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는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을 거쳐 동쪽 창덕궁으로 향한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한 이궁(離宮)이다.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있는데도 태종 이방원은 창덕궁을 창궐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방원이 창덕궁을 건축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궐체제는 법궁 경복궁과 이궁 창덕궁 양궐체제가 된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 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군 2)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간 법궁으로 사용했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됐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이다. 그 뜻은 왕은 중용을 지키고 덕을 국민들에게 널리 베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5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이다. 보물 제383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회화나무 4그루가 눈에 띈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다. 중국에 유학 갔다 온 신하가 가져온 나무라고 한다. 학자와 같이 기개가 있다고 해서 일명 학자수라고도 한다. 창덕궁에서 제일 많은 나무가 느티나무다.
돈화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본궁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직진해서 가면 책고(冊庫)가 있다. 그 앞에는 은행나무 2그루가 지킨다. 보통 향교나 서원에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가 방충제․방화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책갈피에 은행나무잎을 끼워두는 것도 은행나무가 방충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 진코민 성분이 있어 뇌를 맑게 하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과 은행나무, 선조의 지혜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인 구 선원전(舊 璿源殿, 보물 제817호) 앞에는 창덕궁 내에 유일한 측백나무가 지키고 있다. 그 몇 십 미터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194호인 향나무가 수백 년의 세월을 말하듯 널어져 있다. 안내문에는 수령 750여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동쪽에 있는 역대 임금들의 제례 공간인 선원전과 관련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창덕궁 본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천교를 지나야 한다. 경복궁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이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야 한다는 의미다.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역할을 하는 금천(禁川)이다. 창덕궁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이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錦川橋)라고 부른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2012년 보물 제1762호로 지정.
진선문(進善門)을 지나 왼쪽으로 인정문(仁政門)을 지나면 본궁인 인정전(仁政殿)으로 향한다. 인정문은 홍살문으로 돼 있다. 홍살문은 신성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어진 정치’를 펴라는 의미를 담은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주요 국가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에는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용상과 그 뒤로 일월오봉도가 중앙을 지키고 있다. 인정전은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대표한다고 해서 국보 제225호로 지정.
뒤로 가면 선정전 일원이 있다. 왕이 고위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이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리다, 1461년(세조 7)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선정문을 들어서서 선정전으로 가기까지 비를 맞지 않고 갈수 있도록 복도각도 건축돼 있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보물 제814호.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이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왕의 침전이며 보물 제815호.
바로 뒤에는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으로 이어진다.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관돼 있다. 보물 제816호.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의 희정당과 대조전은 같은 성격이다.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 대유재, 소유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었다. 특히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인 규장각이 바로 이곳에 있다. 정조 즉위 초에 역대 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로 지었다. 규장각의 실무자는 문예와 학식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을 주로 임명하여 관직의 길을 열었다.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뛰어난 실학자들이 여기서 배출됐다.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경빈(慶嬪)을 맞이하여 1847년에 낙선재(樂善齋)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다. 후궁을 위해 매우 이례적으로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했다. 석복헌에서는 순종이 죽은 곳이기도 하고, 순종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했다.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다. 이 일대가 보물 제1764호.
창덕궁에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후원이 있다. 한때 일반인이 볼 수 없었던 ‘비밀의 정원’이라 하여 ‘비원’이라 불렸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連池), 관람지(觀襤池), 옥류천(玉流川)이 있다. 지금은 일정시간을 정해 제한적으로 일반에 공개하며, 항상 해설사가 동행한다. 후원 옆에서 창경궁으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