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산천은 예로부터 풍수의 주요 대상이었다. 양택과 음택, 즉 현재 사는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명당터를 선택하는 기준인 양택과 죽은 사람의 좋은 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음택이 풍수의 핵심이었다. 왕의 묘지를 정하는 명당터를 보는 지관은 왕의 술사로도 신임을 얻어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풍수의 대상인 산천은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로 구분한다. 대개 일반인들에게는 양기가 에너지가 넘치는 명당터로 인식돼 왔다. 반면 무속인들은 주로 음기가 넘치는 지역에서 신내림이나 무속활동을 한다. 남한 땅에 여러 음기가 넘치는 지역이 있지만 희양산 은티마을도 전형적인 음지역으로 꼽힌다.
은티마을은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그 지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도 표현한다. 음기가 넘치는 지역은 일반인들이 살기에 좋은 땅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비보풍수에서는 음기가 넘치는 곳에는 반드시 양기를 상징하는 물건이나 지형으로 균형을 맞췄다. 은티마을에도 음기를 죽이기 위해 마을 초입에 남근석을 세웠다.
여근곡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타난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은 세 가지의 일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첫째, 당 태종이 붉은 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모란의 씨 석 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지만 향기는 전혀 없었다.
둘째,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 군사를 찾아낸 일이다. 겨울인데도 영묘사 옥문지에서 많은 개구리들이 3~4일 동안 울어댔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정예병 2천여 명을 급히 여근곡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그곳에는 경주를 급습하기 위해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었다. 왕의 병사들은 백제군사들을 전멸시켰다.
당시 신하들은 왕에게 물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일을 어떻게 미리 아셨습니까?”
“꽃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소,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는 것이오. 개구리가 화가 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玉門)은 여자의 음부요.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이요.”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의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 지내라”고 말했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어디인지 물으니 왕은 “낭산(狼山) 남쪽이다”고 답했다. 그 달 그 날이 되자, 왕은 정말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년 후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스러움을 알게 됐다.
‘남근입어여근즉필사의’, 참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 은티고개를 지나면 바로 주치봉이다. 구슬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해서 명명됐다. 은티마을의 뒷산이라고 해서 은치봉이라고도 한다.
잠시 내려왔다 다시 오봉정고개를 넘어 구왕봉(877m)으로 향한다. 희양산이 바로 다음 봉우리로 우뚝 솟아 있다. 구왕봉은 희양산(999m)에 가려 비교적 덜 알려진 산이지만 아기자기하면서 암벽도 있는 가볼만한 산이다. 구왕봉을 넘으면 지름티재가 나온다. 지름티재의 가을단풍도 만만찮다. 풍부한 햇빛과 습도로 다른 지역보다 색깔이 곱고 다양한 걸로 유명하다. 지름티재는 은티마을에서 선종구산의 종문 중의 하나인 봉암사로 갈 때 질러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희양산(曦陽山)이다. 이름으로만 보면 양기가 넘쳐 흐르는 산이다. 햇빛 ‘희’에 빛 ‘양’자다. 정말 양기가 넘친다.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산으로 암봉들이 마치 열두판 꽃잎처럼 펼쳐져 있다. 옛날 사람들은 희양산을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봉암사를 창건한 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 지중대사가 전국 명산을 둘러본 뒤 희양산 한 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펴보니,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지세를 평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어 ‘봉암용곡’이라 했다.
희양산에서 내려오면 희양산성 흔적이 보인다. 약 130m가 되는 이 산성은 신라와 후백제가 국경을 나투던 접전지로 929년 경순왕 3년에 쌓은 성터로 전해진다.
이어 로프로 암릉을 타고 올라가 시루봉으로 연결된다. 시루봉은 어디에서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멀리서도 떡시루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처럼 정상부의 바위지대가 금방 눈에 띈다. 시루봉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이 있던 곳으로 문경현지 등 옛 문헌에는 불일산(佛日山)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두 능선은 이만봉(二萬峰)과 곰틀재, 사다리재를 지난다. 이만봉은 옛날 임진왜란 때 이곳 산골짜기로 2만여 가구가 피난 들어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옛날 만호라는 벼슬을 한 이씨가 이곳에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곰틀재는 꿈틀꿈틀이라 꿈틀이 곰틀이 됐다는 설과 엣날에 곰을 잡던 틀을 놓던 봉우리라 곰틀봉으로 불렸다는 설이 전한다. 사다리재는 오르내리는 경사가 급하여 마치 사다리를 타는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
‘평평한 산밭’이라는 의미의 평전치를 지나 백화산(1,064m)에 이른다. 백화산은 흔히 봉황이 나는 형국에 비교하곤 한다. 정상부는 암릉으로 되어 있어, 부리 구실을 하고, 정상은 새가 하늘을 날며 땅을 굽어보듯이 천지간에 산과 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의 명당이다.
동쪽으로 이어지던 능선은 백화산을 기점으로 다시 북으로 향한다. 잠시 내려가는 듯하다가 다시 오르막이다. 억새밭을 지나 황학산(915.1)에 오른다. 백화산보다 약간 낮지만 조망이 뛰어난 산이다. 새재길이 통과하는 상초리계곡과 주흘산, 부봉, 마폐봉, 조령산, 멀리 월악영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조령천을 따라 조성된 농경지와 문경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황두루미’가 둥지를 튼 산이 바로 황학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