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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정감록의 秘藏處로 나오는 ‘한국의 오지’ 홍천 내면 문암마을 - 마운틴
정감록의 秘藏處로 나오는 ‘한국의 오지’ 홍천 내면 문암마을


강원도 홍천의 첩첩산중 골짜기. ‘삼둔사가리’라는 사람이 난리를 피해 숨어 지낼 만한 피난처가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았고,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산너머 산이다. 고개를 들면 푸르른 하늘뿐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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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 오지 중의 한 곳인 홍천군 내면 율전3리 문암산 중턱 800m쯤 고지에 있는 문바위마을에 노부부가 60년째 강원도 전통가옥인 투방집에 살고 있다. 결혼한 70년 가까이 되는 노부부가 다정하게 집 뒤로 올라가고 있다.

그 삼둔사가리는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비장처(秘藏處)’로 나온다. 달둔․살둔․월둔의 3둔과 적가리․연가리․명지가리․아침가리의 사가리가 바로 그곳이다. ‘둔’은 펑퍼짐한 산기슭을, ‘가리’란 사람이 살 말한 계곡가를 말한다. 홍천군과 인제군 일대에 흩어져 있으며, 그 중 삼둔이 홍천군 내면 창촌리와 율전리, 광원리에 있다. 홍천엔 동․서․남․북방면과 그 중앙에 내면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대표적인 오지로 꼽히는 홍천에서조차 내면은 더더욱 오지인 셈이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피난을 피해왔던, 먹고 살려고 왔던 여하튼 사람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56번 국도에 하뱃재라는 곳이 있다. 율전삼거리 바로 아래 있다. 고도가 650m쯤 된다. 율전삼거리엔 초등학교도 있고 촌이지만 주변에서 나름 번화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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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할머니는 산에서 나는 모든 것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

서서히 올라가면 귀가 멍해지기 시작한다. 거기서 산골짜기 내린천 방향으로 수백 년은 된 듯한 느티나무를 지나고 13㎞남짓 꼬불꼬불한 산길로 더 들어간다. 밤바치 고개와 폐교된 율전초등학교 분교를 지나 2㎞쯤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시멘트도로와 비포장길을 지나 도저히 더 올라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문바위마을이라 불리는 문암동이 나온다. 해발 800m 가까이 된다. 이제부터 더 이상 길도 없고 첩첩산중 산으로 뒤덮인 곳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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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듯 스러져 가는 방문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말 이런 첩첩산중 산골에 마을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계곡물은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바야흐로 녹음의 계절이다. 신춘(新春)은 신록을 부르고 녹음을 부른다. 파릇파릇한 잎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야생화들도 만발하다. 도화만 있다면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을 곳이다.


이 마을은 원래 단종 복위를 꾀하던 이들이 숨어들면서 최초로 형성됐다고 전한다. 세조의 서슬 푸른 칼날을 피하기 위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한 것이다. 아마 <정감록>의 비기를 보고 결정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후 화전민도, 세상을 등진 이들도 함께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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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있는 부뚜막과 아궁이도 전형적인 옛날 우리 시골의 모습 그대로다.

드문드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마을 제일 높은 곳, 문암산 중턱에 주시용(91)․김용선(86) 노부부가 살고 있다. 터전을 내린 지 자그마치 60년이 된다.

“일정 때 군인들이 여자를 공출하러 다녔지.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러나 결혼한 여자는 빼줬어. 빨리 시집갈 수밖에 없었지. 고종 사촌 오빠가 중매를 해서 바로 결혼을 했어. 그래도 불안해서 아예 산에 들어와 살았지. 그게 벌써 60년이 다 되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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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벽에 걸려있는 농기구들도 수 십 년 시골에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김용선 할머니의 말이다. 할머니는 강원도 인제가 고향이다. 16세 때 공출(일제 때의 정신대)을 피해 할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그게 1941년쯤 된다. 인제에서 고성으로 옮겼다. 당시 할머니에게 고성은 안전한 장소가 못됐다. <정감록> 비장처인 삼둔의 살둔지역인 문바위마을로 들어와 버렸다. 해방이 됐는지, 난리가 났는지 전부 딴 나라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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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용․김용선 노부부가 집 앞에 있는 오가피나무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함께 섰다.

“처음 들어왔을 땐 여러 가구 살았지. 지금은 다 떠나고 없지만. 당시엔 산에서 농사짓고 산나물 캐서 먹으며 그렇게 세월을 보냈지. 4남4녀 자식들은 전부 도시로 나갔어. 큰 아들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둘째 아들이 서울서 살다 몇 년 전에 같이 살고 있지. 늘 산에서 살아 외로운 건 몰라.”

외로움을 잊고 산 지 수십 년, 주변에 즐비한 야생화와 각종 산나물을 친구삼아 세월을 즐기고 있다. 집 앞엔 금낭화가 활짝 피었다. 개불알꽃도 여기저기 피었다고 할머니는 신난 듯 가리켰다. 야생화만 핀 것이 아니다. 곰취와 오미자, 산머루도 있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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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엔 겨우내 말린 시래기가 걸려 여름과 가을에 국으로 올라올 예정이다.

노부부는 60년 전 이 집에 세간을 들여놓을 때 그 집 그대로라고 했다. 널찍한 부엌에 부뚝막과 장작 때는 아궁이, 강원도 전통 가옥구조인 투방집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창호지에 낡은 툇마루 등 전형적인 촌집이고 옛집이다. 당시에도 낡은 집이었지만 그냥 조금씩 수리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집은 100년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할머니가 얘기하던 도중 빨간 색깔의 차를 내왔다. 살짝 맛을 보니 독특하다. 산머루를 따서 오미자와 섞고 물렁해진 돌배에 설탕을 넣은 것을 혼합해서 만든 차라고 했다. 여태 먹어본 차 중에 가장 특별하고 맛있다. 노부부의 얘기는 계속됐다.

“할머니는 나 같은 사람 만나 이렇게 건강하고 오래 살고 있는 거여.” (할아버지)

“당시엔 장가 가라, 시집 가라고 하면 그냥 가는 시절이었지, 내가 선택할 수 없었지. 나이가 어려 조그만 게 무슨 느낌이나 있었겠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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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와 항상 함께하는 유일한 동물인 개가 집을 지키고 있다.

노부부가 낳은 8남매는 이곳에서 4㎞ 남짓 떨어진 곳에 율전초등학교 분교에 다녔다. 등하교 거리가 하루에 최소한 9㎞ 였다. 지금도 대중교통이 들어가지 않는, 아니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걸어서 학교 가던지, 집에 있던지 선택 외 다른 수단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 둘째 아들이 들어오면서 4륜구동을 가지고 왔다.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율전초등학교 분교 근처에 사는 김병열(58)씨 고향도 문남동이다. 초등학교 6년을 하루 9㎞ 이상 꼬박 걸어서 다녔다. 그가 율전 2리인 이곳으로 옮긴 것은 순전히 애들 학교 때문이었다. 그는 걸어 다녔지만 애들까지 9㎞ 이상씩 꼬박 걸어 다니는 모습을 측은해서 그냥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옮겨 버렸다. 그러나 큰 애가 5학년 일 때 분교가 폐교됐다. 다시 분교에서 3㎞ 떨어진 율전초등학교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아예 학교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 애들을 지내게 했다. 애들과 같이 지낸 시간이 별로 없을 정도다.


주시용․김용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무와 숯을 구워 팔아 생계로 삼는 등 평생을 산에서 의식주 모든 것을 해결했다. 다시 할아버지의 말이다. “할머니가 네 째를 낳고 몸이 안 좋아 내가 산에서 만삼을 캐와 달여 먹었더니 거뜬히 나았지. 더덕(사삼)은 남자에게 보약이고, 만삼은 여자에게 보약이지. 물론 산삼은 모두에게 보약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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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변엔 금낭화를 포함한 각종 야생화와 곰취와 오가피나무 등 산나물, 비닐하우스엔 야채 등 모든 의식주를 산에서 해결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산 사면을 가리키며 지금도 만삼을 키우고 있다고 가리켰다. 실제로 산 주변엔 약초와 산나물로 온통 뒤덮여 있다. 이 집이 문암산 산중턱, 즉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집 기준으로 동북쪽에 문암산, 동남쪽에 석화산이 있다. 석화산의 봄은 진달래가 장관을 이루고, 가을 단풍은 설악에 버금갈 정도라고 한다. 문암산의 1000m 안부엔 산채와 야생화 천국이라고 동행한 <한국 700명산> 저자 신명호씨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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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손수 담근 복분자 주스를 기자 등 손님들에게 주기 위해 따르고 있다. 정이 넘친다.

장날이면 문바위골을 넘어 지금 면소재지가 있는 창촌으로 간다. 6㎞ 이상 되는 거리다. 세월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가면 가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세월 따라 흐르면 된다. 발길 닿는 대로 문바위골을 넘어 나무와 숯, 산나물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구해왔다. 문암동이란 유래도 장 보러가는 고갯길 중간에 꼭 문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문바위마을이라고 부르게 됐다. 바위를 한자로 고쳐 문암동이란 행정지명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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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부뚜막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련한 추억을 보는 듯한 부엌이다.

남한의 시군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으며 서울의 3배에 이르는 홍천, 산지가 군 전체의 87%를 차지하는 곳이다. 북으로는 춘천시와 인제군, 서로는 경기도 가평군과 양평군, 남으로는 횡성군과 평창군, 동으로는 양양군과 강릉시가 접한다.

골짜기의 골짜기, 삼둔사가리의 대표 비장처 살둔마을의 문바위마을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노부부 옛날 집에 현대식 흔적이 한 군데 눈에 띈다. 주소다. 우체함에 ‘홍천군 내면 율전리 율전3리 문바위길 151-105’라고 되어 있다. 아직까지 강원도 전통의 투방집 구조와 외관을 그대로 간직한 한국의 대표적 오지의 집 주소다. 민박도 펜션도 없다. 혹시 오지를 찾는 게 취미이거나 등산하다가 갈 기회가 있으면 한 번 가보라. 얼마나 첩첩산중이고 오지인 지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4 Comments

  1. 금난지교

    06.21,2012 at 3:37 오후

    박정원 선생.
    본인은 조선일보 와플타임스 독자로서 6.21.와플타임스를 받아보고 댓글드림니다.
    그먼 산간오지 문바위 마을까지 답사하고 이글을 쓰신 노고에 대하여 치하를 드립니다.
    연이나 (그러나)본인도 작년 가을에 이곳을 탐방하고 주시용의 아들 주석현을 만나 한나절을 보내고 왔는데 그곳을 탐방하게된 동기는 2011.5.26.자 조선일보 Magazine+2 D3면
    내용을보고 가게되었으며 .당시의 기사내용과. 오늘 박선생의 게시내용이 너무나 흡사하여 당시의 내용을 바탕으로하여 작성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가서 문의 해봅니다.
       

  2. 박정원

    06.21,2012 at 5:53 오후

    당시 그 기사를 제가 쓴 것입니다. 그 때 올리지 못했던 내용을 지금 시기가 맞아 올렸습니다.    

  3. 반달기사

    06.22,2012 at 12:23 오전

    저런 심심산골에서 세상 시름 잊고 지내니 장수하시는군요.   

  4. elan

    06.22,2012 at 11:11 오전

    80년대에나 오지죠. 지금은 내면에서 서면이나 구룡령까지 포장도로에다가 사시사철 버스가 다니는데… 90년대초만 해도 지금은 관광지화된 삼봉 약수는 승용차로는 진입이 어려웠고, 계곡에는 수달 천지였는데… 오지라고 하기엔 주변이 이미 현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눈에 안띄는 곳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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