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은 화기 띤 남성, 청계산은 유순한 여성적 형세… 마주보며 조화 이뤄

관악산과 청계산은 조선조 경성에 있어 한강 남쪽의 대표적인 두 산이었다. <경성도>와 <한성전도>를 보면 도성 아래 한강 남쪽으로 좌우의 두 산이 뚜렷하다. 두 산을 멀리 바라보고 유유히 한강을 떠가는 돛단배와 나룻배의 모습도 정겹다(지도1, 2).

관악산은 산세가 힘차게 뻗어있으며 화강암 산지로서 바위가 돌출해 있어 굳센 이미지를 준다. 예부터 관악산의 기운은 준걸 차며 남성적이고, 풍수적으로 화기(火氣)를 띠고 있는 산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관악산을 소금강(小金剛) 혹은 백호산(白虎山)이라고도 했다. <1872년 군현지도>에서도 관악산 이미지는 활달한 기세로 표현됐다(지도3). 상대적으로 관악산과 짝을 이루는 청계산은 산세가 유순하고 토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계산은 갓 중년에 들어선 어미처럼 푸르른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옥녀봉(玉女峰)이라는 청계산의 봉우리도 그 자태가 옥처럼 맑은 여인을 연상시키기에 붙은 이름이다. 청계산 봉우리 중에 응봉(鷹峰)이라고 있다. 우리말로 매봉이라고도 하는데, 매처럼 사납게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산을 뜻하는 뫼가 매(鷹)로 한역된 것이다. 매봉도 온화한 형세를 하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에 나타난 19세기 전반의 경성 모습.

<동국여도>에 나타난 19세기 전반의 경성 모습.

관악산과 청계산 지맥들의 산줄기 관계는 어떨까? <대동여지도>를 보면 한 눈으로 파악할 수 있다(지도4). 청계산으로부터 연원하는 관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는 우면산으로 뻗고, 서쪽으로는 금지산으로 뻗는다. 북쪽으로는 동작으로 가서 한강에 다다른다. 관악산의 맥은 청계산에서부터 오고, 청계산은 백운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광교산으로 이른다. 이른바 한남정맥이다.

관악산은 삼각산과 상대하는 풍수적 조산(朝山)이었다. 조선시대의 한양에서 관악산은 도성의 명당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공간요소로 중요했다. 그래서 한양 도성도에서도 관악산은 그려졌다. <광여도>를 보면, 삼각산으로 둘러친 서울(京)을 중심으로 남쪽에 목멱산(남산)과 관악산이 일직선의 수직축으로 표현되고 있다(지도5).

19세기 초 엔 목멱산(지금의 남산)과 관악산, 청계산의 모습이 뚜렷하고, 그 사이로 한강이 흐르고 있다.(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19세기 초 <한성전도>엔 목멱산(지금의 남산)과 관악산, 청계산의 모습이 뚜렷하고, 그 사이로 한강이 흐르고 있다.(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한편으로, 한양에서의 관악산은 화기(火氣)를 뿜고 있는 산이자 역세(逆勢)의 산으로서 경계 대상이기도 했다. <고려사>에서, “남에 관악이 있어서 뾰족뾰족한 모양으로 되었으니 화덕(火德)을 상징한 것”이라 했다. 산 능선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습을 일컬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화재는 가장 두려운 재해였다. 그래서 한양에서는 관악산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을 썼다. 수신(水神)인 해태를 광화문 앞에 뒀고, 숭례문 앞에는 못을 파서 화기의 침범을 차단했다. 심지어는 관악산 꼭대기에 우물을 파고 구리용을 넣거나, 아홉 개의 화재막이 부적(防火符)을 넣은 물단지를 묻어 화기를 진압했다. 야사(野史)지만, 관악산을 정남으로 대해서 궁궐을 지으면 기세가 궁성을 위압하여 나라가 평안치 않다고 하였으니, 한양에서 평가하는 관악산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그렇지만 과천에서의 관악산은 고을을 지키고 보호하는 소중한 진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과천현의 서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고 나와 있다. 조선시대의 군현 지도를 보면 모두 관악산을 랜드 마크로 그리고 있고 고을을 지키는 산으로서의 상징성이 잘 나타나 있다(지도6).

광여도엔 청계산과 관악산 산세와 마을 지형에 대해서 상세히 묘사돼 있다.

광여도엔 청계산과 관악산 산세와 마을 지형에 대해서 상세히 묘사돼 있다.

진산인 관악산과 그 지맥은 삶터에 한랭한 북서풍을 막아주고 사람들을 품어 안는다. 또한 청계산과 그 지맥은 삶터의 훈풍을 흩어지지 않게 간수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 사이 산자락에 자연 마을들은 아늑하게 자리 잡았다. 약간의 지형적 문제점도 있다. 관악산에서 우면산으로 이어지는 고개가 잘록하여 남태령로를 통해 찬바람이 불어들며, 이 바람은 양재로 이어진 과천대로의 바람과 합쳐져 주거지로 닥친다. 선조들은 이러한 풍수적 결점을 방풍림을 조성하여 방비하는 지혜를 발휘했으니 수구수(水口藪)가 그것이었다. 숲으로 산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誌)>(1699)에 수구수가 소개돼 있다. “현 동쪽 1리에 있다. 길이가 30여 보이고 폭이 20여 보이다. 무술 년 간에 현감 심추(沈樞, 1658〜1659 재위)가 과천 관아를 위해 물 빠지는 곳을 막고 처음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해동지도>(18세기)의 과천현 도엽에도 수구수(水口藪)라는 명칭의 비보숲이 뚜렷이 표기되어 있다(지도7). 당시까지도 비보숲은 과천 고을의 중요한 풍수적 경관요소로 현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72년 군현지도(과천)의 관악산. 회화적인 필치로 묘사됐다.

1872년 군현지도(과천)의 관악산. 회화적인 필치로 묘사됐다.

옛 글에, “사람의 품성은 산천의 풍기(風氣)와 서로 호흡하는 사이에 저절로 물들어져 닮고 풍속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역 주민들도 관악산과 청계산을 서로 닮았을 것이다. 두 산 사이를 갈라 흐르고 있는 하천을 기준으로 동편은 청계산의 권역이고 반대편인 서편은 관악산의 영향권이다. 두 산의 어울림이 묘하다. 관악산은 그 기상이 남성적으로 강직하고 외향적이며 자못 거세다고도 할 수 있는데, 마주한 청계산은 여성적으로 넉넉하고 진중하며 부드러운 기상으로 상대하고 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생명의 기운이 그 사이로 감도는 형국이다. 그 가운데의 삶터는 굳센 관악산과 온유한 청계산의 부부 사이에 감싸 안긴 자식이다.

두 산이 품은 삶터로서의 명당은 어디일까? 명당지를 알아 낼 수 있는 역사적인 접근법이 있다. 오래된 옛 취락지는 대체로 최적입지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좋은 터이고, 특히 고을의 경우에 관아 자리(치소)는 고을의 가장 좋은 명당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관악산의 삶터 중심지는 과천현의 관아터로 현 온온사(穩穩舍) 자리다. <1872년 군현지도>에서 관악산 아래 행궁(行宮)으로 표기된 그 곳이다(지도3). 일설에 이 터를 잡은 사람은 무학대사의 수제자인 나동일(羅東一)이라고도 한다. 

1872년 군현지도(과천)엔 관악산과 청계산, 대모산 등 지금 서울 남쪽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1872년 군현지도(과천)엔 관악산과 청계산, 대모산 등 지금 서울 남쪽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온온사는 과천 관아의 객사 건물이다. 객사는 동헌과 함께 관아의 가장 중심적 위상을 가지는 궁실 건축물이다. <과천현신수읍지>에 의하면, 온온사가 처음 축조된 시기는 인조 27년(1649)이었고, 온온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정조 연간이었다. 이곳의 입지를 어떠할까? 관악산의 주맥 아래, 앞으로는 달덩이같이 둥근 응봉(鷹峰)을 품고 준수한 국사봉(國師峰)을 마주하고 있다. 국사봉 오른편으로는 시원한 산줄기가 안양으로 뻗쳐있고, 왼편으로는 청계산 상봉이 준엄한 형세를 드러내며, 연이은 옥녀봉(玉女峰)이 맏며느리 같은 안정되고 돈독한 자태를 한다. 온온사 왼편으로는 수령 600여년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생명의 기운을 발한다. 이 나무도 그저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라보이는 왼편의 낮고 꺼져있는 지세에 대한 비보적인 역할을 겸하고 있다.

 

이제 관악산의 요처 두 곳을 소개하고 그 장소성을 읽어 볼까 한다. 그 첫째가 연주대이다. 연주대는 자연 암대(巖臺)다. ‘대’라는 용어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장소를 일컫는다. 연주대는 관악산 기맥의 정수리에 해당한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인체의 머리 숨골에 있는 것으로서 생명력이 모인 백회혈(百會穴)과도 같은 것이다. 관악산의 정기가 응집되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곳, 이곳에서 기도객들은 자신의 염원이 일파만파로 메아리치기를 바랐을 것이다. 연주대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미는 단연 암석미다. 뭇 암맥(岩脈)이 천공을 향해 솟구치는 기세와 함께 연주대를 중심으로 모이는 형세는 가히 일품이다. 그 형국은 극락을 상징하는 거대한 연꽃송이가 피어오른 것에 비길 만하다. 그 속에 오롯이 깃든 자의 마음은 이미 극락정토에 있는 것이다. 연주대 아래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연주암이 자리 잡고 있다.

광여도(경기도)의 삼각산과 관악산, 그리고 청계산이 나타나 있다.

광여도(경기도)의 삼각산과 관악산, 그리고 청계산이 나타나 있다.

또 다른 요처는 삼막사 남녀근석이다. 여기는 민속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장소이다.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지맥인 삼성산 삼막사에 있다. 남녀근석은 삼막사의 산모퉁이를 살짝 돌아 칠보전(옛 칠성전) 자리에 있다. 자연 암석으로 남근과 여근이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곳은 관악의 국부(局部)에 해당하는 위치이자 음양의 조화를 맺은 자리라 읽을 수 있겠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 생명에너지가 발생하며 사람에게 공명되니 그 이치를 기감응(氣感應)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4월 초파일이나 칠월칠석날에는 출산과 건강, 번성을 치성 드렸던 현장이다.

이렇듯 연주대를 관악의 정수리로, 남녀근석을 관악의 성소(性所)로 비유하여 그 장소성을 읽었지만, 이러한 방식의 산천 독법(讀法)은 산을 인체와 비겨서 본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산의 바위는 뼈, 흙은 살, 물은 피, 바람은 숨, 초목은 털과 같다는 방식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말한, 산등성이는 땅의 힘줄과 뼈이고, 하천은 땅의 혈맥이라고 한 직관적 통찰은 깊이 음미할 표현이다.

해동지도(과천현)의 관악산엔 화기를 막기 위한 수구수까지 그려놓고 있다.

해동지도(과천현)의 관악산엔 화기를 막기 위한 수구수까지 그려놓고 있다.

연주대와 남녀근석의 장소성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성격도 대비할 만하다. 연주대는 의상, 남녀근석은 원효다. 흥미롭게도, 의상이 터잡고 머물렀다는 장소는 대체로 시계(視界)가 넓게 열리고 지대가 높아 탁월한 전망을 갖추고 있다. 이는 그의 화엄적 지리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상대적으로  원효의 장소는 어미 품속처럼 산자락 아래의 아늑한 곳이나 굴과 같은 토속적인 장소가 많다. 이는 불교의 토착화와 대중화에 힘쓴 원효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보자면, 의상은 대(의상대)가 많고, 원효는 굴(원효굴)이 많다. 두 사람의 성품과 배경이 고유한 장소정체성을 낳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두 산은 인근 주민들에게 있어 생명의 탯줄이요 태반이다. 지친 삶을 충전할 수 있는 휴양지이며,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관악산은 빼어나고 청계산은 장중한 산천미학을 지닌다.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푸르른 정기와 강직한 기상을 뿜고 있으니, 두 산으로 말미암은 혜택은 고스란히 산을 보고 찾는 사람들의 몫이다. 천복(天福)을 입은 사람들이다.

 <최원석 교수의 옛지도로 본 山의 역사>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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