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본떠 만든 ‘江都의 주산’ 송악산… 한 세대 최고 명산역할

강화도는 그저 수도권에 있는 여느 섬이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38년간 도읍지가 된 곳이다. 그 연유로 강도(江都)라는 이름도 얻었다. 그래서 강화도에 있는 산들도 여느 산이 아니다. 한 때 나라의 왕도를 떠받친 산의 이력이 있다. 역사적으로 강화도를 대표하는 세 산을 들라면 송악산, 고려산, 마니산을 꼽을 수 있다.

송악산은 고려의 강도시대에 당당히 왕경의 주산이었다. 한 세대 동안 최고의 나라 명산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걸쳐 강화는 한양의 길목(咽喉)이라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강화에 도호부를 설치했다. 고려산은 그 때 강화도호부의 진산 역할을 담당했다. 강화를 대표하는 상징적 산이 된 것이다. 마니산은 또 어떤가? 고려시대 이후로 단군을 제천하고, 별에 제사지내는 독특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성산이다. 마니산에는 참성단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이궁(離宮)도 있었다. 이렇듯 송악산, 고려산, 마니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문화사는 강화도의 역사, 지리, 풍수와 함께 얽혀 있다.

강화도 궁전도(1881)에서 그려진 행궁, 외규장각, 장녕전.

강화도 궁전도(1881)에서 그려진 행궁, 외규장각, 장녕전.

지리적으로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는 경기만 지역의 중심부에 있다. 고려와 조선에서 조운(漕運)의 길목이 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해안으로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발달되어 선박의 진입이 어렵고, 내륙으로는 산이 중첩하여 자연성벽을 형성하는 천혜의 전략적인 요새지이기도 하다. 고려의 왕도인 개성과도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강화도의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몽고 침입 때 임시 천도지로 선택된 배경이 됐다.

고려 왕조는 1232년(고종 19) 6월 16일에 천도를 결정하여 곧바로 강화도에 궁궐 조성을 시작했다. 2년여 동안 관청 등 주요 건물 공사를 거쳐 도성의 틀을 갖추었다. 이후 강도는 38년 동안 고려의 국도로서 정치․행정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당시 고려 왕궁의 위치는 현 고려궁지(강화읍 관청리 163, 사적 133호) 자리로 비정된다. 그 자리는 조선시대에도 강화도호부의 행정적 중심지(읍치)로 이어졌다. 강화의 읍치를 상세히 묘사한 그림이 있다. 1866년에 병인양요로 건물들이 소실되자 복원을 위해 모사한 1881년의 <강화부 궁전도>다. 이 그림에는 정묘호란 때 인조가 피난했던 행궁의 모습과 함께 외규장각, 장녕전 등도 보인다.(지도1)

고려 강도의 궁궐 조성은 개성을 모델로 했다. <고려사>에는, ‘마당(毬庭), 궁궐, 사지(寺址)의 이름은 모두 송도를 모방하고 팔관, 연등, 행향도량(行香道場)은 한결같이 옛 법식에 의거했다’고 적었다. 흥미로운 것은 왕궁이 기대있는 주산 이름도 개경 도읍지와 똑같이 송악산이라고 붙인 점이다. 그 때부터 강화도의 송악산은 새 이름도, 명산으로서의 지위도 얻었다.

진산인 고려산과 주산인 송악산, 그리고 조산인 남산에 둘러싸인 강화도 읍성 및 읍치의 모습. (강화이북해방도, 18세기 중엽, 신경준, 개인 소장본)

진산인 고려산과 주산인 송악산, 그리고 조산인 남산에 둘러싸인 강화도 읍성 및 읍치의 모습. (강화이북해방도, 18세기 중엽, 신경준, 개인 소장본)

18세기 중엽에 신경준이 그린 <강화이북해방도>(지도2)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조선시대 강화 읍성과 읍치의 입지가 잘 표현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산수의 틀과 짜임새는 고려 강도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입지를 산세를 위주로 살펴보면, 강도의 송악산을 주산(현무)으로 삼고 남산을 주작으로 삼아 축선을 이루었다. 그리고 갑곶을 좌청룡으로, 고려산을 우백호로 삼아 남향하여 입지했다. 읍성 동문밖에는 알미산이라는 조산도 만들었다.

알미산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고려 조정이 몽고난을 피해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나서 동문 밖의 허함을 막기 위해 알미조산을 쌓았는데, 갑구지 서남쪽에 있는 알처럼 생긴 작은 산이라는 것이다. 알미 혹은 알뫼는 지역에 따라 조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서, 일반적으로 조산은 인공적으로 산을 쌓아 만드는 것, 혹은 그 산을 일컫는다. 조산은 풍수적으로 허한 곳을 막는 비보기능을 한다. 강도 왕경의 입지상 북쪽의 송악산을 비롯하여 서쪽과 남쪽은 고려산과 혈구산의 지맥으로 둘러쳐져 있으나, 상대적으로 동쪽은 지세가 낮은 편이어서 그 입구가 되는 동문 밖에 인위적으로 산을 지어서 비보를 했다는 것이다.

강화부사 이형상(1653~1733)은 <강도지>(1694-1696)라는 읍지를 썼는데, 송악산, 남산, 고려산의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세 산을 각각 거북, 봉황, 범과 같이 살아있는 생물로 비유되어 생생한 자태로 묘사했다. “송악산은 천년 묵은 거북이 대륙에 움츠리고 앉아서 산마루를 이고 기운을 빨아들여 만 길(萬丈)의 광염(光焰)을 맺은 것처럼 생겼다. 남산은 마치 큰 봉새가 날개를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내려와서도 오히려 고개를 들고 창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생겼다. 고려산은 범이 모든 산에 군림하여 위엄을 갖추고 발톱을 감추고 소리를 죽이고서 막 몽롱한 잠을 달게 자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

마니산이 강화의 대표적인 산으로 그려져 있다. (경기도지도, 해좌승람, 18세기 후반, 영남대박물관)

마니산이 강화의 대표적인 산으로 그려져 있다. (경기도지도, 해좌승람, 18세기 후반, 영남대박물관)

고려산은 송악산 서쪽에서 왕경을 떠받치고 있는 진산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주산과 동일한 경우도 있지만 달리 지정된 경우도 많다. 진산과 주산은 원래 서로 다른 개념의 산이다. 공간적인 범위로 보아도, 고을 진산은 고을 전체 영역을 관할하지만 고을 주산은 읍치를 중심으로 한다. 한양의 경우를 들면 이해하기 쉽다. 삼각산은 한양 도읍지의 진산이고, 북악산은 경복궁 궁궐의 주산인 것이다. 강화도의 경우도 송악산은 읍치의 주산이지만, 고려산은 강화부의 진산으로서, 관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산; 부 서쪽 15리에 있는 진산’이라고 명확히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산에는 풍수적인 단맥 설화가 전래되고 있다. <속수증보 강도지>(1695)에, ‘몽고인이 강도의 산세를 두려워하여 기맥을 누를 작정으로 고려산의 오정(五井)에 철침을 박고, 산의 사방에 돌로 기맥을 눌렀다’는 것이다. 이 단맥 설화에는 몽고와의 대외적 갈등 구조가 내포되어 있다. 강화도에는 외세에 의한 압박과 고난,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의 설화가 다수 나타난다. 그 중의 하나로 고려산의 단맥 전승도 고려산의 인근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그 배경에는 고려산이 강화 진산으로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니산의 문화사도 흥미롭다. 높이 472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이름의 격은 매우 높다. 마리산, 두악산으로도 불렀는데, 순우리말로 머리산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마니산에는 부소, 부우, 부여 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전설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다음과 같이 단군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산마루에 참성단이 있는데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이라고 한다. 전등산, 삼랑성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이 그의 세 아들을 시켜서 이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강도지>에도 이 형상은 당시까지 지속된 하늘 제사의 정황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도 옛날 고려가 하는 대로 이곳에서 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사 의식은 도가(道家)들의 의식에 가깝다.’

정상부근의 단군제천소 표기와 그 아래로 정수사 그림이 뚜렷하다. (강화지도, 18세기 후반 이후, 국립중앙도서관)

정상부근의 단군제천소 표기와 그 아래로 정수사 그림이 뚜렷하다. (강화지도, 18세기 후반 이후, 국립중앙도서관)

마니산에는 고려 고종 대에 왕업을 연장하려는 목적으로 축조된 이궁(離宮)이 있었다. <강도지>에, ‘마니산 남쪽 의황촌에 있었고, 고려 고종 기미년에 창건한 것이며 지금도 터가 남아있다’고 했다. 현재 이궁의 위치는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51번지 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궁지는 강화도의 남단에 마니산을 등지고 해안을 바라보며 입지했다. 이궁이 마니산을 기댄 것은 강화에서 가장 높은 산일 뿐만 아니라, 단군의 참성단이 있는 신성시된 장소라는 상징성도 입지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지리적인 요새지라는 배경도 있다. 원래 마니산지 일대는 고려말기까지만 해도 강화 본도와 분리되어 있는 고가도(古家島)라는 섬이었다. 현재의 연륙화는 간척사업의 결과다. 마니산이 위치상 강화도 내에서도 남단 끝에 격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접근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라는 자연지리적인 조건도 고려 이궁지의 장소 선정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경기도 지도>를 보면 마니산만 홀로 그려져 있다(지도3). 1840년에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쓴 한양가(漢陽歌)라는 가사에도 ‘강화의 마니산이 도(都) 수구(水口) 되었에라’라고 읊었다. 강화의 마니산이, 거시적으로 볼 때 한양 도읍지의 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진산인 고려산의 상징적 비중이 약해지고, 마니산이 강화를 대표하는 산으로 부상했다는 의미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강화지도>에는 마니산을 회화적으로 묘사했다. 산 속에는 정수사도 보이고, ‘단군이 하늘에 제사한 곳(檀君祭天所)’라는 표기도 있다(지도4). 또한 1872년에 그려진 <강화부 전도>의 마니산 꼭대기에는 참성단도 뚜렷하게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지도5) 

마니산 꼭대기에 사실적으로 그려진 참성단. (1872, 강화부전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마니산 꼭대기에 사실적으로 그려진 참성단. (1872, 강화부전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강화도 산줄기의 맥은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와 송악산과 혈굴산(혈구산), 그리고 마니산까지 이어진다고 봤다. <강도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산세가 통진에서 출발하여 물밑으로 뻗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와서 망해돈이 되었고… 다시 험하고 높게 솟은 것이 송악산인데, 이 산 밑에 읍치가 있다. 산세가 낮아지면서 구불구불 뻗어 고부현의 혈굴산이 되었으며, 혈굴산에서부터 산세가 다시 돌아 나와 사방 들판을 지나 남쪽의 진산이 된 것은 마니산이다.’

 

풍수 이론에서, 산맥은 물을 건너지 못하며 지맥은 물이 가로지르면 끊어진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강화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육지의 맥이 바다 속으로 이어져 건너온다고 굳게 믿었다. 강화도만 그런 게 아니라 제주도, 진도 등지에서도 그랬다. 산줄기 맥의 연결성을 중시하는 한국 풍수의 특징이다. 산줄기를 혈맥과 같이 생각하는 심성의 발로이기도 하다. 내 몸과 산은 한 생명 줄기로 이어져 있음을 드러낸 신산불이(身山不二)의 문화전통이다.

<최원석 교수의 옛지도로 본 山의 역사>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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