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대법원장 비서실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설악아씨를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조차 모르는 금시초문이었다. “누군가요? 사람입니까?” “지금 인터넷에 화제가 되는 인물인데요. 산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매우 눈길을 끄는 사람입니다. 한 번 취재해보세요. 굉장히 관심을 끌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바로 인터넷을 뒤졌다. ‘설악아씨’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글은 별로 없었지만 사진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산에 대한 기록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것도 상당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이렇게 세상천지를 돌아다닐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뭐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역과 산을 다니는지, 외국의 험한 산에 갈 때는 어떻게 갔는지, 위험하지는 않았는지, 일행과 같이 갔는지 혼자 갔는지, 높은 설산에 갈 때는 혹시 고소로 고생은 하지 않았는지, 여행경비는 어떻게 충당했는지…. 이런저런 궁금증이 쏟아졌다.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런 젊고 아리따운 여성이 이렇게 산을 좋아하다니…. 정말 산이 그렇게 매력적일까?
그녀의 산 이름은 ‘설악아씨’ 본명은 문승영. 2014년 갓 결혼한 불과 37세 밖에 안 된 젊은 주부였다. 첫 마디가 “산이 좋아 대입 학원 강사하다 그만뒀다”였다. 산이 좋아 직장까지 사직했을 정도다. 산에 다닌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10여년. 친구 따라 태백산에 갔다가 바로 ‘필’이 꽂혀서 계속 다니게 됐다고 한다. 한창 놀 젊은 나이에 운명처럼 산이 다가온 것이다.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을 찾듯이 태백산에 갔다 온 뒤 몸이 가뿐해지며 너무 좋은 기억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산에 빠지게 됐습니다. 정상에 오르면서 친구와 나누는 대화, 걷는 동안 주변에 널린 식물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이런 재미에 끌려 자연스레 산을 찾게 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이면 20대 후반일 때다. 20대 후반의 젊은 여성은 이때부터 온몸으로 산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신랑도 산에서 만났고, 신혼여행지도 산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갔다 온 산은 국내 산은 수백여 개, 해외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칸첸중가, 마칼루, 다울라기리, 랑탕&헬람부, 마칼루 베이스캠프, 메라피크, 안나푸르나, 아룬밸리, 안나푸르나&푼힐, 파키스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동남아시아 키나발루 등 수십여 곳. 웬만한 국내외 산은 전부 다 갔다 왔다.
그녀의 산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자. 그녀의 고향은 설악산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속초. 그녀가 설악아씨란 닉네임을 얻은 단초다. 친구들과 전화를 할 때 대화에서 비롯됐다. 친구가 “지금 어디냐”고 물으면 대부분 “응, 설악산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친구들은 아예 그녀에게 전화를 할 때면 “설악아씨, 지금도 설악산이야?”라고 먼저 물을 정도가 돼 버렸다. 그 이후 그녀의 닉네임은 자연스럽게 ‘설악아씨’가 됐다. 그녀도 설악아씨가 나쁘지 않았다. 이젠 산에서 문승영이란 이름보다 설악아씨로 통한다.
◇산의 어떤 점이 그리 좋았을까?
히말라야에 가면 산의 품속에 안겨 있는 성냥갑 같은 집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그곳 로지에서 자던지, 텐트에서 자던지 간에 히말라야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별들은 마치 유성우(流星雨) 같다. 그 유성우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녀에게는 포근하게 감싸주는 이불 같단다. 이불이 따로 필요 없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낭만적이다. 하산한 뒤에도 뚜렷한 기억은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아 뇌리를 떠나질 않는다.
히말라야의 지형이 깎여나가는 모습도 신기하다. 더욱이 그곳에 사는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하기 그지없다.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다. 그녀에게 이러한 모습들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낭만으로 비쳐졌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산에 가고 산을 찾는 이유다.
국내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화채능선, 서북능선 등에서 내려다보면 성냥갑 같은 조그만 집들이 올망졸망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속초에 있는 그녀의 집도 공룡능선에서 보인다. 설악산에서 그녀의 집을 찾는 것도 산에 가는 재미 중의 하나다.
그녀는 처음엔 혼자 산에 갔다. 산악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1997년 대학 지리학과에 입학해서 2001년 졸업한 뒤 곧바로 입시학원 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2007년 등산에 맛을 들인 뒤부터 도저히 해외산행 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해외 산행은 한 번 가면 최소한 40일 이상은 걸렸다. 학원은 방학이면 학기보다 시간이 더 없었다. 2010년쯤 부득이 학원 강사를 그만둬야만 했다.
“솔직히 얘기해서 순전히 산에 가기 위해서 사직했습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오겠느냐. 나이 들어서는 지금과 같이 산에 가기 힘들다. 산 냄새가 몸에서 풀풀 나게 언제 다시 산에 가보겠느냐. 젊었을 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거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사표를 냈습니다.”
2001년 대학 졸업 후 시작한 사회생활을 순전히 산에 가기 위해 접은 후 2011년부터 본격 해외산행에 나섰다. 그 전에는 해외여행의 개념이었으나 이때부터 해외산행이나 트레킹의 개념으로 완전 바뀌었다. 3~6개월마다 네팔, 파키스탄, 아프리카 등지에 한 번씩 나갔다. 한 번 나가면 평균 40일 정도였다. 비용은 순전히 혼자서 충당했다. 국내여행사를 통해 가면 비싸, 현지여행사와 바로 연락을 취했다. 보통 포터와 가이드 등 두세 명과 팀을 꾸렸으며, 이들과는 언제든 연락이 가능할 정도로 소통이 잘 되도록 사귀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국내외 산행과 트레킹은 대부분 혼자였지만 이들 덕분에 전혀 외롭지 않았다. 동행하는 가이드와 포터들과 소통하는 것도 일종의 산행 재미였다.
◇해외트레킹에서 남편과의 운명적인 조우
산행을 주로 혼자 다니다 종주를 하고 싶어 야생부엉이 비박산악회에 가입했다. 그녀는 창립멤버다. 산에 가져가 남은 음식은 묻지 않고 전부 가져오고, 양치도 소금으로 하는 완벽한 클린비박산악회다. 환경보호가 모토. 이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지리산에서 속리산 구간은 끝냈다. 그 때 일행들과 침낭에서 비박하면서 하늘을 이불삼아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꿈나라에 빠진 분위기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산악회에서 해외트레킹을 위해 팀을 모았다. 그 때가 2013년 8월. 파키스탄 트레킹 일정은 40여일 가량. 일행은 10명. 그 10명 중에 유독 그녀를 마음에 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도 40을 넘긴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녀를 잡기 위해 그 트레킹에 동행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트레킹 내내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의 보호본능과 구애본능이 동시에 작용했다. 그녀에게 조그만 일이라도 있으면 제일 먼저 뛰어갔다. 귀국해서도 구애는 계속됐다. 그의 구애는 1년 만에 결실을 거뒀다. 결국 그녀는 넘어갔다. 그녀는 이를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거창한 세계평화까지야 알 수 없지만 한 남자와 그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결정인 것만큼은 분명해보였다.
그는 히말라야 트레킹 가는 것을 썩 즐기진 않았다. 하지만 “가기 싫지만 너가 가는 건 말리지 않겠다”며 허락했다. 그렇다고 신부를 히말라야에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 뒤에도 히말라야 트레킹은 계속됐다. 신랑은 싫다고 하면서도 같이 가면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신혼여행지는 흔히 해외 유명 관광지를 선택하지만 그녀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택했다. 그것도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Great Himalaya Trail)이라 부르는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로 가기로 했다. 그녀 말로는 한국 트레커로는 처음이라고 한다. 총 3구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 중 동부 구간을 40일 잡고 계획을 세웠다. 예상 비용만 총 1,800만원. 혼수를 하지 않고 그 비용으로 충당했다. 어쨌든 남편도 승낙했다. 결혼식 올리기 전 일종의 ‘프리허니문’이었다.
GHT는 사실 고도 6,000m 넘는 구간이 제법 된다. 고도 6,000m 정도 되면 아마추어 등산객들에게는 위험하다. 고소와 이에 따른 체력소모…, 그리고 만년설과 낙석 등이 언제 덮칠지 모른다. 그런 구간을 어떤 위험이 잠복해 있는지 모른 채 완전 아마추어인 그녀가 남편과 같이 출발했다.
역시 위험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트레킹은 무사히 이어지는 듯했지만 고산의 날씨는 인간의 예상 밖에 있었다. 그날은 이스트콜과 웨스트콜(6,143m), 세르파니콜(6,146m)을 넘어 마칼루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특히 웨스트콜은 만년설과 낙석이 많아, 고정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 하는 코스다. 마침 내려가려는 순간 서양인들이 올라왔다. 낙석이 심해 올라오는 등반객이 다칠 수 있어 하산객이 기다려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전부 올라온 뒤 내려갔다. 이미 해는 졌다. 겨우 몸만 내려왔다. 텐트나 숙식 장비는 가져올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리는 눈은 그치질 않았고 사방은 크레바스였다. 꼼짝없이 죽을 고비를 맞았다.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와 포터 등 10명과 쪼그려 앉아 가급적 최대한 추위를 줄였다. 배낭 속에 있는 침낭만 겨우 덮었다. 꼬박 하루 반 동안을 아무 것도 못 먹고 숨만 쉬며 견뎠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눈에는 히말라야 대자연의 파노라마가 눈에 들어왔다. 한 점 때 묻지 않은 파란 하늘, 그 사이 점점이 차지한 유성우, 유성우가 쏟아져 그녀에게 다가오는 듯 착각에 빠진 감동으로 밤을 샜다. 배고픔도 뒷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 고비를 맞아 고민에 빠져 있는데, 그녀는 히말라야의 밤하늘에 펼쳐진 유성우를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서 더욱 감동받아서 얘기한다.
“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했죠. 신이 도와서 살아왔다고 봐요. 그런 곳에서 텐트도 없이 살아왔다고 대단하다고들 얘기하는데, 히말라야가 저를 살려서 보내줬다고 생각합니다. 저가 히말라야를 위해서 뭔가 할 일이, 히말라야의 신들이 저에게 뭔가 시킬 일이 있지 않아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연의 힘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더욱 저를 겸손하게 만드는 계기도 됐습니다.”
◇산과 관련된 일을 하고파…
37세의 젊은 주부 ‘설악아씨’ 문승영씨는 누구보다 부모님께 감사한다. 세상의 모든 고산들을 전혀 훈련을 하지 않고도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다. ‘이렇게 건강하게 낳아주셨구나’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태 감기가 걸려본 기억이 없다. 남들은 고산에 올라가면 고소를 걱정하는데 지금까지 숱하게 다녔지만 딱 한번 느꼈을 정도다. 그것도 랑탕 5,000m에서 너무 급하게 움직여 자초한 고소였다.
6,000m 이상 밟은 프리허니문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Great Himalaya Trail)’에서도 전혀 고소를 느끼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전문산악인 수준이다. 고산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은 식욕도 떨어지고 살이 빠지는데, 그녀는 오히려 식욕이 당긴다고 한다. 히말라야 프리허니문 갔다 와서 남편은 10㎏, 가이드는 15㎏ 몸무게가 빠졌는데, 그녀는 그대로였다. 고산에서 밥을 먹을 때도 두 그릇은 거뜬히 먹는다고 한다. 셰르파들은 “외국인이 히말라야트레킹하면서 너 같이 밥 먹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입을 모은다.
그녀는 지난해 GHT 동부를 갔다온 데 이어 올해는 중부를 가기 위해서 한 달여 일정을 잡고 지난 4월 말 히말라야에 갔다. 트레킹 3일 째 되는 날 지진이 덮쳤다. 그녀는 남체 바자르에서 지진을 만났다. 다행히 그녀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온 나라가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계속 트레킹을 해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 순간 눕체가 보였다. 4년 전 히말라야에서 만났던 그 눕체였다.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 돌아가자. 몇 년 뒤에 와도 이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거다. 내가 지금 엄청난 피해를 입은 네팔인들에게 한가하게 트레킹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고, 몇 년 뒤에 와도 히말라야는 그대로 있을 거다. 또한 다들 걱정할 텐데, 위험을 무릎 쓰고 계속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날로 바로 철수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진피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녀 나름대로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있다. 그녀에게는 히말라야가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대상이자 삶의 좋은 스승이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선 지진피해가 수습되는 대로 다시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는 것만이 이들을 도운다고 생각한다. 외국인 한 명이 찾으면 네팔은 최대 10명까지 고용창출효과가 있다. 히말라야 횡단 트레킹과 더불어 네팔 오지 트레킹을 개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네팔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를 책으로 출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싶어 한다.
“앞으로 직업을 가질 생각은 없어요?”
“저가 입시학원 강사 하던 경력을 살려 기업이나 여러 단체에 산을 주제로 트레킹 다니면서 크고 작은 경험과 느낌을 살려 강의를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산을 다녀야겠죠.”
“그 정도 되려면 엄홍길 대장수준은 돼야 할 텐테…”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꿈까지 꾸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실현 불가능해도 꿈을 가져야 행복합니다. 저도 그래서 꿈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녀의 꿈도 이뤄지지 말란 법도 없겠다. 산이 그녀의 놀이터이자 스승이다. 올 가을에는 남편과 함께 뉴질랜드 밀포드와 마운틴쿡 트레킹을 떠날 계획이다. 그녀의 꿈을 하나씩 하나씩 이뤄가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상환
12.04,2015 at 9:57 오후
정말 대단한 산악인 입니다.
좋은일 도 많이 하고 앞으로 좋은결실로
산악 지도자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