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정중앙은 강원도 양구다. 한반도의 동서남북 네 극지점을 기준으로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이 강원도 양구 남면 도촌리 산48번지를 지나친다. 이곳에 국토 정중앙 천문대가 있다. 실측한 모형물을 만들어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반도 위도와 경도의 정중앙점이 양구인 반면 한반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기준으로 한 가운데 있는 산은 경북 김천의 황악산(黃岳山․1,111m)이다.
황악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택리지 등에는 직지사 현판에 ‘황악산’으로 표기돼 있으나 국토지리정보원이나 다른 지도에는 황학산(黃鶴山)으로 나와 있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이라고 불렀다는 설명까지 친절히 덧붙이고 있다.
직지사는 신라(新羅)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사찰이다. 가장 오래된 사찰은 구미 도리사이고, 그 다음 창건된 사찰이 직지사다. 417년(눌지왕 2년)과 418년 아도화상에 의해 각각 창건된 사찰로 전한다. 참고로 남한 최고의 사찰은 385년(백제 침류왕 2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된 영광 불갑사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최고의 사찰은 국내성과 평양에 중국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뒤 신라로 내려와 도리사와 직지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황악산이 정중앙이라는 근거는 동양사상의 ‘황(黃)’이란 이름에 있다. 황은 예로부터 동양의 오방색(五方色)인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중에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다. 따라서 황악산에 있는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을 쓴다. 지금도 그 현판이 그대로 붙어 있다. 실제로 직지사는 김천시내까지 12㎞, 김천에서 서울까지 230㎞, 부산까지 218㎞로 남한의 중앙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황악산이 왜 황학산으로 변했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다. 대충 추정컨대, 산세를 보면 전혀 악산(岳山)이 아니다. 지극힌 순한 육산(陸産)으로 악(岳)자가 붙을 이유가 없다. 굳이 ‘岳’자가 붙은 의미를 부여하자면, 북에서 내려오는 백두대간의 줄기가 속리산에서부터 1,000m 이상 되는 산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황악산에 이르러서야 1,111m에 이르는 산을 만나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우두령에서부터 황악산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면서 몇 개의 고개를 넘는다. 삼성산~여정봉으로 올랐다가 바람재(810m)로 잠시 내려간다. 바람재는 바람이 불 때는 사람이 날아갈 듯 분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은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찾는 곳이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올라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그들이다. 바람재는 백두대간 종주꾼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남으로 우두령에서 북으로 궤방령까지 긴 산길에서 유일하게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어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사이좋게 있는 형제봉(1,020m)으로 향한다. 황악산까지 계속 오르막이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황악산까지 가면 황악산이 정말 육산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정상에서 주변 조망도 좋다. 시원한 바람은 항상 불어 땀을 식혀준다.
황악산에서 동봉인 백운봉(770m)까지 고도를 300여m를 낮춘다.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인 운수봉(680m)까지도 완만하게 내려간다.
여시골산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여시골산은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가 ‘여시’다. 옛날에 이 골짜기에 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 듯하다. 실제로 이 골짜기에 여우동굴 같은 동굴이 몇 군데 있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을 잇는 977번 지방도로 위에 있는 고갯길인 괘방령에 이른다. 괘방령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었다. 또한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사람들이 ‘추풍낙엽’을 연상케 하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거는 괘방(掛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고개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지리적으로도 괘방령은 중요하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한 곳이다.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따라 계속된다. 다시 서서히 고도를 올리며 가성산(720m)에 다다른다. 가성(枷城)은 화령권의 작점이나 사기점처럼 소규모의 진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름의 유래는 동쪽의 가성마을에서 비롯됐다.
가성산 바로 앞에는 비슷한 높이의 장군봉(625m)이 보이지만 한바탕 내리막길로 내려갔다가 바로 올라야 하는 길이다. 장군봉은 무사의 장군이 아니라 장씨 성을 가진 장군(長君)이다. 장씨 성을 가진 총각들이 많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했다고 한다.
장군봉에서 서서히 고도를 높이면 눌의산(744.5m)이 기다리고 있다. ‘어눌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을 정도로 주변 조망이 뛰어나다. 옛날부터 요긴한 거점구실을 했다고 전한다.
눌의산에서 추풍령까지는 줄곧 내려간다. 추풍령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는 고개다. 우선 경부선 중의 최고고개이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룬다. 경부고속도로라는 국토의 대동맥이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유일한 고개이기도 하다. 또한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 즉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높이 221m의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곤 했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빨리 가을이 찾아와, 가을걷이가 풍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秋豊’이라 했다 하나, 지금은 대체로 가을바람을 뜻하는 ‘秋風’으로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금산군편에 실린 조위(曹偉․1454~1503)의 글에는 ‘(추풍령은)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적고 있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추풍령과 괘방령에 얽힌 얘기는 무수히 많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진다. 지금은 수많은 차량들이 오가는 백두대간을 가르는 유일한 고갯길이지만 언제나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갯길, 추풍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