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과 형수님, 누님 그리고 우리 부부가 점심을 같이했다.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돼서 연고도 없는 지라 더는 고향 이야기는 궁금할 것도 없다.
늙으면 흘러간 이야기나 하게 되고, 죽으면 어디에 묻힐 것이냐도 거리낌 없이 말해도 된다.
지금처럼 까발려진 세상에 천당이다 지옥이다 하는 실체를 믿는 사람도 없고,
죽어서도 자손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나 책임감도 없다.
구태여 큼지막한 산소를 만들 생각도 없고 더군다나 미국에서 한 평밖에 더 차지할 수나
있다더냐.
죽어서 묻힌다는 건 간단한 게 아니다.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묻힐 일도 아니다.
산소는 친구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분의 삶을 축하하고 상실을 애도하는
장소를 말한다. 장소는 분명 평화와 평온을 제공하는 곳이어야 하고 잃어버린 사람의 삶과
유산을 기리고 존중하는 장소여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산 사람들이 지녀야 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은
못 된다.
이야기 도중에 형수님이 말했다.
누가 소유하고 있던 공원묘지 납골당을 팔려고 하는데 살 생각 없느냐고 묻는다.
나이가 제일 많은 누님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지만, 누님은 화장해서 재를 산이나 바다에
뿌리면 된다고 했다.
살면서 생활과 환경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누님은 오래전에 미국 풀로리다에서 살 때 공동묘지에 산소자리를 사 두었었다.
늘그막에 캘리포니아로 와서 노후를 맞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죽게 생겼다.
풀로리다에 사 두었던 산소는 결국 다니던 교회에 기증하고 말았다.
내가 아는 캐나다 친구의 큰 누님도 캐나다에 가족 묘지를 사놓고 본인이 들어갈 자리를
일찌감치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한국에 나갔다가 감기 몸살 같은 증세가 있어서 이 건강 상태로 캐나다로 돌아가는
긴 비행기 여행을 할 수 있겠는가 해서 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즉석에서 입원시켰고 병원에서 한 달간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친구 누님이 돌아가신 다음 고향을 버리고 시신을 캐나다로 운반하는 것도 그렇고,
하는 수 없이 용인 공원묘지에 모셨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묘지 자리 마련해 놓고 죽은 사람 치고 자신이 마련해 놓은 자리로
들어가는 사람을 못 봤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하물며 죽은 다음에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놓는 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도 죽은 다음에 일처리는 산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지 죽는 사람이 여기가 좋다고
해서 산 사람도 좋은 것은 아니다.
납골당 사라는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날더러 작은 누님이 있는 공원묘지에 묻히란다. 자기는 장인 장모님 모신 공원묘지에
묻히겠단다.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인가 했다. 잠시였지만 어처구니없는 말처럼 들렸다.
작은 누님이 나를 끔찍이 사랑해 주었는데 이것이 아내에게는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질투심은 별대서 다 삐져나온다.
나는 아무 준비도 해 놓고 싶지 않다.
설혹 산소 자리를 싼 가격에 준다 해도, 그 자리가 명당자리라고 해도, 나는 원치 않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준비는 무슨 준비냐.
만일 내가 한국에서 죽는다면 누가 그 큰돈을 드려가면서 시신을 미국으로 운반해 오겠는가.
내가 살아 있을 때도 내 의견을 따르지 않는 자식들이 죽은 사람을 돈 처들여가면서 모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을 것이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몫이다.
산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리라.
내버려 두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이고….
비풍초
2019년 10월 12일 at 12:48 오전
그래도 저는 희망을 갖고 살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