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실상사 주지로 있는 도법스님은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 본부장이기도 하다. 조계사에서 도법 스님을 만나 지리산과 지리산둘레길에 대한 모든 얘기를 들었다.
-지리산둘레길이 어떻게 태동하게 됐습니까?
“2004년 3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전국을 순례하면서 세속에 찌든 현대인들이 성찰의 삶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고, 성의 있게 찾아오는 몸짓으로 정성스럽게 찾아가서 만나는 방법이 좋겠다는 문제가 제기됐어요. 그 방법은 걷는 것이었죠. 그것도 현대인들이 신체․정신적으로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자연 속에서 자기의 두 발로 걷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5년여 전국을 걸어보니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리산을 한 바퀴 돌면 충분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둘레길을 조성하자고 제안했죠. 당시 탁발순례에 동행했던 사람이 나(도법 스님)와 수경 스님(화계사 주지), 시인 이원규와 박남준 등 10여명이었어요. 이후 지리산생명연대, 녹색연합, 지리산권 시민단체 등이 지리산 대안운동으로 동참했어요.”
도법 스님은 당시 5년간 전국 탁발순례를 하면서 지리산만 3~4바퀴 돌았다. 앉아서 하는 참선보다 ‘움직이는 선원’의 개념으로 90일 동안 침묵하면서 지리산을 돌았다. 아침․저녁으로만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고행을 하며 걸었다.
도법스님이 지리산둘레길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누구를 찾아가 지리산둘레길 조성의견을 타진했습니까?
“당시 건교부 장관이 강동석씨였고, 문광부 장관이 이창동씨였습니다. 이들을 직접 찾아가 지리산둘레길을 조성하자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죠. 강동석씨는 찬성 입장이었으나, 실무인 도로국장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강동석 장관이 실무적인 문제보다 정책적 판단도 때로는 필요하다며 도로국장을 설득했죠. 처음 하는 일이라 법적인 부분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산림청이 받아서 2005년 타당성 조사를 마치고 2007년 산림청 녹색기금의 민간공모사업 일환으로 ‘환지리산트레일조성사업’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왜 지리산이었고, 지리산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시다시피 지리산은 고대사와 근․현대사 등 우리 민족의 모든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성산이며, 모성의 산입니다. 난 어머니의 산보다는 모성의 산이란 말이 지리산에 더 어울린다고 봅니다. 어머니보다는 모성의 개념이 훨씬 넓고 광범위하죠. 그리고 지리산은 한반도에서 중요한 자연생태의 한 축입니다.
자연은 인간과 공존의 개념으로 봐야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의 모성인 마고할미의 전설이 서린 산이고, 가야의 역사와 왜구의 침입, 한국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이죠. 전후에는 빨치산들이 활동한 좌우대립의 아픔을 품은 산입니다. 현대에 와선 산업화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농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간직된 산 아닙니까? 이만한 가치를 지닌 산이 우리나라에 또 어디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의 모든 역사와 아픔을 간직한 산이며, 생태와 생명문화를 간직한 산이라고 볼 수 있죠. 이는 21세기적 가치로 새로 정립될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리산을 대안문명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과 물질문명으로 눈 멀고 귀 먹어 향락과 소비가 최고의 미덕처럼 돼버렸습니다. 이런 일상적인 삶을 되돌아보고자 둘레길을 제안한 겁니다. 지리산은 그런 차원에서 한마디로 생명평화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과 자연 모두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지리산이 생명평화의 삶이 되어갈 수 있는 고향으로, 성지로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 하나의 방편이 바로 지리산둘레길인 것입니다.”
도법 스님이 말하는 생명평화운동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이 공존했던 원래 문명이 다시 형성되고, 좌우대립의 이념을 넘어 모두가 평화롭게 함께 사는 사회를 추구하며, 도시와 농촌이 함께 잘 사는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이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이를 화두로 삼기를 권했다. 생명평화운동은 신라 원효 사상의 현대적 의미라고 강조했다. 원효의 화쟁사상이 바로 생명평화운동이며 이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4년 지리산둘레길이 태동한 계기가 된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할 때 도법스님(가운데)이 수경 스님(오른쪽)과 시인 이원규씨와 나란히 걷고 있다. 사진 이원규 제공
-지리산둘레길이 이번에 개통식을 하는데, 원하시는 방향대로 조성됐는지요?
“현재 상태로만 본다면 당초 취지를 못 살렸다고 봅니다. 정부․지자체․주민 모두 무조건 방문객만 많이 모으려고 합니다. 원래 의도는 현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이웃과 자연생태를 만나면서 중요한 새로운 가치에 눈 뜨기를 기대했습니다. 도시인들이 둘레길을 걸으면서 고향을 다시 생각하고, 지역의 마을공동체를 떠올리며, 도시와 농촌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나아가 미래 우리 사회를 짊어질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길, 이들이 한 번 찾아와서 다시 오고 싶은 길, 이들이 길을 걸으면서 성장하고 꿈을 키울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 길이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지역과 사회, 나아가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야 없지만 점차 개선되리라고 봅니다.
-기존에 개통된 지리산둘레길을 통해 귀농․귀촌자가 조금씩 증가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하동과 남원 주변에 실제로 귀농․귀향 인구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도시 성공인으로서 귀촌․귀향인은 농민을 두 번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차 몰고 다니며 농촌 생활을 즐기는 모습은 농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농촌 주민으로 살 사람이 실제로 필요합니다. 즉 농촌공동체에 합류할 사람들이 내려와 이들이 주민과 힘을 합쳐 마을을 이끌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긴 호흡으로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언론이 지리산둘레길에 관해 보도를 할 때 성찰을 통한 통합적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둘레길을 단순히 관광 차원에서 보도한다면 원래의 의미를 크게 퇴색시킬 수 있습니다.”
도법 스님이 조계사 화쟁위원회에서 지리산둘레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리산둘레길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까?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연과의 단절입니다. 인간은 원래 자연과 함께 하며, 자연 속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철저히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눈은 자연의 색을 볼 수 없고, 귀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코는 자연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몸은 자연의 느낌을 감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됐죠. 그나마 근근이 입으로 자연의 맛을 연명하는 수준입니다. 인간이 시간만 나면 산으로 들로 가려는 건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본능이죠. 등산도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은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성적 가치판단은 더 편리한 생활만 추구하고 있죠. 괴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는 게 현대인들의 당면과제라고 봅니다. 자연에 피해와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과 자연은 공동운명체입니다. 지리산둘레길이 이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