던 절을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원효대사와 관련된 일화와 유래는 곳곳에 스며있다. 원효대사는 이미 아는바와 같이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 목이 말라 바가지에 있는 물을 마시고 아침에 잠을 깨보니 바가지가 해골인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밤의 청명수와 아침의 썩은 물은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큰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로 가지 않고 돌아간 일화로 유명한 그 스님이다.
많은 등산객은 백운대 정상에도 예외가 아니다. 소요산 가는 전철이 개통된 뒤로 등산객이 몇 배로 늘었다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관계는 소요산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로 전한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비틀거리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고.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하고는 요석궁의 과부 공주에게 원효를 따라가라고 했다. 명을 받은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원효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는 중이었다.
이 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시고,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을 찾아갔다. 3일간 요석궁에 머문 원효는 그 길로 궁을 나섰다. 이후 공주에게는 태기가 있더니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을 낳았다. (중략) 원효가 기거하는 혈사(穴寺) 바로 옆집에 설총이 살았으며, 원효가 죽은 후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유골을 조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의 뜻을 표했다’
소요산 전망대에서 왕방산, 국사봉 등이 보인다
우리 최초의 글인 이두를 만든 사람이 설총이 바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인 것이다. 요석공주의 아버지는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이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인 사실 정도만 전한다.
소요산 칼바위에는 기품 있는 소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수백 년은 족히 됨짐한 소나무가 칼바위 등산로 중앙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소요산은 일주문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를 거쳐 의상대, 공주봉으로 이어지는 말굽모양의 등산로가 병풍처럼 이어진다. 고려 말의 고승이자 해동불교의 법조인 태고 보우선사는 ‘백운암의 노래’라는 시에서 소요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소요산 위의 흰구름은 떠오른 달과 함께 노닌다 / 맑은 바람 불어오니 상쾌하여라 / 기묘한 경치 더욱 좋구나’
칼바위 등산로에 보기 좋은 소나무들이 많다
등산로 중간중간에 노송들이 등산객을 맞아 운치를 자아낸다. 바위로 이어진 이 등산로는 칼바위라 부른다. 상백운대에서 시작된 칼바위 능선길은 약 500m 계속된다.
칼바위 능선 끝날 즈음해서 소요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나한대 봉우리가 나온다. 나한이란 의미는 불교를 수행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이르는 명칭으로 소요산에는 원효와 불교, 이성계의 유래까지 곳곳에 있다.
소요산을 뒤덮은 단풍은 올해는 영 볼품없다.
정상은 의상대(587m)라 부른다. 이는 자재암을 창건한 원효의 수행 동반자인 의상을 기려 소요산의 최고봉을 의상대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맨 마지막 봉우리인 공주봉은 자재암을 창건하고 수행하던 원효대사를 찾아온 요석공주가 남편을 기다리며 애끊은 사모를 기려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참나무시들음병으로 잎들이 쪼글쪼글해져 제대로 단풍이 들지도 못했다.
천연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고 만물상을 연상케 하는 오묘한 정취와 가을 단풍의 잔한 아름다움으로 한강 이북 최고의 명산으로 꼽혔고, 경기의 소금강으로 불린 소요산이 전철이 개통된 뒤부터 거의 동네뒷산 수준으로 전락해 버려 아쉬웠다. 각 등산로마다 등산객들이 붐벼 마음 편히 걷거나 사색할 분위기조차 못됐다. 도시에서 겨우 길을 수준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소요산 정상 의상대. 의상대사의 전설과 관련있는 봉우리다
그 아름답던 단풍도 올해는 참나무시들음병으로 잎이 말라 비틀어져 더욱 초라한 모습이었다. 활엽수가 우점종인 소요산에서 참나무시들음병은 단풍이 치명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거의 단풍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말 아쉬운 소요산이다.
정상 의상대 바로 옆에 있는 공주봉. 원효대사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운우지정을 나눠 설총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요석공주가 원효대사를 기다린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등산로는 봉우리 6개를 일주하는 코스가 8.19㎞에 4시간 정도 걸리고,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원점회귀로 하산하는 코스가 있어 등산하기엔 수월한 산이다.
공주봉에서 구절터로 하산하는 등산로에는 그나마 단풍이 조금 나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