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실체와 정의는?…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없고, 현재는 ‘0’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갇혀 산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시간이라는 명확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별 생각 없이 지나치지만 사실은 과학, 종교, 철학 모든 면에서 핵심적인 화두가 된다. 과연 이 시간을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시간의 일반적인 개념은 ‘외적 사건들에 대한 순차적 측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인간의 인식가능 속에서 시간을 이해하려는 관점으로 동향이 바뀌고 있다.

과거·현재·미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고 마음이 만들어 낸 상(相)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논리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므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기억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미래는 오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가 오는 것을 예상할 수는 있다. 현재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따져보면 1초 전도 과거고, 10분의 1초 전도 과거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시간은 길이가 제로고, 따라서 없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의 기억과 예상에만 있고, 현재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영과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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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광섭 교수가 쓴 <시간의 순례자> 책 표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서양의 3대 사상가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흐름이 마음(영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제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상 성립하지 않으며, 현제에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깥을 대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기억, 감지, 예상으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이를 주관적 시간관 또는 심리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객관적 시간관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몇 몇 학자들의 시간에 대한 정의를 간단히 살펴보자. 근대 과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뉴턴은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서 일정하게 흐른다”라고 말했다. 절대적 시간의 관점이다. 절대시간은 관찰자가 없어도 혼자 흘러가는 독립되어 있는 시간이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상대적 시간은 다른 것과의 관계, 특히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다시 말해 관찰자가 사용하는 시계로 재는 시간만이 의미가 있다. 라이프니츠의 상대적 시간은 과학적 뒷받침이 없어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면서 빛을 보게 된다.

용수보살은 시간의 공(空)성을 주장했다. 空 사상은 연기사상과 밀접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서의 독립된 성질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도 없고, 물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시간 자체만으로 흘러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시간이란 것도 오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며, 절대적 시간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의 상대론과는 조금 다르다.

상대론에서는 객관적 시간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상대적이라 말하고, 空 사상은 기본적으로 객관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시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일체유심조(一體唯心條)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들을 우리가 일체의 경험을 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 없이는 경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전제이다. 이것을 선험적이라고 한다. 이 세상은 우리 인간들끼리 시간과 공간이란 형식을 갖고 특유한 방식으로 경험을 하며 만든 상(像)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 대표적인 학자가 칸트다. 우리 일반적인 상식, 또는 물리학적으로 시간과 공간은 자연현상의 일부이며, 객관적인 것이며, 관찰자의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의 주관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물이 공간적으로 벌여져 있고, 시간적으로 질서 있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인식수단이 시간과 공간이란 좌표를 갖고 거기에 맞게끔 현상을 파악하며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내적 형식과 공간이라는 외적 형식을 갖고 그 틀에 꿰맞추어 지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시간은 감성의 내적 형식이며, 선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대하는 관점이 철학과 과학이 조금 다르다. 과학은 확실성을 추구하는 반면 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하고, 과학이 객관적 사실을 바탕 하는 반면 철학은 주관적 사고에 기반 한다. 또 과학은 현재까지 얻어진 데이터에 국한된 사실만을 다루므로 확실한 반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은 더 넓은 세계를 포괄할 수가 없다.

천지도 역사도 모두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고 시간관이다. 천지와 인간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유일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 기독교의 세계관이다.

이 책에서는 아인슈타인부터 칸트, 불교 용수보살부터 기독교 아우구스티누스, 한국 민족종교 수운과 증산, 원불교 소태산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시간여행을 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시간의 본성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저자인 소광섭 교수는 “시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지혜와 방향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정말 시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이며, 왜 모든 것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다. 더 나아가 시간을 바탕으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종교의 영원한 화두다. 아니 과학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 영원한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종교의 시간이고, 원불교의 시간인 셈이다.

결국 시간은 실재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상(相)이다. 나를 알기 전에는 시간을 알 수 없고, 시간의 본성을 알기 전에는 우주의 근원도 알 수 없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5 Comments

  1. 지해범

    06.04,2013 at 1:06 오후

    우리는 과거에 만들어진 음식을 지금 씹어먹음으로써 내일을 산다.
    시간은 우주만물 속에 존재하며, 생명체에게는 삶과 죽음의 근원이다.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이 있으면 나와보라.
    시간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쩔 수 없는 실상이다.    

  2. 박정원

    06.04,2013 at 2:07 오후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전부 마음이 만든 상입니다. 모든 존재 자체가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을 사진으로 찍었을 때 나타나는 형상도 그것을 10분의1, 100분의1로 나눴을 때 존재가 아닌 희미한 점으로 나타나는 모습과 같이 실상은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3. 단동무니

    06.05,2013 at 12:02 오후

    우리가 보는 태양은 사실 약 8분 전 태양의 과거 모습이죠. 빛이 우리 눈까지 날아오는 시간이 8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늘 과거의 상만 보며 살고 있지요.
    그 과거의상은 미래가 던져 놓은 그림자나 흔적이라고 나름 생각하는 편입니다.찰라를 앞뒤로 영원이 잘게 쪼개도 항상 ‘찰라’는 존재 하는 것 같아요. 전 그 ‘찰라’를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ㅎ   

  4. 지해범

    06.05,2013 at 3:32 오후

    현대 천체물리학의 발달은 2000년전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시절 예수와 부처 등이 했던 삼라만상에 대한 사유를 크게 보완해줍니다. 즉 두루뭉실한 사고는 더이상 미덕이 아니며, 면도날 같은 엄격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시간의 실체 문제와 나의 실상 문제는 근본적으로 연관돼 있다하더라도 분리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해는 뜨고 세상은 돌아가듯이…
    어쩌면 이런 논의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모두 자기 얘기만 할뿐, 다른 사람의 견해와은 일치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어의 정의부터 각자 다르기 때문이지요.    

  5. 박정원

    06.05,2013 at 5:15 오후

    시간이란 문제는 인간의 과학으로 영원히 풀지못할 숙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풀지 못할 숙제는 결국 종교로 귀결되지요.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얼마나 됩니까? 아마 비율로 따지면 20%도 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80% 이상 되는 부분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양립할 수밖에 없는 필수적 조건이고, 종교가 더욱 번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나의 존재와 실상문제는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란 존재와 실상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때 결국 나란 실상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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