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37년 1711년 축성된 북한산성이 홍수와 일제의 파괴로 원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됐으나 1990년부터 서울 정도(定都) 600년 사업 일환으로 복원과 재정비를 거듭, 역사탐방로와 등산로로 활용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북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먼저 수문터부터 찾았다. 14개의 성문 중 수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원한 상태지만 수문은 이정표도 없이 내버려져 있다.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500쯤 올라가니 흐르는 물 아래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몇 개 뚫린 바위가 보인다. 그게 바로 수문터다. 수문은 북한산성의 식수원 역할을 했던 문이다. 원래 북한산성의 시구문 쪽 계곡과 중성문 옆 계곡에 두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중성문 옆 한 곳의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다. 평소엔 식수원 역할을 하지만 적이 침입해 올 때는 방어역할까지도 했다고 전한다. 이정표라도 세워 놓으면 오가는 등산객들이 역사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북한산성 수문터를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설명하고 있다.
수문터에서 조금 내려와 대서문으로 향했다. 북한산성의 성문은 일반적으로 대서문과 같이 큰 성문은 홍예(무지개문)와 초루(성문 위 다락집 같은 정자)가 갖추어진 반면, 암문은 군수물자나 적의 동태, 시체를 옮기기 위해 조그만 비밀문 같이 만들어 사용했다.
대서문은 제법 위용을 갖춘 문으로 웅장하다. 문 위에는 초루까지 갖춰져 소수의 군사들이 머물며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돼있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대서문에서 의상봉 방향으로 성곽이 연결돼 있다.
북한산성 대서문은 항상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성곽 따라 계속 올라간다. 가파란 능선길이라 이 방향으로는 도저히 적이 침입할 것 같지 않은 정도다. 그 가파른 능선에도 성곽은 끊어진 듯 연결된다. 숙종 시절 병조판서 최석항이 반대 상소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한 뒤에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고 접응하는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후략)”한 형국이다.
대서문에서 의상봉까지 불과 1㎞도 안 되는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 시간이 1시간 이상은 족히 소요된 것 같다. <북한지>에서는 의상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륵봉 아래에 있으며,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이곳에 머물렀다. 의상조사는 처음에 흥주의 태백산에 이르러 부석사를 창건하고 북한산에 와서 머물렀다. (후략)’
의상조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다. 남한산성과 같이 외벽은 깎아지른 듯하지만 성 안으로는 평평한 ‘천작지형’이 아니라 양쪽 다 험준하기 짝이 없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험준한 지형따라 그대로 이어져 있다.
성벽은 끊어지고 험준한 암벽이 대신했다. 암벽 능선은 계속 이어졌다. 최근 깔끔하게 복원한 성곽이 암벽능선이 끝난 뒤 연결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당암문이 나왔다.
암문은 성곽에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 출입구로,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전쟁 때는 비밀통로로 사용됐다. 암문은 돌로 만들었지만 홍예 형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사당암문에 등산객이 쉬고 있다.
가사당암문도 조그맣다. 키 큰 성인이 서서 들어가면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낮다. 암문은 대개 계곡으로 내려가는 곳에 만들어져 있다.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암문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용출․용혈․증취봉을 오르내려 부왕동암문에 이르렀다. 해발 600m도 안되는 봉우리지만 산세가 험하고 암벽 능선길이라 땀이 뻘뻘 흐른다. 등산로도 험해서 때로는 철제 사다리로 오르내린다. 몇 년 전 용혈봉에서 벼락이 내리친 사고가 있을 만큼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다.
부왕동암문도 암문인데, 홍예문형태로 복원했다.
부왕동암문은 윗부분은 홍예로, 나머지 세 부분은 방형으로 복원돼 있다. 원래의 모습은 전부 방형이지 않을까 싶은데…. 옛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 궁금해진다.
나월․나한봉을 거쳐 청수동암문으로 향했다. 나월․나한봉은 출입금지구역이라 우회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로 저 멀리 다른 봉우리들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나한봉을 지난 듯 제법 큰 쉼터가 나온다. 성으로 치자면 옹성에 가깝다. 성벽에서 조금 튀어나와 옆의 성벽으로 침입하는 적을 바로 무찌를 수 있도록 한 성이다. 좌우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청수동암문에 등산객이 지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수동암문이다. 청수동암문에서 성밖으로 나가면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이 나온다.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는 진흥왕이 세운 4개의 순수비 중 가장 높은 곳, 가장 험한 곳에 있는 비석이다.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 정말 이곳에 와서 비석을 세웠을까 싶다. 말 타고 올라가기 힘든 길을 그 당시 걸어서 왔을까? 역사는 때로는 사실과 허구(신화)가 혼돈돼서 후세에 전하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자연스레 든다.
청수동암문 다음에 있는 봉우리가 문수봉이지만 대남문까지는 약간 우회하는 능선으로 연결돼 있다. 지도를 보면서 위치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서 도저히 방향감각을 잡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등산로 따라 간다.
대남문은 우이동이나 수유리 등지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모여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한국의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봉우리가 불교식 이름이 많다. 북한산에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을 가까이서 모시는 협시 보살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알려져 있다. 보통 왼쪽에 있는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오른쪽에 있는 보현보살은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띤다. 북한산에도 그 이름을 따서 이들 봉우리 이름을 붙였다.
길 따라 가다보니 어느 덧 대남문에 도착했다. 홍예와 초루를 갖춘 웅장한 문이다. 안내판에는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중략)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후략)’라고 돼 있다.
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성이다. 이 성도 숙종 때 만들면서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지>에 따르면 ‘도성의 북벽(숙정문과 자하문)을 넘어 탕춘대성을 통해 북한산성으로 피난 농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왕이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있을 때 안전하게 피신하기 위해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탕춘대성은 중간의 방어선이고, 북한산성은 행궁을 건립해서 왕이 머물도록 한 것이다.
대성문도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대남문에서 대성문까지 불과 0.3㎞밖에 안 된다. 대남문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부왕동암문, 동쪽으로 대동문까지 불과 좌우 1㎞ 남짓 되는 거리에 성문들이 줄줄이 있다. 결국 왕이 도성에서 피신해 올 때 많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기 위해선 많은 성문들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보국문은 조그만 암문형태로 복원돼 있다.
대성문에 이어 보국문까지 갔다. 성곽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길게 늘어선 성벽들이 마치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같이 보인다. 만약 조선시대의 북한산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일찌감치 건립되었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도 해본다.
보국문은 성문이지만 암문 형태로 지어졌으며, 소동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국문에서 대동문까지는 불과 700m. 이젠 등산로도 완만하다. 용암문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도 없다.
대남문에서 대동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북한산성의 가장 동쪽에 있다.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문이며, 가장 큰 홍예문을 가졌다. 성밖으로 우이동과 수유리로 연결된다. 용암문은 만경대 남쪽 용암봉 아래에 있는 문이라 해서 붙여졌다.
용암문에서 위문까지는 만경대를 중심으로 좌우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위험한 암벽 구간이어서 그 밑에 우회 등산로로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중간쯤 지점에 노적봉을 살짝 걸쳐 지나간다.
<북한지>에는 ‘노적봉은 만경대 서쪽에 있는데, 솟아오를 듯한 산봉우리와 뾰쪽뾰쪽한 바위의 형상이 노적가리와 같으므로 노적봉이라 부른다. 중흥동의 옛 석성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윽고 위문이다. 원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항상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틀째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후텁지근한 날씨로 땀은 온몸을 적신다. 위문에서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지난다. 바람길이 이곳에 있는 것 같다.
용암문사이로 등산객이 지나가려고 하고 있다.
북한산 정상 백운대가 바로 위에 있다. 원래 백운봉이라 불리던 것이 널찍한 터가 있어 백운대로도 불리고 있다. 탁 트인 백운대에서는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다시 조금 내려와 위문에서 북문으로 향한다. 능선은 백운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원효봉으로 이어지지만 염초봉 주변이 위험한 릿지구간으로 등산객들의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 일반 등산로로 우회하기로 했다. 위문에서 상운사를 거쳐 북문까지 갔다. 2㎞가 조금 안 되는 거리다. 많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위문이 북한산 정상 백운대 방향으로 길게 연결돼 있다.
북문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두 개의 홍예문으로 연결돼 있다. 초루도 없어 중간에 구멍이 뻥 뚫려, 다른 성문과 또 조금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산성은 도읍에서 피신해 들어올 수 있는 대남문을 중심으로 좌우 방어진지를 확실히 구축하고, 북쪽은 소홀히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능선따라 성곽은 계속 이어진다. 잠시 오르면 원효봉이 나온다.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 해골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친 그 원효대사에 얽힌 봉우리다. 원효대사가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원효봉 밑 조그만 암자에 자리 잡고 기도를 한 원효암이 지금도 있다. 현재의 원효암이 그 원효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북문은 다른 문과 달리 두 개의 아치로 된 문으로 돼 있다. 제대로 복원이 된 건지 의심스럽다.
능선따라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암벽길에 놓인 철제사다리로 내려오기도 하고 성곽 따라 내려오기도 한다.
이젠 성벽 따라 걷는 성문 중에 마지막 문인 서암문인 시구문이다. 시체를 옮기기 위한 문이라 해서 시구문이라 붙여졌다. 이렇게 해서 수문 포함 13개의 성문 따라 걷기는 끝났다.
시체를 나르던 문이라 해서 시구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지를 찾아서 출발이다. 북한산성 방향에서 행궁지로 가려면 중성문․중흥사를 지나야 한다. <북한지>에는 ‘중성문은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에 있으며, 서쪽은 수구(水口)로 되어 있고 바닥에는 얕은 물이 흐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성문은 행궁지로 향하는 이중방어문 성격을 띠고 있다. 대서문이 비교적 평지에 위치해 있어 적에게 뚫린 위험이 커 중앙으로 향하는 길 정중간에 중성문을 건립해서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대서문에서 행궁지로 가기 위해선 중성문을 거쳐야 한다. 중성문은 방어력이 약한 대서문을 보강하고 행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했다.
중흥사는 고려 초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쇠퇴하다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전국 승군을 지휘한 팔도도청섭이 이곳에 기거할 정도로 커졌다. 1904년 화재와 1915년 대홍수로 흔적만 남긴 채 건물은 전부 쓸려갔다고 한다.
행궁지는 중성문에서 중흥사를 거쳐 약 1.8㎞ 떨어진 나한봉에서 북한산성 안으로 뻗은 능선 끝자락쯤에 위치해 있다. 축성 초기 당시 내전과 외전 합해 총 124칸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1915년 홍수로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만 전하고 있다. 북한산성 전체가 사적 제162호이며, 또한 행궁지도 사적 제479호로 지정돼 있다.
북한산성 행궁지가 지금 한창 복원을 위한 유적발굴을 하고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고양시에서 (재)한울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일단 유물부터 찾은 뒤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한지 사업을 하고 있다. 현재 북한산성 행궁터는 유적 발굴로 이리저리 파헤쳐져 있는 상태다. 머지않아 북한산성 행궁도 복원될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