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다구(木茶具․wood tea utensils),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사전적 개념으로는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다양한 기구들로 정의할 수 있겠다. 원래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전통 찻잔과 차받침, 찻상 등에서 나아가 숟가락, 젓가락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다구의 개념에서 차의 범위를 넘어 음식도구까지 나무로 만들어 ‘목다구’로까지 발전했다.
청오 김용회씨가 그의 혼을 들여 일일이 나무를 깍아 작품을 만들고 있다.
지리산에 ‘목다구의 장인’이 있다. 청오라 불리는 사람이다. 본명은 김용회. 인천이 고향이고, 인천에서 고교까지 졸업한 뒤 1989년 지리산에 입산한 장인이다. 처음엔 화가였다. 배낭에 화구만 가득 넣고 지리산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그림 그리기 위한 포인트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하동 화개 방향으로 내려오다 느낌이 너무 좋아 ‘한 계절만 이곳에서 보내야겠다’고 눌러앉았다. 먹고 살거리가 없었다. 화개에서 차도구 작업하는 선배 만나 일주일에 세 번 나가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림 그리러 지리산에 왔다 목공예로 전업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시작된 목공예로 인해 1996년엔 완전히 그림을 접었다.
청오 김용회가 활짝 웃고 있다.
그림과 접목된 목공예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은 구상이고 디자인이다. 이미 훈련은 돼 있는 상태였다. 그 훈련된 구상과 디자인에 한국의 아름다운 선을 살려 목다구를 만들었다. 그의 독창적인 목다구가 전문가의 시선을 끄는 이유다. 주변에선 "야, 너 참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목다구를 만들 수 있나"는 칭찬도 들렸다. 일본, 중국에서까지 반응이 왔다. 그는 각오를 새로 다졌다. ‘우리나라만의 차 도구를 만들어보겠다’고. 그래서코고무신, 베틀북, 한복치마 등의 모습을 담은 차 도구가 나왔다.
지리산학교 강사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젠 그의 차 도구는 몇 십 만원에서 몇 백 만원, 혹은 몇 천 만원호가할정도의 작품이 됐다. 젓가락이 십만 원을 호가할 정도의 명인 반열에 올랐다.벌써 개인전만 해도 7차례나 열었고, 오는 11월 인사동에서 여덟 번째 연다. 지난 5월 청담동에서 일곱 번째 개인전을 열 때 재미있는 스토리도 있다.
청오가 만든 목다구 작품들이다.
그는 개인전을 열 때마다 그의 작품가력을 어떻게 매겨야 할지 항상 고민한다고 한다. 청담동 정소영갤러리에서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 “내가 하루 노가다 하는 사람의 일당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나”가 그가 밝히는 그의 가격결정 원칙 중의 하나다. 그 기준에 따르면 순전히 수작업으로만 하루 종일에서 몇날 며칠을 고생해서 만드는가에 따라 작품가격이 달라진다. 그의 전시회에서 작품가격을 유심히 보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게 보일 것이다.
청오 김용회가 사진작가 이창수(왼쪽)씨와 함께 있다.
청담동 전시회에서 찻상가격을 도저히 매길 수가 없었다. 보름 이상 꼬박 수작업한 날수를 보면 1000만 원 이상 매겨도 되지만 너무 비싼 것 같기도 하고 해서 300만원과 250만원을 놓고 갈등하다 그냥 250만원 가격표를 붙였다. 한 사람이 와서 보더니 보자마자 바로 두 개를 사가는 거였다. 순간 ‘내가 너무 싸게 붙였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청오가 앉아서 한가로이 웃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작업으로 목다구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청오 김용회, 이미 그의 이름은 중국, 일본에까지 널이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더 선호한다고 한다. 일본에서 그의 작품가격도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비싸다. 그리고 더 잘 팔린다. 그의 작품이 더 비싸지기 전에 한 점 사놓아야 할지 모르겠다.
청오의 작품.
옛날에 비하면 정말 괄목상대다. 지리산 입산 20년이 지나면서 집도 사고, 그럴 듯한 작업장도 지었다. 그만의 공간이다. 원래 도시생활을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명실상부 남부럽지 않은 수준이 됐다.
청오 김용회의 작품.
그새 결혼도 했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팬이라고 찾아온 대구 여성과 그녀의 친구가 지리산에 왔다. 이원규 시인은 후배 김용회를 바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그녀의 친구와 그(김용회), 둘은 필이 바로 꽂혔다. 이원규 시인은 지금 말한다. “김용회 보고 안내하라고 불렀는데, 둘이 눈을 맞출 줄은 누가 알았겠나.” 주변 반대와 곡절을 극복하고 끝내 결혼했다. 반대했던 처가 식구들도 지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청오의 찻잔 작품.
그러나 그도 아쉬운 점이 있다. 너무 일찍 지리산에 입문하는 바람에 이론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무의 결이 어떤지, 그 결을 살리는 방법이 없는지 등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부족해 조그만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지리산학교에서 수강생들에게 목다구를 가르치면서 자신에겐 이론을 닦을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점점 더 완성도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 최고의 목다구, 아니 우리 전통적인 목다구를 제대로 재현해내는 장인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