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겨 유배길에 오른 단종,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약을 든 집현전 원로학자 성삼문, 그 성삼문은 죽기 전 단종을 그리는 애절한 시조 ‘단종(端宗)’을 애달프고 구슬프게 읊었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 밤마다 잠을 청하니 잠은 이룰 수 없고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만 붉구나 /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 何乃愁人耳獨聽(하내수인이독청)
단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 중의 한 명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 조부모를 다 여의고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하고, 끝내 목숨마저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삶을 살았던 단종, 그의 삶 자체가 세인들의 한없는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싸리재 올라가는 길 중간쯤 나오는 싸리재 농원 입구.
비운의 삶을 산 단종 흔적은 여기저기 유적으로 흩어져 있고, 또 그가 눈물을 머금고 가던 길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원주 싸리재는 단종이 귀양 가던 길이다. 한양에서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싸리재는 말 그대로 고갯길이다. 지금은 산 아래로 터널이 뚫려 산책로로 이용하지만 한때는 영월로 가는 차들이 다녔던 신작로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만든 영월~원주간의 유일한 신작로였고, 그 이전에는 방랑시인 김삿갓과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지났던 길이이었다고 전한다. 산 아래로 터널이 뚫린 덕분에 싸리재는 옛길로 거듭나 운치를 자아내는 분위기 있는 길로 바뀌었다.
길은 구불구불, 전형적인 옛길의 정취를 그대로 드러낸다.
슬픔의 고갯길 ‘싸리재’는 원주시 신림면 치악산 명성수양관에서 시작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싸리재옛길’이란 간판이 크게 붙어있다. 옛길식당, 싸리치농원 등도 이정표로 같이 있다. 싸리라는 말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싸리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싸리치마을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싸리나무는 이제는 사라져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원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양한모씨가 말했다.
한때 차들이 다녔던 길이라 그런지 시원스레 걷기에도 좋다. 몇 년 전 폭우가 쏟아져 움푹 파인 길이 많았으나 마사토와 황토로 복토하며 깔끔하게 정비했다고 양 해설사가 전했다. 길 양옆으로는 계곡과 산이어서 크게 자란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드리워 가로수 역할을 대신했다. 한때 싸리재 고갯길은 나무들이 우거져 ‘신(神)들의 숲’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한여름에도 곳곳에 그늘이 있을 정도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싸리나무 많았다고 해서 싸리재
싸리치마을 사람들은 이 길로 채밀, 싸리비, 땔감 등을 지고 한양과 영월로 넘나들며 소금, 생선 등을 사가지고 돌아왔던 애환 서린 곳이다. 길에서의 애환은 당대는 모르지만 시대가 흐른 뒤에는 누구나 보고 느낄 수 있다. 마치 단종이 지나간 길을 지금의 사람들이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가끔 탐방객들이 찾는다.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홍휘 왕자를 분만했다. 하지만 난산으로 간신히 해산을 하긴 했지만 기력을 쇠진한 탓에 3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녀는 죽기 직전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 양육을 부탁하며 어미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떠나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하늘나라에서 보살필 것을 기약했다.
홍위는 여덟 살 되던 1448년(세종 30년) 세손에 책봉됐다. 할아버지 세종은 세손 홍위를 무척이나 아꼈다. 홍위는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재주가 영특해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던 것으로 역사서는 전한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세종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을 잘 보필하라”고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 자신도 병세가 깊어 죽음을 얼마 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듯했다.
싸리재 옛길의 유래가 된 싸리재나무. 화투에 나오는 흙싸리 껍데기 그 나무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바로 혈기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왕은 어린 세손이 그들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날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세자 향이 왕위를 계승한다. 그가 단종의 아버지 문종이다. 홍위는 당연히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됐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집현전 학자인 이개와 유성원이 교육을 계속 맡았다.
그러나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세종 말년 10여 년 간 병든 세종을 대신해서 정사 등 궁중의 모든 일을 아버지 세종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여 처리하느라 과로가 누적된 탓에 병이 악화된 것이었다.
이어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 세종의 손자이며, 문종의 아들인 단종 홍위였다. 스무살 이하의 미성년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 관례인데,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왕비조차 없었다. 따라서 열두 살 어린 왕 단종은 기댈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처지였다. 어쩌면 불행의 씨앗은 이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싸리재옛길 정상엔 불과 몇 십년 전까지 차가 다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단종은 즉위 후 왕족 대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가장 가까운 직계 혈족의 최고 어른이자 아버지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과 수양의 네 번째 동생이자 일찍이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 방석의 양자로 입적되어 촌수로 따지면 수양의 당숙이 되던 금성대군이었다. 금성대군은 성격이 곧기는 하나 세력은 없었고, 정권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왕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인물은 단연 수양대군뿐이었다. 수양은 원래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독점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원주~영월 가던 외길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총서편에는 ‘타고난 자질이 공검하고 예절이 있었으며, 또 충성스럽고 효도하고 우애가 돈독했다. 인(仁)을 좋아하고 의(義)에 힘썼으며, 소인을 멀리 하면서도 미워하지 않았으며, 군자를 가까이 하면서도 편사하지 않았다. 문학과 활쏘기와 말타기가 고금에 뛰어났으며, 역학․산학․음률․의술․점․기예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묘를 다했다. 그러나 항상 스스로 이를 숨기고 남의 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으니, 세종이 이를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여 그 대우를 여러 아들들과 달리하였으며, 무릇 군국대사에는 반드시 참결하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능력이 출중한 성군으로 칭송하고 있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의 연속이다. 마침 이 길에서 뱀을 보기도 했다.
어린 단종은 정사를 돌볼 수가 없어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든 고명대신들, 이른바 황보 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수양․안평․임영․금성․영응 등의 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다툼은 급기야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정치권에 뛰어든 수양은 점점 더 세력을 키웠고, 김종서와 황보 인 등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세력팽창을 막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좋은 ‘사냥감’이 생긴 셈이었다. 1453년 10월 드디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 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없애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조정은 일시에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할 서무를 관장하는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싸리재 정상 비석엔단종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1454년 열네 살의 나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엔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유응부 등이 상왕복위사건을 일으켜 사형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총서편에는 단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는 이홍위이고, 문종 공순왕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이다. 세종이 왕세손으로 봉하고, 문종이 영의정 황보 인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다. 문종이 경복궁 천추전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왕의기록 중에 가장 짧고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것도 단종이 아닌 노산군으로 적고 있다.
단종이 눈물을 삼키며 유배지로 가던 그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열여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단종은 관리 3명과 군졸 50여명의 삼엄한 호송을 받으며, 광나루를 건너 여주→원주 부론→귀래→신림(싸리재)→주천을 거쳐 유배지 청령포에 이르렀다.
싸리재는 단종에게는 눈물의 고갯길이고, 서민에게는 삶의 애환이 깃든 생활의 길이다. 단종은 이 길을 걸으며 숙부인 수양대군을 얼마나 원망했을 것이며,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부재를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길을 걸으며 마치 단종의 애통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정상은 해발 596m지만 몇 십 년 전까지 차도 다녀
길 중간쯤 다다르자, 뜻밖의 ‘자연휴식년제 출입통제’란 푯말이 나왔다. ‘이게 뭐냐’ 싶어 자세히 읽어보니 길 옆 계곡에 많은 사람이 출입해서 훼손된 듯 계곡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길 가엔 야생화가 만발했다. 올라갈수록 싸리나무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활짝 핀 금마타리, 꽃 모양이 나비를 닮은 땅비싸리, 꽃향기가 좋은 사위질빵, 뿌리나 꽃에서 노루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노루오줌 등이 처음 온 내방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상에서 맞은 편에 보이는 산의 모습이 마치 누워 있는 부처의 얼굴인 듯하다.
계곡엔 가끔 사람소리가 들여왔다. 길을 안내한 양한모 해설사는 “이 계곡엔 원체 물이 맑아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와 메기 등도 살고 있다”고 했다. 양 해설사는 “홍수로 계곡물이 넘쳐도 고기들이 그대로 살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하고 물었다. “여기 있는 물고기는 떠내려가고 위에 있는 물고기들이 내려와 사는 자연의 순환이치로 그런 것 아닙니까?”하고 되물었다. “그게 아니고, 계곡에는 많은 수초들이 살고 있죠. 그 수초와 바위틈새에 있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숨어 들어가 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져도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어요. 그것이 그들만의 생존본능입니다”라고 말했다.
길은 구불구불 굽이졌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듯 경사도 매우 완만해졌다. 차는 숨이 조금 잦아졌다. 마침 쉴 때를 아는 듯 조성한 의자가 나왔다. 의자 뒤로는 마치 작은 폭포같이 바위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양 해설사는 “여기가 말 그대로 실금폭포”라고 가리켰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양 해설사는 “마사토로 복토한 길이라 맨발로도 걷기 좋은 길”이라고 자랑했다. 훨쩍 자란 낙엽송이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도 걸을 만 했다. 마침 새끼 뱀 한마리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밤에 내린 비로 젖은 몸을 말리려 나온 듯했다.
약 30분 정도 더 걸려 싸리재 정상에 도착했다. GPS고도로는 596m였다. 웬만한 산 높이였다. 길옆으로는 나무가 많긴 했지만 낭떠러지였다. 이 길로 옛날에, 아니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차가 다녔다니, 믿기질 않았다.
정말 불과 몇 십년 전까지 차가 어떻게 다녔을까 싶다.
정상에 비석이 하나 있다. ‘싸리치’라는 제목으로 시가 새겨져 있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 싸리치라네 // (중략) // 단종의 애환 구름으로 떠돌고 / 김삿갓의 발길이 / 전설처럼 녹아있는 / 영마루— // (후략)’
정상에는 정자와 더불어 공간이 넓어 주변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분명 영월 유배지로 가던 단종도 여기서 쉬었으리라. 그가 주변을 살피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영월 유배지에서 단종은 적적함과 침울함을 달래기 위해 관풍매죽루에 올라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 춘삼월 자규루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月白夜蜀魄(월백야촉백) / 含愁情倚樓頭(함수정기루두)
爾啼悲我聞苦(이제비아문고) /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노인) /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약관도 안 된 단종이 이토록 절절하게 세상을 읊었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뒤 인생의 비애감을 절실히 느낀 사람 같은 감정이 스며있다. 단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느꼈으리라. 할아버지 세종의 온화한 얼굴과 아버지 문종의 근엄한 얼굴, 그리고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박팽년 등의 피어린 눈물도 생각나고,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도 주마등같이 스쳐갔을 것이다.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으며 넘던 싸리재도 이젠 단종에게는 지나간 세월이었다. 여기서 그냥 조용히 한세상 보내리라 결심했다. 자연을 벗 삼아 시심을 떠올리며 세상을 잊으리라. 그러나 불행의 끝은 거기가 아니었으니….
상왕복위사건이 무위로 돌아가자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됐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봉되고, 한 달 뒤인 10월에 만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은 어린 단종에게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의 무슨 업이 이토록 참혹함을 겪어야만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단종은 울부짖었으나 소용없었다. 현실은 오직 죽음뿐이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토록 원망스러운 세상을 하직했다.
싸리재옛길 반대편 끝 지점이다.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형(刑)을 집행하고(왕방연은 사약을 거부하는 단종에게 차마 강제로 마시게 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사이 하인 복득이란 자가 활시위로 뒤에서 단종의 목을 졸라 참혹하게 숨을 끊었다는 설도 있다) 싸리재를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시 한수를 남겼다. 누구나 한번쯤 봤을 법한 시다.
천만리 머나먼 길 / 고운 님 여의옵고 / 이 마음 둘 데 없어 /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 / 울어 밤길 예놋다
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 / 美人離別秋(미인이별추) / 此心無所着(차심무소착) / 下馬臨川流(하마임천류) / 流川赤如我(유천적여아) / 鳴咽去不休(명인거불휴)
왕위에 오른 세조는 즉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은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가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세조의 큰 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자, 세조는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 그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정상 영마루엔 ‘싸리치’ 노래 시비 있어
다른 한편으론 세조는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었다. 그의 왕권강화와 불교 융성책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자신과 같이 다시는 왕위에 도전하지 못하게끔 왕권중심으로 정사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또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죽여 버린 행동은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 도로와 터널이 뚫리기 전에 싸리재옛길로 사람과 차가 다녔다.
싸리재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단종과 세조, 숙부와 조카, 조선왕조실록의 평가 등등. 실제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평가가 있다. 역사적 사실은 분명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단종은 그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전설은 단종은 사약을 마시지 않고 스스로 목에 메 자살한 것으로 묘사한다. 어찌된 일일까? 또 있다. 영월과 평창은 서로 인접한 마을인데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감싸 도는 반면, 평창에서는 세조를 감싸고돈다. 무속에서는 단종을 산신으로 모시면서 신격화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세조를 감싼다.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문학적 진실은 또 어떻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전설과 무속, 종교는 어디까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까? 단종의 유배길인 싸리재를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길은 역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맑은바당
11.24,2010 at 10:52 오전
좋은 정보 모셔갑니다.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