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하는 계절이다. 가는 겨울이 못내 아쉬워 괜한 트집을 잡고 있다. 지난 겨울은 100년 만의 추위라고 할 만큼 위세를 떨쳤는데 아직 미련이 남았는가 보다.
봄은 꽃을 통해 북상한다. 2월초부터 복수초가 노란꽃을 활짝 피워 봄소식을 전한다. 때로는 산 속에서 얼음과 눈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를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강진 백련사 옆에 있는 천연기념물 동백숲은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지만 지난 겨울은 너무 추워 몽우리까지 얼어붙어버렸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복수초보다 더 빨리 피는 꽃이 있다. 동백꽃이다. 물론 추백․동백․춘백 등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겨울에도 자연상태에서 꽃을 피우는 거의 유일한 나무다.
동백이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은 내륙에서는 지리산 화엄사 부근이고, 서쪽 해안은 충남 서산 정도이고, 섬으로는 대청도까지 올라간다. 동쪽 해안은 울릉도가 끝이다. 요즘은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북방한계선이 조금 올라갔으며, 간혹 추위에 내성 강한 나무들이 눈에 띄는 경우도 있다.
동백나무들이 전부 사람키보다 훨씬 더 커 동백숲 속에 들어가면 마치 엄마 뱃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동백숲은 대개 남쪽과 도서지방에 군락을 이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동백숲은 나주 송죽리 금사정(515호), 전남 광양(489호), 서천 마량리(169호), 고창 선운사(184호), 거제 학동리(233호), 강진 백련사(151호) 등 6군데다.
이런 꽃이 피어 있어야 할 백련사 동백숲이 지금은 꽃을 몇 송이 볼 수 없는 실정이다.
11월 초겨울 들어 남부 도서지방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동백은 4월초 개화하는 내륙의 최북단 자생지인 고창의 선운사 동백을 끝으로 한겨울의 청춘과 같은 붉은 꽃은 이듬해를 기약한다.
북상하는 꽃의 속도는 하루 평균 22㎞. 가을 단풍의 하루 평균 남하속도 25㎞와 비슷하다. 자연의 속도는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산에서 천천히 걷는 속도 시속 1㎞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원래 자연과 인간은 둘이 아닌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은 대나무에 소나무, 야생녹차까지 전부 초록끼리 놀고 있다.
자연의 속도로 천천히 걸으며 다산의 자취를 더듬고, 아름다운 동백까지 감상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다산초당(사적 제107호)~백련사 동백숲길이다. 다산초당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다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곳이다. 그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나무와 야생녹차, 편백나무, 삼나무, 소나무 등 녹색 일색이다.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한 생동감이 넘친다. 거기에다 활엽수인 황칠나무까지 푸르름을 더한다. 초록의 숲길인 셈이다. 더욱이 한겨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백련사 동백나무는 길을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실학, 즉 천연기념물과 사적을 동시에 음미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넘어가는 중간쯤 나오는 오솔길.
이 길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문광부 지정 문화생태탐방로에선 ‘남도유배길’로, 산림청에선 ‘만덕산 숲탐방로’로, 제10회 한국의 아름다운 숲대회에서 어울림상을 수상한 숲길로 족보 있는 길이다. 그 외에도 다산산책길, 다산마실길, 호남길 등 여러 리본이 나무에 붙어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즐긴다는 얘기다.
다산수련원 바로 옆 두충나무 사이로 난 길로 가고 있다. 이색적이고 운치가 있는 길이다.
출발은 다산초당 바로 아래 있는 다산수련원이나 백련산 어디에서 해도 상관없다. 다산유배길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윤영선(45)씨의 안내로 다산초당 바로 아래 있는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했다.
다산수련원 오른쪽으로 두충나무가 운치 있게 죽죽 뻗어 있다. 그 사이로 ‘다산산책길’이란 조그만 이정표를 보고 걷는 기분이 예사롭지 않다. 약재로 쓰이는 흰 두충나무가 가로수로 거듭나 분위기를 더했다. 약재로서 효력을 다한 나무들이다.
이어 시인 정호승씨가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한 시와 길이 나온다. 시가 있는 길인 셈이다. 정말 뿌리가 길을 덮고 있는 형국이다. 아름답다 못해 신기하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잔인한 아름다움’의 일종이다.
나무뿌리들이 길 위로 드러내 정호승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한 길이 가는 길에 나온다.
‘잔인한 아름다운’ 길은 다산초당으로 연결된다. 다산초당엔 다산의 영정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곳곳에 다산의 정취가 묻어 있다. 다산초당에서 강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명당이다.
대나무와 야생녹차, 편백, 삼나무 군락을 지나 백련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만덕산 정상 깃대봉으로 향하는 길이 왼쪽으로 나있다. 백련사 가는 길은 직진이다. 길 주변에 있는 야생녹차는 지난 겨울의 추위를 대변하는 듯 잎들이 냉해에 걸려, 아직 새순을 내지 못하고 있다.
다산초당
이윽고 천연기념물 제151호 백련사 동백숲이다. 5.2㏊의 면적에 수천그루의 동백나무가 대형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동백꽃은 통째로 떨어진다. 북풍의 매서운 겨울일수록 꽃의 빛깔은 염염히 타오르는 ‘붉은 사랑의 꽃’으로 묘사된다. 동백이란 이름은 꽃이 피어서 100일, 통째로 떨어져 100일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백련사 거의 다 와서 바로 앞 숲이 동백숲이다. 오른쪽 바로 옆이 야생녹차밭인데, 파릇파릇 해야 할 녹차가 추위에 새순을 내지 못하고 말라 비틀어져 있다.
그러나 웬걸 한창 만개해야 할 동백꽃들이 드문드문 피어 있다. 그 아름다운 검붉은 꽃들이 지난 겨울의 혹한에 꽃을 피우다 전부 얼어버렸다. 동백꽃을 보는 순간 100여 년 만의 추위를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동백꽃 수정을 돕는 조매화 동박새가 “찌드렁~ 찌드렁” 우는 소리도 간혹 들릴 뿐이다. 안타깝다.
백련사 창건에 대한 기록을 한 백련사사적비. 보물 1396호다.
백련사사적비 안내문.
최근 날씨가 조금씩 풀리면서 꽃망울을 맺고 있다. 윤영선씨는 “아마 4월이면 만개한 동백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잔인한 4월이 오기 전 잔인한 아름다움이 주는 숲길을 걸으며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다산의 유적과 천연기념물인 동백숲을 만끽하며 봄을 맞는 것도 생의 한 기쁨이지 싶다. 이젠 정말 봄이다. 봄을 맞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