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옛길은 옛길로서 2010년 11월에 명승으로 지정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유적지다. 현재 대관령옛길은 강릉바우길의 14개 구간 중에 2구간에 해당한다. 대관령휴게소~양떼목장 옆~국사성황당과 산신각~KT송신탑~반정(산불감시초소)~이병화유혜불망비~옛날주막~하제민원(산불감시초소)을 거쳐 대관령박물관까지 총 11.5㎞에 5시간 45분쯤 걸린다.
반정에 있는 대관령옛길 비석.
대관령은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고갯길이다. 선비와 보부상등이 넘나들던 숱한 사연을 안고 간직한 길이다.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이 길을 지나 <관동별곡>을 쓰고, 한국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6살밖에 안된 아들 율곡을 데리고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오갔다.
강릉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농산물이 이 길을 통해 영서지방으로 넘어갔고, 영서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이 이 길로 구산리의 구산장, 연곡장, 우계(옥계)장 등으로 팔려나갔다. 이 물산의 교역은 ‘선질꾼’들이 담당했다. 그 선질꾼들이 넘나들던 길이 대관령옛길이다. 또한 개나리봇짐에 짚신을 신고 오르내리던 옛 선비들의 역사적 향취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은 조선 초기만 해도 사람 한둘이 간신히 다닐 정도였으나 조선 중종 때 강원관찰사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혔다.
대관령옛길 아래 부분에는 녹음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대략 16세기부터다. 그 전에는 대관(大關)이라 불렀다. 큰 고개를 의미하는 ‘大’자를 붙이고 험한 요새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關’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는 ‘大嶺(대령)’이라고 쓴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에서는 ‘大峴(대현)’으로 기록돼 있다. 두 개념 모두 큰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 초기까지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태종실록>에도 ‘大嶺山(대령산)’으로 돼 있다. 조선 중종에 이르러서야 대관령이란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관령’이라고 처음 언급하면서 ‘이를 대령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관령이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온다. 따라서 대관령이란 고갯길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숱한 사연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야생화 만발한 대관령옛길을 걷고 있다. 반면 나무들은 고지대라 그런지 5월 중순까지 아직 신록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관령휴게소를 나서자 양떼목장과 선자령 가는 길을 가리키는 양 갈래의 이정표가 나온다. 평창과 강릉의 경계다. 선자령 가는 길로 접어들면 푹신한 흙길에 만발한 야생화에 흠뻑 빠져든다. 보라색의 얼레지, 노란색의 괭이눈, 또 다른 모양의 노란색의 개별꽃, 연보라색의 현호색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다. 습지식물인 속세도 유달리 눈에 띈다. 높지도 않은 길, 푹신푹신한 흙길, 야생화 만발한 길을 들어서면 누구라도 감탄하는 길이 대관령옛길이다.
길은 우거진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다.
야생화는 끊임없다. 서서히 고도를 올리면서 수종도 조금씩 변한다. 구상나무와 일본잎갈나무, 전나무가 혼재림을 이루고 있다. 시원하다. 중간 중간에 한국의 대표 수종인 소나무와 참나무도 빠지지 않고 있다.
잠시 고갯길을 올라서면 능선이다. 대관령옛길 구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GPS가 고도를 962m를 가리킨다. 백두대간이 이곳으로 연결된다. 능선 위에선 강릉방향인 동쪽으로는 가파른 급경사 지형이고 올라온 왼쪽은 완만하다. 그만큼 강릉사람들은 대관령 고갯길을 오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대관령옛길에 평일에도 일반인들이 많이 찾는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고갯길을 구불구불한 길로 연결시킨 아흔아홉 굽이길 그대로 간다. 경사는 있지만 길은 굽이져 별로 가파른 느낌을 받지 않고 걷는다. 크게 자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봄에는 야생화 만발하고, 여름엔 시원한 숲 그늘, 가을엔 단풍으로 아름답고, 겨울엔 눈이 쌓여 더욱 운치 있는 길이다. 이 말을 보증이라도 하듯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이정표가 나온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대관령 그림.
반정(半程)이다. 반정은 시내에서 대관령 정상까지 대략 20㎞의 중간지점이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반쟁이라고도 부른다. 웃반쟁이와 아랫반쟁이가 있으며, 상반정은 대관령의 중턱이다.
숲속의 초본식물들은 파릇파릇한 녹색으로 치장하며 녹음으로 무장하고 있다. 엘레지, 현호색, 개별꽃, 개망초 등 만발한 야생화는 방문객의 눈길을 끄느라 자태를 뽐내고 있는 듯하다.
김시습 시비에 이어 단원 김홍도의 대관령 그림도 나온다. 곧이어 신사임당 시비도 나온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란 제목의 시(詩)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강릉)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해저문 산에 흰구름만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지극한 효심을 잘 표현한 시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 이이를 데리고 대관령옛길을 넘으면서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시가 그림과 함께 세워져 있다.
대관령옛길을 얘기하면서 신사임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임당이 여섯 살 율곡과 막 세 살 된 동생을 데리고 오랜 친정생활을 마치고 시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이별이었다. 가마타고 아흔아홉 굽이를 넘던 사임당은 고갯길에서 내리더니 산 아래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때 나온 시가 바로 이 시인 것이다.
대관령옛길을 지나다보면 돌무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과객들이 안녕과 무사귀환을 돌에 담아 쌓는 관습에서 비롯됐다.
한국의 옛길엔 어디를 가나 돌무덤을 볼 수 있다. 돌무덤 있는 길엔 대개 서낭당도 같이 있으나 지금 서낭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 많다. 돌무덤은 과객들이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돌을 하나씩 쌓은 관습에서 비롯됐다. 그 돌에 무사귀환을 당부하고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산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 어귀나 특히 고갯길에 돌무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대관령옛길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개의 돌무덤을 지나친다. 대관령은 특히 험준한 산세여서 그 옛날 호랑이가 득세하던 시절, 개인의 안전을 기원하는 관습이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강릉바우길 이기호 사무국장이 대관령옛길에 세워져 있는 이병화 유혜 불망비를 쳐다보고 있다.
길 중간 중간에 쉼터와 의자가 구비돼, 방문객이 힘들면 쉬어가도록 하고 있다. 옛날 주막도 복원했다. 널찍한 마당에 연못까지 조성해서, 운치 있는 주막 그대로의 모습이다. 주모와 막걸리만 있으면 영판 옛날 주막분위기다.
대관령옛길에 복원된 옛날주막에 정원과 연못 등이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
대관령 이정표는 자주 나온다. ‘대관령옛길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영동지방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으로서, 예로부터 이 길을 이용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며, 또한 천년의 역사가 이어져 오는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시발지로서 백두대간의 뿌리인 태백산맥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입니다. (중략) 문화재청으로부터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지정 명승 제75호(2010,11,15)로 지정된 길이기도 하며, 강원도 명품 산소길 18선으로 선정된 길로서… (후략)’
옛길주막에 물레방아가 세월의 흐름을 잊은 채 돌고 있다.
대관령박물관이 저만치 보인다. 대관령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한 개인이 수집한 민속 역사 유물을 기증한 것을 강릉시에서 박물관을 건립해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유물이 많다.
오전 10시 조금 못 돼서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한 옛길을 오후 4시 가까이 돼서야 박물관에 도착했다. 아흔 아홉 고개 따라 걷던 선비들의 자취가 느껴지고, 그들이 남긴 역사가 되새겨지고, 대관령의 역사가 떠오르는 명품 옛길이다. 사계절 언제 걸어도 흠 잡을 데 없이 만족할 만 했다.
대관령옛길 2구간 끝자락엔 제법 큰 계곡이 나와 옆으로 간다.
대관령옛길 이정표와 안내판.
대관령옛길에 대한 유래가 적힌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