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지명이야기 열 번째… 대간, 동서로 잇는 유일한 고갯길인 추풍령의 뜻은?

추풍령(秋風嶺)은 언제나 구름이 모여들어 쉬어가고, 바람이 술렁대며 자고 가는 고개였다. 추풍령은 말 그대로 가을바람이 부는 고갯마루란 뜻이다. 한여름인데도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가을날씨 처럼 선선한 바람이 분다. 추풍령 일대의 지역 벌판이 드넓어 가을이면 풍요롭다는 의미에서 ‘추풍(秋豊)’이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추풍령은 가을과 관련된 지명이다. 임진왜란 땐 의병장 장지현이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왜군에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속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굽이진 백두대간 주능선이 마치 바다의 파도를 연상시키듯 온 천지를 덮고 있다.

속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굽이진 백두대간 주능선이 마치 바다의 파도를 연상시키듯 온 천지를 덮고 있다.

추풍령은 조선시대에는 역(驛)과 원(院)으로 이어지던 관로(官路)였으며, 일제시대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쉬어가는 곳이었다. 숨 가쁘게 고갯길을 넘던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갈 수 없었으리라.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다. 당시 유곽의 규모는 매우 컸다고 한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 떨어져 있는 신안리에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믿는다. 조선시대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으뜸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됐다. 한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엔 한 번쯤 쉬지 않았을 한국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불과 200m의 고개가 국토의 대동맥을 잇고 백두대간을 동서로 잇는 유일한 고개이기 때문이다.

굽이치는 백두대간 능선은 언제봐도 정겹다.

굽이치는 백두대간 능선은 언제봐도 정겹다.

추풍령에서 잠시 쉬는 듯하던 백두대간은 다시 북으로 속리산을 향해 고개를 서서히 치켜든다. 매봉재(498m)로 살짝 올라선 대간길은 사기점(390m)으로 내려앉는다. 사기점고개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 있던 데서 유래했다.

대간은 용문산(710m)에서 고개를 서서히 들기 시작한다. 용문산은 1800년 무렵 박생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 ‘龍門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1940년쯤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애향숙이란 기도원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운동을 전개했다 한다. 서울과 부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성산(聖山)’으로 파악한 듯싶다.

갈령삼거리에서 한 등산객이 방향과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갈령삼거리에서 한 등산객이 방향과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국수봉(763m)은 충북 영동, 경북 상주의 경계를 이루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봉우리다. 국수봉에 올라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 등 주변의 산들을 조망할 수 있다. 날씨가 좋으면 소백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山), 또는 곰산으로 불린다. 정상에는 웅신당(일면 용문당)이라는 대(臺)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해서 웅이산이라고도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다시 큰재(320m)로 내리막이다.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폐교와 민가 한 채가 마주보고 있다.

형제봉은 우뚝 솟은 암벽 봉우리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 마치 형제 같아 이름 붙어졌다.

형제봉은 우뚝 솟은 암벽 봉우리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 마치 형제 같아 이름 붙어졌다.

이제부터 서서히 속리산권역으로 들어선다. 첫 고갯길이 회룡재(340m)다. 마을 뒤의 회룡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마치 용이 뒤돌아보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큰 봉우리는 없고 고갯길만 계속 이어진다. 개터재(380m)가 나온다. 개터재는 산세가 마치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과 식량을 제공하는 날짐승들이 많아 개터재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전한다. 웟왕실재도 바로 위에 있다. 산세가 왕이 기거하는 왕궁과 같다 하여 왕재라 했으나, 민초들이 함부로 왕을 입에 올리지 못하던 시절이라 뒤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라 했다 한다. 산 주위에 백학(白鶴)이 날아와 앉는 모습이 마치 설산처럼 하얗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백학산(615m)을 지나 개의 머리를 닮은 개머리재,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 해서 적기(賊起)재에서 지기로 변한 지기재 등을 지난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 등산객이 법주사를 향해서 합장을 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 등산객이 법주사를 향해서 합장을 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신의터재도 있다. 신의터재는 ‘지방의 관리나 귀양 중인 옛 벼슬아치들이 나랏님으로부터 승진 또는 복직 등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던 고개’였다는 사연이 전한다. 어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어산재라고도 한다.

이어 나오는 무지개산(473m)은 정상 남쪽 골짜기의 무지개폭포에서 유래했다. 야트막하면서 아담한 분위기를 주며 무지개만큼 친근감을 주는 산이다. 대간 종주 중에 드물게 보이는 논농사지역인 윤지미산을 지나 화령재(320m)에 이른다.

화령(火嶺)은 고려 때 이 일대를 관할하던 화령현의 지명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상주 서쪽은 화령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고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령은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조령, 남으로 추풍령과 연하여 있다. 북쪽은 봉황산을 거쳐 속리산 문장대로, 남쪽은 국수봉으로 이어지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화령재는 ‘火嶺’으로 표기하지만 옛 지명은 ‘化寧’이다. ‘火嶺’이란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서로 차지하려고 전투를 많이 한 국경지역이고 군사요충지였으며, 6․25 때에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불 ‘火’자를 붙였다고 전한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오일장으로 유명하다.

화령재를 지나면 봉황산(704.8m)이 기다리고 있다. 봉황산은 말 그대로 1,300년 전 봉황이 30여 년 간 살았다는 유래가 전한다.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도 있어, 마을에서는 태봉산(胎封山)이라고도 한다.

봉황산은 비재(427m)로 내려간다.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하여 비조개 또는 비조령이라 불렀으나 근래에 와서 비재로 굳어졌다.

비재에서 갈령삼거리 가는 길에 백두대간 상에 유일한 습지인 못제가 있다. 약 300~500평 정도의 크기에 10평 정도에 물이 고이지만 빗물에 의해 못이 생기기 때문에 실제 물을 볼 기회는 별로 없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못제가 백두산 천지와 비슷하다고 해서 천지라고도 부른다.

갈령고개로 내려서면 갈령고개를 가리키는 비석이 있다.

갈령고개로 내려서면 갈령고개를 가리키는 비석이 있다.

대간은 ‘칡고개’란 뜻의 갈령삼거리에서 형제봉으로 향한다. 갈령삼거리에서 잠시 쉬어가는 쉼터가 조성돼 있다. 갈령터널이 새로 생겨 바로 아래 있는 옛 도로는 그냥 방치돼 있다. 형제봉은 서쪽 골짜기 속의 십승지 중의 하나인 만수동을 감싸고 있다. 공주의 유구와 마곡, 부안의 변산, 안동의 춘양, 성주의 만수동 등이 십승지에 속한다.

이어 속리산 천왕봉과 남서쪽 형제봉 사이에 있는 피앗재로 연결된다. 피앗재는 원래 ‘피화(避禍․재난을 피하다)재’로서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심산유곡인 만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이다.

피앗재에서 속리산 천왕봉까지 별 특징 없는 참나무숲길로 곧장 가다가 천왕봉이 다가올수록 서서히 고도가 높아진다. 제법 길도 험해진다. 속리산 악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구간이 점점 다가온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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