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지명에 역사의 흔적과 자취 전해… 노루가 낮잠 즐긴 장동, 쌀을 저장했던 합미성 등등

백두대간 지명이야기는 지리산권을 벗어나 덕유산권을 향해 올라간다. 보통 백두대간을 5개 권역으로 나누면 지리산권, 덕유산권, 소백산권, 태백산권, 설악산권이 된다. 지리산권은 천왕봉에서부터 여원재까지이고, 덕유산권은 육십령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여원재부터 육십령까지는 지리산과 덕유산의 중간지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간지대의 출발점인 여원재는 또한 백두대간 종주하는 사람들의 구간 분기점이 되는 지점이기도 한 곳이다.

여원재에서 출발하면 제일 먼저 지나는 마을이 장치 또는 장동부락이다. 예로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장동(獐洞)이 됐다.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고개가 이 마을의 이름을 딴 장치(獐峙)다.

마치 파도가 몰려오듯 능선이 첩첩이 흘러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마치 파도가 몰려오듯 능선이 첩첩이 흘러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장치에서 1㎞정도 가면 성터가 나온다. 이 성은 일반적으로 합민성으로 부르지만 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 등 다른 여러 이름도 가지고 있다. 동학 때 농민군의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농민군이 패전한 곳이기도 하다. 동학군이 이곳에 쌀을 저장해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한다.

곧 이어 고남산(846.4m)으로 연결된다. 이곳은 정상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고리봉~부운치~팔랑치~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지맥과 반야봉 아래의 크고 작은 무수한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이다. 북동으로는 봉화산과 백운산, 덕유산 자락도 가시권이다. 서쪽으로는 정읍 내장산과 광주 무등산도 날씨만 쾌청하면 볼 수 있다.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도 전한다.

백두대간이 길게 뻗은 능선을 배경으로 그 사이로 난 등산로를 따라 등산객들을 걷고 있으며, 그 주변에 있는 다랭이논이 더욱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백두대간이 길게 뻗은 능선을 배경으로 그 사이로 난 등산로를 따라 등산객들을 걷고 있으며, 그 주변에 있는 다랭이논이 더욱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이성계가 황산벌 대첩을 하기 전,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쪽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 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여 출정을 만류했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고 강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값을 받았다고 한다.

고남산에서 내려오면 통안재(670m) 또는 작은 독골재를 지난다. 독골재에 비해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우거진 솔숲 사이로 등산객들이 잇따라 지나고 있다.

우거진 솔숲 사이로 등산객들이 잇따라 지나고 있다.

백두대간 능선은 매요마을로 다시 내려온다. 매요리는 원래 말의 허리처럼 생겼다 해서, 마을 이름을 말 마(馬)자와 허리 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 유정대사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한 것이 지금의 매요리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됐다. 사명당은 이 지역 사람들이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라 고치는 것이 지형과 인심에 합당하다 하여 이후부터 마을 이름을 지금의 매요리로 부르게 됐다.

백두대간에 있는 봉우리들은 다 그들만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할미봉의 사연을 전하고 있는 할미봉 정상비석과 안내판.

백두대간에 있는 봉우리들은 다 그들만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할미봉의 사연을 전하고 있는 할미봉 정상비석과 안내판.

이어 매요리와 가산리의 중간, 사치마을과 연결되는 삼거리인 유치마을이다. 유치마을은 흐름고개, 즉 ‘경사가 거의 없는 고개’라는 의미와 ‘버드나무 고개’로도 부른다. 사치재(498m)는 아실재라고도 한다. 모래언덕고개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암릉이 전혀 없는 고속도로 주변과 사치재 아래로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비안낙사(飛雁落沙) 형국이라고 한다.

사치재에서 1㎞ 남짓 가면 새목이재와 만난다. 새목이는 새의 목에 해당하는 고개라는 의미다.

남근바위의 전설을 안내하고 있다.

남근바위의 전설을 안내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운봉은 신라 때 모산현이라 했으며, 따로 이 아막성(阿莫城), 아영성(阿英城), 경덕(景德), 운성(雲星)이라 이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막산성은 옛날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곳이다. 백제 무왕3년 4만의 백제 군사가 이곳에서 신라군에게 전멸을 당했다고 한다. 모산성은 <삼국사기>에서 ‘아막산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운봉으로 신라 때는 모산현 또는 아영성․아막성으로 적었다.

지리산권에서 덕유산권으로 갈수록 서서히 능선들이 암벽으로 변한다.

지리산권에서 덕유산권으로 갈수록 서서히 능선들이 암벽으로 변한다.

그 아막성이 사치재에 뒤이어 만난다. 아막성터에서 몇 분 지나지 않아 복성이재(550m)를 거친다. 복성이재에서 전하는 전설이 있다. 전형적인 명당터라는 전설이다. 기인 변도탄이 천기를 보니 삼년 내에 국가에 큰 변란을 겪을 것으로 나왔다. 이에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했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 해서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는 전란을 대비,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북두칠성 중에 복성이 남쪽으로 비쳐 별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했다. 이 별빛이 멈추는 곳에 자리를 잡고 움막을 지었다 하여 복성이재로 유래했다. 한마디로 명당이라는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전형적인 고갯길이라는 의미의 치재다. 고개라는 뜻의 치와 재가 합쳐진 말이다.

백두대간 종주꾼들은 육십령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백두대간 종주꾼들은 육십령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다시 고갯길은 가파른 산세로 이어진다. 봉화산(919.8m)이 그 으뜸에 있다. 봉화산은 전에는 장안산으로 불리어졌고, 봉화․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봉화산 봉수대는 동북쪽으로 1㎞쯤 가면 무명봉에서 ‘봉화산 봉수대’라는 팻말이 그 자취를 전한다.

봉화산을 지나면서 백두대간은 경상남도 함양과 전라북도 장수의 경계를 이룬다. 그 첫 고갯길이 광대치. 광대치는 장수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지지리계곡과 함양군 대안리를 나누는 고갯길이다. ‘넓고 큰 고개’라는 뜻이다.

넓고 큰 고갯길에서 다시 가파른 산세로 이어져 월경산(981.9m)과 접한다. 동북쪽에 위치한 백운리에서 시각으로 ‘달이 기우는 산’이란 뜻이다.

 

백두대간은 월경산과 백운산의 가운데 있는 고갯길인 중치 또는 중재로 이어진다. 백운산의 남쪽 사면과 중치 부근은 목장이 여러 군데여서 목초를 나르기 위한 임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이어 중(스님)들이 많이 넘나들었다는 절고개인 중고개재를 지나 백운산(1,278m)으로 올라간다.

백운산(1,278m)은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의 경계를 이룬 산이다. 흰 백(白)과 구름 운(雲)자를 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산이 높아서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을 감싸 안고 있는 산이란 뜻이다.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백운산은 만산홍엽의 가을 단풍과 산허리마다 흐드러진 갈대와 싸리나무, 산죽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이루는 산으로 유명하다.

남덕유산으로 서서히 접어든다.

남덕유산으로 서서히 접어든다.

백두대간 능선은 다시 고개를 서서히 높인다. 이제 웬만한 고갯길도 1000m를 훌쩍 넘는다. 영취산에 도착하기 전 만나는 선바위고개도 1,040m다. 이어 나오는 영취산(靈鷲山․1,075.5m)도 산세가 빼어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산세가 빼어나고, 신묘하고, 신령스럽다.

영취산은 13개의 정맥 중에 3개의 정맥을 가지 친 중요한 지점이다.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등의 가지를 친 산이다. 동으로는 낙동강, 서남으로 섬진강, 서북으로 금강을 발원하는 삼강의 분수령도 된다.

 

영취산은 의기 논개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논개는 영취산 북쪽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논개의 성은 주(朱)씨이고, 본관은 신안이며, 원래 전북 장수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게 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희(崔慶會)의 후처가 된 것으로 전한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전사했을 때 그녀는 복수를 결심한다.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일 때 기생으로 참석,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게 된 연유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2 Comments

  1. 김정구

    07.12,2015 at 1:10 오후

    여기저기 잘려나가고 나무가 베어지고 있습니다.
    한구루 심지도 않은자들이..

  2. 권점익

    07.27,2015 at 10:36 오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리에 아름다운 금수강산 산천초목 저 푸른 강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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