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임진왜란 초기 상황… ‘연전연승’ 수군과 ‘지리멸렬’ 육군 묘사

1592년 4월13일, 부산포에 첫 발을 디딘 왜군은 이틀 만에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북상한다. 중로(中路)는 동래→대구→상주→충주→여주로, 동로(東路)는 동래→언양→경주→충주→용인으로, 서로(西路)는 김해→성주→추풍령→영동→청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불과 20일 만에 서울도 함락되고, 6월에는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했다. 한마디로 파죽지세.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요즘 말로 ‘훅 하면 사라질’ 위기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천천히 걸어가도 20여일 걸린다. 조선의 군대는 왜군의 기세에 눌려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혼비백산 사라진 기막힌 상황이었다. 조선의 운명이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310여 년 전에 이미 일본에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대 치욕적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그러나 왜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식량과 군수물자 등  더 이상의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육군이 지리멸렬하면서 연전연패하는 반면, 수군은 연전연승하면서 왜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 왜군의 진격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수군의 중심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그는 풍전등화의 조선을 살린 구세주였다.

 

이순신과 한산대첩, 임진왜란의 대세를 조선으로 바꾼 최대의 인물이고 최대 전환기적 사건이다. 한산대첩은 행주대첩․진주성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히며,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인 명량대첩과 노량진대첩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한산대첩은 기원 전 480년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의 칼레(Calais)해전, 1805년 영국 넬슨의 트라팔가(Trapalgar)해전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에 꼽힐 정도로 해전사에 길이 남을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 일부에서는 세계 3대 해전뿐이고, 4대 해전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순신과 거북선은 미국 워싱턴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박물관, 중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두 번에 걸친 왜군과의 7년 전쟁 중에 총 23번을 싸워 23번을 이겼다. 즉 23전23승이다.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영국의 외교사가인 머독(James Murdoch․1856~1921)은 한산대첩을 가리켜 “이 해전은 한국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으며, 일본 침략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매년 한산대첩 축제 기간 중에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한려해상에 띄워 당시 모습을 재현한다.

매년 한산대첩 축제 기간 중에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한려해상에 띄워 당시 모습을 재현한다.

 통영에서는 한산대첩 370주년이 되던 1962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순신 장군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한산대첩축제를 개최했다. 1961년 온양에서 온양문화제란 이름으로 이순신 장군관련 축제를 열었으나 이순신 장군 이름을 걸고 축제를 개최한 것은 처음이다. 53회째를 맞은 올해도 8월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병선(문화)마당 및 통제영, 이순신공원 등 통영시 일원에서 한산대첩을 재현하는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올해의 주제는 ‘난중일기(亂中日記)’. 2013년 6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정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전쟁 중에 기록한 유래를 찾기 힘든 전쟁기록물이다. 7년간 7권의 일기와 부록으로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 등 총 9책으로 구성됐다.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12월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사료다. 공식 지정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任辰狀草).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유비무환의 진중생활, 인간 이순신의 적나라한 모습과 생각, 부하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부하에 대한 사심 없는 상벌의 원칙,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간언, 군사행동에 있어서의 비밀 엄수, 전투상황의 정확한 기록, 가족․친지․부하장졸 간의 관계,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돼 있다.

 

아쉽게도 한산대첩이 벌어진 1592년 7월 일기는 빠져 있다. 정확히 6월11일부터 7월31일까지의 긴박한 상황이 없는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기록할 시간이 없었던 것인지, 후대의 관리소홀로 사라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순신 장군이 직접 기록한 한산해전의 장계(狀啓, 조선시대 관찰사․병사․수사 등 왕명을 받고 외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거나 청하는 문서)에는 소상히 기록돼 있다.

이순신 장군으로 분장한 축제위원장이 출정을 명령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으로 분장한 축제위원장이 출정을 명령하고 있다.

 ‘맑다. 아침에 떠나 바로 당포(지금의 통영 삼덕리) 앞 선착장에 이르니 적선 20여척이 줄을 서서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가 둘러싸고는 서로 싸움을 벌였다. 적의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했다. 배 위에는 누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됨직했다.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비가 퍼붓듯 마구 쏘아 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순간 모든 왜적이 놀라서 한꺼번에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화살을 쏘아대니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남김없이 모조리 무찔렀다. 조금 뒤에 큰 왜선 20여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로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지금의 통영 추도리)로 물러갔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6월2일의 기록이다. 임진왜란 발발 한 달도 안 된 5월2일의 난중일기에 당시 육군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왔는데, 말하기를 “남해 현감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곡포․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에 대한 소문을 듣더니 갑자기 도망쳐 버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흩어져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오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칠 약속을 했는데,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밝혔다. 그러나 낙안 군수 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하니 안타까웠다. 엄연히 군법이 있는데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 (후략)’

 

지리멸렬하는 육군과 연전연승하는 수군의 대비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 달도 안 된 5월4~10일까지 첫 출전해서 옥포․합포․적진포의 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 5월29~6월2일까지 2차 출전에서도 사천․당포․당황포․율포 등 4번의 전투에서 왜적의 선박을 모두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둔다. 2차 출전 사천 전투에서 거북선을 처음 출전시켰다.

이순신이 두 차례에 걸쳐 남해에서 왜의 수군들을 섬멸하고 있을 때, 육지에서는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피난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적을 공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거침이 없었다.

거북선과 그 주변을 호위한 어선들이 한산대첩 장면을 재현한다.

거북선과 그 주변을 호위한 어선들이 한산대첩 장면을 재현한다.

 하지만 수군이 연전연패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심복인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구키 요시타가(九鬼嘉降)․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단시일 내에 합동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세 장수는 서울에서 급히 남하하여 부산에서 전선을 정비하여 해전에 대비했다. 육지에서의 승리에 들뜬 왜장들은 조선 수군을 우습게 보고 73척을 앞세워 몰아 부쳤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들이 도망갈 수 없도록 먼 바다로 유인한 뒤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적을 포위하고 포와 화살을 퍼부었다. 적은 59척이 침몰하고 9,000여명이 사살되는 등 14척 400여명만이 겨우 도주하는 대참패를 당한다. 역시 이순신 장군의 대승리였다. 이 전투가 해전사에 길이 남을 바로 그 ‘한산대첩’이다. 한산도 앞바다는 아군에겐 승리의 바다였고, 왜군에게 통한의 바다, 피의 바다이자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이후 왜군은 부산포 등 안전한 포구에 주둔하게 하고 조선 수군과는 가급적 해전을 피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은 모두 3차례에 걸친 출전과 10여회의 해전으로 적을 섬멸시키는 동시에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전쟁 기간 중에 모함을 받아 사형될 위기의 아찔한 순간도 있었으나 다행히 백의종군으로 그쳤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명랑해전에 출전하기에 앞서 선조에게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를 남겼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12척의 배로 왜적 31척을 격파하는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한려해상 앞바다에서 재현되고 있는 한산대첩을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찍고 있다.

한려해상 앞바다에서 재현되고 있는 한산대첩을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찍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명랑해전 출전 전날엔 병사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전달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어 몇 달 뒤 본국으로 돌아가는 왜군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왜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 7년간에 걸친 왜와의 전쟁도 끝이 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이순신에 의한, 이순신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순신의 역할은 컸다.

이순신 장군의 이 같은 해전에 대해 영국 해군준장 발라드(G. A. Ballard)는 “영국인에게 넬슨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 힘들지만 이순신은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은 오직 이순신 장군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하사관도 못 된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또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나를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엄염한 모독이다”고 덧붙였다.

한산대첩 축제 기간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북 노젓기 대회도 펼친다.

한산대첩 축제 기간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북 노젓기 대회도 펼친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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