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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대한민국, ‘홀로서기’를 할 준비는 되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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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대한민국, ‘홀로서기’를 할 준비는 되어 있나?

내 조국에 대한 염려가 소심(小心)한 나 만의 기우(杞憂)이기를 바랐으나 그게 점차 현실화가 되는 것 같다. 미국 정치인들도 한국 정치인들 못지 않게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인들 중에는 미국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 굴종하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 좌파들의 표를 얻기 위하여 미국이 주적(主敵)이라는 자들과 데모대의 맨 앞줄에 서있는 사진들이 신문을 장식 했었다. 광우병 파동이 그랬고, 천안함 폭침이나 세월호 침몰에는 미군 잠수함 탓이라 했었다.

이번 대선주자들의 간담회를 보니 초등학교 어린이회의 회장선거 수준이다. 비상선포를 하고, 미국을 말리고, 중국을 설득하고, 북한에는 핫 라인을 통하여 자제하라고 하겠단다.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해법이다.

대선 후보 중 어느 누구도 사즉생 생즉사(生卽死 死卽生)의 논리를 인용하며 과거 시도했던 모든 일들이 무위로 돌아 갔으니 핵을 머리에 이고 살지 않기 위해서는 단호한 대처를 해야 한다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도 일본이 망하는 바람에 거저 얻었고, 6.25 동란도 남의 나라 덕분에 나라를 건진 나라, 이제는 북한의 핵문제 역시 남의 나라 덕분에 해결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만일 한국에 전쟁이 난다면 ‘미국놈들’ 때문에 사상자가 생겼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오늘 미국의 대외정책 전문지인 Foreign Policy Magazine에 Doug Bandow기자가 ‘It’s Time for America to Cut South Korea Loose’ 라는 제하의 글을 올렸다. 점잖게 번역을 한다면 ‘미국은 이제 한국을 자유롭게 할 때가 되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시세말로는 ‘이젠 한국을 내버려 두라’는 말이다.

과거 냉전시대엔 소련 동맹국과의 세력균형문제가 제기 되었었지만 지금은 그 소련이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고 남북한의 전쟁은 비극적이며 시체 수는 엄청 나겠지만 미국의 개입이 없으면 전투는 한반도에 국한 되지만 미국이 개입하면 분쟁의 확산이 분명하다는 게 그의 논지이다. 그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도 스스로 국방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中略)

Taking on that responsibility also would force Seoul to treat Pyongyang more consistently. The “Sunshine Policy” begun under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jung resulted in the transfer of some $10 billion in cash and assistance to the North, even as the latter was developing missiles and nuclear weapons. That approach was viable only because Washington provided a military backstop (and if the new South Korean president, to be elected in May, revives the Sunshine Policy, as some have suggested, there’s no telling if the Trump administration would be so forgiving). The South needs to bear both the costs and benefits of whatever approach it takes.

이러한 책임을 감안할 때 서울은 북한을 더욱 일관되게 대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시작한 ‘햇볕 정책’은 북한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을지라도 현금과 지원금으로 약 100 억 달러를 북한으로 이전했다. 그 접근법은 워싱턴이 군대의 배후를 제공했기 때문에 실행 가능했다. (그리고 5 월에 선출 될 새 한국 대통령이 햇볕 정책을 되살린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용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남한은 어떤 접근 방식의 비용과 이점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위의 내용에서 가슴이 뜨끔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이 차 후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보다 지금 주는 게 이익이라는 주장으로 북한 원조에 열을 올렸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 때의 말이지 북에 의한 통일의 가능성은 교묘히 숨겨 놓았던 것이다.

지난 일들을 탓하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대선주자 중 지지도 1위인 문재인이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개성공단과 금강산 재개로 햇볕정책 계승을 분명히 했었다. 유엔 결의에 의하여 북한에 대한 제재의 동의를 얻어 낸 상황에서 다시 그 말을 주워 담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음은 이 기사의 결론이다.

The U.S. security presence in South Korea is an expensive and dangerous commitment that America can no longer afford. Nor has it ever brought the United States much popularity in the country, where U.S. soldiers are a constant irritant to nationalists. The South is no longer a poor nation in need of protection from the specter of global communism but one more than capable of standing on its own two feet.

한국의 미국 안보 상황은 미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값 비싸고 위험한 약속이다. 또한 미군 병사들이 민족 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있는 미국에서도 미국의 인기를 크게 끌어 올리지 못했다. 남한은 더 이상 세계 공산주의의 유령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가난한 국가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두 발로 서있을 능력이 있는 국가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분은 아래 원문을 참조 하시라.

https://www.yahoo.com/news/time-america-cut-south-korea-195407282.html

미국 독립기념관에 걸려 있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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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기념관에 걸려 있는 그림.

1776년 미국독립선언문에 영국의 식민지(colonies) 13 주 대표 56명이 서명하였다. 필라델피아의 마켓 & 6가에 있는 미국독립기념관(Independence hall)에 걸려 있는 그림에 테이블 앞에서 한 사람이 등을 보이며 뭔가를 쓰고 있다. 이 사람에 대한 사연은 이렇다.

이 그림은 미국독립2백 주년 기념으로 그들 전체를 그려 넣기 위한 작업으로 화가 Glanzman이1986년에 그린 것이다.

200여 년 전의 사람들이니 당연히 사진이나 초상화를 근거로 하여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들 중 딱 한 사람의 것은 그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려 넣은 것이었다. 역사물에 대한 화가의 양심이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도출해 낸 것이었다.

역사에 대한 기록은 이처럼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객관적이어야만 그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역사는 승자(勝者)가 기록하게 되는 속성이 있어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는 명분을 만들고 합리화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게 소위 말하는 역사왜곡이다.

일본은 자기들의 조상을 미화하면서 역사왜곡을 하지만 한국은 그 반대로 조상을 능멸하면서 그게 정의의 역사라고 한다. 특히 북한과 관계된 사안에 대해서는 병적으로 달려 든다. 야당의원들은 6.25전쟁에 관한 영화를 국뽕이라고 아예 관람을 거부할 정도이다.

김정일의 선군정치란 과거 청나라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꿇어 앉히고 땅에 머리를 찍게 했던 것처럼 남한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갈협박으로 남한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심산이었다.

불행히도 그게 거의 현실화가 되어가고 있는 조짐이 있다. 설훈 같은 자가 다시 등장하여 ‘그러면 전쟁하자는 말이냐?’ 하면서 통일비용보다 지금 돈을 주는 게 경제적이라는 논리로 바람잡이 노릇을 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아니 이미 어느 대학 총장이라는 자가 그런 책을 썼다고 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간 햇볕정책이라는 미명하(美名下)에 북에 대해서는 한국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었으나 결과는 아주 참담하게 되었다. 임동원이 기안(起案)한 햇볕정책은 애초에 북의 양해가 없었다면 그런 명칭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솝우화의 내용대로라면 북한이 나그네가 되는 입장인데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이라 부르는 나라에서는 그런 불경도 없을 것이다. 그간 국민들이 잘도 속아 준 셈이다.

이젠 그 한가지 미련이라도 지울 계기가 되었건만 야당대표의 연설문을 보니 그것도 아니다. 과거 김일성이 박헌영의 호언장담으로 6.25 남침을 했다고 한 것처럼 김정은도 같은 실수를 재현하는 게 아닌지 그게 걱정이 된다.

중국에 대한 미련도 버려라.

삼국지의 나라 듕국, 나관중의 삼국지의 근간은 이이제이(以夷制夷)와 미신(迷信)이다. 적으로서 적을 격파한다는 이이제이는 시세말로는 이간질이다. 당시에는 반간계(反間計)라 불렀다.

그것도 자주 써 먹다 보니 상대가 믿지를 안 해서 생겨 난 게 골육계(骨肉計)이다. 충신이 자청해서 심한 고문을 받은 다음 적에 투항하여 있다가 전쟁 중에 내응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혹자는 세상을 사는 지혜가 다 삼국지에 들어 있다고 하나 그건 나관중의 시대에나 있을 수 있다. 지금 그걸 모방하다가는 필연코 망할 수 밖에 없다. 삼국지에 매료된 자를 경계하라. 뒤 끝이 아주 고약하다.

현재의 중국은 아직 중공(中共)이다. 타이완이 국력이 쇠잔하여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국호를 빼앗긴 것이다. 그 결과 각국에 있던 중국 대사관저도 다 중공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국력이란 그런 것이다.

미국에 대한 미련도 버려라.

미국 정치인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의 출현으로 그간 정치인들이 사용하던 외교적인 수사(修辭) 대신 금칙어에 속하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열광을 받고 있다.

미국시민들은 상징적인 국제경찰의 위치에 대하여 현재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미국의 우방인 영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파트너쉽의 신뢰를 이미 잃었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 쓴 자서전에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간의 호주 회담 장면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그 선을 분명히 그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보제공이 상당부분 위축 되었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가 미국에게 유익이 있다는 사람은 현대전을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전은 청일전쟁 때처럼 말 타고 가서 싸우는 게 아니다.

“신(神)은 언제나 강한 군대 편이다”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현재 한국이 주술처럼 외워야 할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종북이든 친북이든 개인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런 논리로 선동하는 자들을 격리 시켜야만 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다.

사드는 현재 미군에서 실전배치를 한 최신의 방공시스템이다. 그걸 효율 운운하면서 반대하는 자들은 전쟁억제력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그게 아니라면 세작이라 단정한다.

국가가 건전 하려면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이 없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이나 적대감을 경계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그러한가?

내 생각으로는 아니다. 열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여의도와 평양은 일란성 쌍둥이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런 현실이 불안하고 또 화가 난다. 대한민국이여, 영원 하시라!  9/6/16

세월이 약이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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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약이라더니,

미국은 현충일(Memorial Day)에서 여름이 시작되고, 노동절(Labor Day)에서는 가을이 시작 된다. 금년에는 9월 5일이 노동절이다. 자기 생일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연휴가 되는 탓에 모두가 기억한다.

예로부터 시월 상달에는 시제(時祭)나 고사를 지냈으니 연중 최상의 달이라는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여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광릉의 소나무는 한국의 국보라고 말할 정도로 가을 하늘은 쪽빛 같았었다.

그럼에도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가을이 사색(思索)의 계절이라는 말에 동의(同意)하는 이는 가을을 타는 사람일 게다. 사람은 체험에서 얻은 정보를 근거로 사물을 인지하며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가을에 어떤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사람도 있고, 단풍처럼 아름답게 늙기를 소망하는 이들도 있다. 더 외롭고 쓸쓸해지는 사람도 있고, 원인 모를 비애감이나 뚜렷한 대상이 없는 그리움에 잠을 못 이루는 사람도 있다. 그런 걸 가을을 탄다고 한다.

사색(思索)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생각함’이라 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왜 외롭고 쓸쓸해 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면 노년에는 네 계절 모두 사색의 계절이 되는 셈이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까맣게 잊었던 초등학교 때 동무들까지 생각난다. 그럼에도 요즘은 전화기를 눌러 봐야 오늘이 몇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노년에는 좋아도 아주 좋은 게 없고, 싫어도 아주 싫은 것도 없다. 좋게 말하면 관조(觀照)의 미덕(美德)이 몸에 밴 것 같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늙어서 인생 종쳤다고 주저 앉지 말고 옛 추억을 recall하여 위로 받으라는 조물주의 배려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만일 망각의 삶이라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일 테니 그런 절망도 없을 것이다.

이젠 여름의 더위도 한풀 꺾이고 조석(朝夕)에는 제법 선선하다. 덧없는 세월을 말하면서도 이럴 땐 계절을 미리 가불하여 가을의 정취를 미리 느끼려고 한다. 세월은 이렇게 말없이 가고 있는데 거기에 ‘야속한 세월’ 이라고 푸념을 해 본들 늙어가는 것 외에는 달라지는 게 없다.

가끔 산 아래의 양계장에서 대낮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날에는 처량하게 들리고 또 어떤 날에는 정겹게 들린다. 내 기분에 따라 닭도 그렇게 울어 주니 그것도 묘하다. 미국에서는 닭도 영어로 운다. “cock-a-doodle-doo…”

봄이나 여름과 달리 가을로 들어 설 때는 설레임 같은 게 별로 없다. 붉은 단풍에 환호를 하면서도 쓸쓸한 기분이 드는 탓일 게다. 그러나 금년에는 여름이 혹독했던 연유에서인지 가을이 더 없이 반갑다.  이 가을을 일생 최고의 가을로 단장을 하고 싶은데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그게 문제이다. 9/2/16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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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

장모님이 시를 쓰고 사위가 곡을 붙인 노래, 우리 가곡 ‘그네’의 끝 소절이 위의 글 제목이다. 노래에 대한 사연도 멋지지만 가사와 멜로디가 이처럼 궁합이 잘 맞는 노래도 드물 것 같다.

서정적인 노래 대부분이 정적(靜的)이라면 이 노래는 동적(動的)인 감흥을 일으킨다.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듣노라면 내가 그네에 앉아서 swing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롯데 부회장의 자살기사를 보면서 ‘일만 근심을 실어 가는 바람’에 대한 생각을 해 봤다. 자살이 그 해법은 아닌 것 같다. 세상에서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생각으로는 zero일 것 같다. 근심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행복한 사람도 그걸 놓칠까 걱정을 하고, 권력자나 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아기가 엄마와 떨어지면 울어대는 걸 보면 아기에게도 걱정은 있는 셈이다. 풍요로운 노년을 보내는 노인일지라도 혹시 모르는 건강 걱정, 행여 자식들이 잘못될까 자식들 걱정..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거기에서 어떤 초월자(超越者)에게 기대어 보는 게 종교의 형태이다. 능력이 없는 부모일지라도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천애고아(天涯孤兒)보다는 낫다. 푸념이라도 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엔 수 많은 종교가 있다. 경전(經典)이 있는 종교도 있고, 토속신앙처럼 구전(口傳)에 의하여 의식을 집행하는 종교도 있다.

종교는 ‘논리(論理)나 이성(理性)’의 영역이 아니기에 각자의 ‘신념(信念)이나 감성(感性)’에 의해서 종교를 택하게 된다. 즉 각자에게 맞는 종교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택한 종교에 대하여 시비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게 소위 말하는 종교의 자유이다.

종교가 권력을 잡으면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유럽에서 로만 카톨릭이 지배했던 1,280년간을 교회사에서는 종교암흑시대라고 한다. 종교재판에 의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야 했고 종교를 빙자하여 침략도 서슴지 않았었다. 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이민을 온 청교도들도 주일을 범하면 체형을 가했었다.

그러나 의지처가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는 것이 인간이다.

세계 교회사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천주교가 선교사 없이 자생하였다. 내 자식의 자식들은 물론 그 아래 대대손손을 내려가도 종의 신분을 벗어 날 수 없었던 그들에게 천주(天主)의 아들이 된다니 그만한 복음도 없었다. 믿고 나 후로는 굶어도 견딜 만 했었고 고된 일이나 죽음까지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 헛 믿었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신앙생활이 현실을 초월하면 그건 수도승의 삶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타협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삶 속에서의 신앙이 되어야지 신앙 속의 삶이 되면 그 가족들이 우선 피해자가 된다.

신심(信心)은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더 깊다. 십자가 사건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다락방에 숨었지만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갔던 사람이 여자들이었다. 옛날 장독대에 정화수를 놓고 빌던 사람도 어머니들이었지 아버지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인이 너무 종교에 열중이면 그의 남편은 안티가 된다. 주일날에 온 종일을 교회에서 보내거나 교회행사로 몇 일씩 집을 비우게 되니 남편은 집에서 인터넷에 종교 비난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건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정문제인 셈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기복신앙(祈福信仰)이다. 기독교의 축복은 천상(天上) 축복이지 지상(地上) 축복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팔복산에서 하신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한 설교의 내용이 그렇다.

기복신앙은 일이 잘 풀리는 사람에겐 문제가 안 되겠지만 일이 안 풀리는 사람은 그 열성만큼 금방 지쳐서 신앙을 접게 된다. 목사님이 헌금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하거나 스님이 시주 이야기를 자주 한다면 그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찾는 게 현명하다. 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헌금이나 시주는 앞으로의 어떤 보응(報應)에 대한 조건부가 아니라 현재까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야 옳다.

기독교나 불교 모두 궁극적으로는 내세(來世)에 대한 약속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라고 했다.

병이 든 자는 아프지 않은 다음 생을 원하겠고, 굶주린 자는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다음 생을, 외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다음의 생을, 압제를 받는 자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다음 생을 원할 것이다. 그게 종교의 순 기능이다.

무신론(無神論)자라면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 하시라. 그것도 인생에서 종교보다 더 현실적으로 위안을 준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마음의 일만 근심을 실어 가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올 가을엔 하얀 뭉게구름에 근심걱정을 다 실어서 날려 보낼 수 있는 여러분과 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8/26/2016.

그네 / 김말봉 시, 금수현 곡.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고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노년에 살기 좋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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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살기 좋은 .

글 제목을 써 놓고 보니 좀 애매하다. 주택은 사람마다 형편과 처지와 취향이 다른데 단편적으로 단정을 내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것도 세상을 살아 가는 한가지 요령이다. 일례로 잘 팔리는 물건은 가격대 성능이 소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 물건은 당연히 하자가 적다.

미국 노인들은 은퇴 후에 대부분 Ranch House를 택한다. 우선은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단층을 선택하는 것이고, 또 행여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는 휠췌어가 용이하게 출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이사하는 것도 공통적인 현상이다.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아파트로 들어 간다. 몇 달 동안 집을 비워도 단독 주택보다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집을 팔거나 세를 주고, 집세간은 창고에 맡기고 모터 홈(Motor home)으로 전국 일주를 하면서 차 안에서 사는 경우도 있다.

역마살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재미있게 산다. 여행 중에 강이나 바다에서 생선을 잡아서 즉석 요리를 한다든지, 산에서는 덫으로 짐승을 잡아서 바비큐를 하는 장면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내가 에너지 하우스를 연구 하면서 제일 많이 참고하는 것이 full time으로 모터 홈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이다. 겨울과 여름을 그들은 어떻게 보내는지, 물과 전기는 어떻게 충당을 하는지, 운행 경비는 어느 정도인지 등등 참고할만한 내용들이 많다.

일례로 어떤 이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설거지를 하는데 씻어야 할 접시에 식초를 스프레이 한 다음 페이퍼 타월로 닦아서 설거지를 끝낸다. 물 1갤론으로 샤워를 끝내는 요령이나 세탁하는 방법 등등 물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과제를 화두로 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한다.

여행 중의 에피소드나 생활요령들이 끊임없이 유투브(YOU TUBE)에 올라 오는 이유는 조회수가 올라가는 만큼 수입이 생기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그 수입이 일반 직장보다 훨씬 많다. 미국은 나라가 크다 보니 여름엔 북쪽에서, 겨울엔 남쪽에서 살면서 나름대로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來世)가 분명할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까지는 내 의지로 잘 계획하고 즐겁게 보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령 아련한 꿈일지라도 그걸 마지막 날까지 놓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게 일용할 삶의 ‘만나’이기에 그렇다. 8/24/16

달 밝은 고요한 밤에는 무엇을 생각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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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고요한 밤에는 무엇을 생각 하시나요?

잠 자리에 들려고 침실에 들어가 불을 끄니 휘영청 밝은 달빛이 나를 밖으로 불러 낸다.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전기 불빛과는 함께하지 않는 그 달빛의 도도함을 멋지게 표현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아쉽다.

그간 흐린 날씨 탓에 오랜만에 보는 달빛이다. 오늘이 보름인 것 같다. 황진이가 그리던 소세양에게 보냈다는 시‘달 밝은 고요한 밤에는 무엇을 생각 하시나요? (蕭寥月夜 思何事)’가 생각난다.

달빛은 사람의 마음을 멜랑꼬리하게 만드는 묘한 것이 있다. 심월상조(心月相照)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 난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남녀가 달을 보면서 서로의 마음을 비춘다는 것이니 그 보다 더 멋진 시어(詩語)도 없을 것 같다.

대 문호(大文豪) 쉐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서도 늘 등장했던 게 사랑과 권력과 죽음이었고, 그의 4대 희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슬픔이나 즐거움에도 그 셋은 여전히 개입되었던 셈이다.

권력은 원래 뻔뻔해야 그걸 잡을 수 있으니 나처럼 뱃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고, 죽음 역시 재천명(在天命)이라 했으니 각자의 life span이 다하는 날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다.

그 셋 중에서 남은 건 사랑이다. 신문에서 은퇴한 60대 부부가 60일간 차로 전국을 일주한 기사를 읽었다. 도전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고 부부 둘 다 자기 취향에 맞는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고 한다.

그럴 듯한 외국이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 간 그곳을 여행하면서 자신을 다시 찾아 보았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었다.

노년에는 여생(餘生)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남은 인생, 사실 그게 지나간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걸 더 멋지게 설계하고 실천하기란 말처럼 단순한 건 아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효도계약이라는 것을 읽으며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평범한 일이 아니니 기사가 되었겠지만 거기엔 변호사들의 선동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를 했었다면 내 자식들 역시 효자가 되겠고, 아니면 그 반대가 되니 그게 내 DNA가 그런 것이다. 때문에 자식들의 효/불효에 대해서는 누구를 탓할 바가 아니다.

부모란 게 뭔가? 우선은 자식들보다 인생의 경륜이 더 많다는 사실적인 게 있다. 다행히 재력이 있다면 자식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밀어 주어서 빨리 일어 날 수만 있다면 밀어 줘야 한다. 거기에 무슨 계약서가 필요한가?

시은(施恩)이어든 물구보(勿求報)하고 여인(與人)이어든 물추회(勿追悔)하라
은혜를 베풀었거든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거든 후회하지 말라.
명심보감에 있는 말이다. 남에게도 그럴진대 하물며 자식에게야..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달 빛이 깨우쳐 주니 이래서 철이 드는 게 아닌지 그 섭리를 다시 한번 가슴에 간직한다. 8/17/16


세개의 보름달.

애국가와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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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와 눈물.

올림픽 양궁 금메달 수상자인 장혜진 선수가 시상대에서 애국가가 나오자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읽었다. 장 선수는 애국가를 들으며 연습 때 고생했던 생각이 났었다고 했다.

국가(國歌)에는 뭔가 표현을 할 수 없는 감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하여 땀을 흘린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참가한 북한 축구대표팀 정대세 선수가 브라질과 북한의 경기 직전 필드에서 북한 국가가 나오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미국 TV에서 클로즈업하여 여러 번 나왔었다. 왜 울었는지에 대하여는 본인도 설명을 못했고 중계 해설자도 코멘트를 못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운동을 하던 김연아 선수, 이건희 회장 역시 평창으로 결정되자 눈물을 흘렸다.

해외 여행 중에 삼성이나 LG, 현대의 광고판을 보면 가슴 뿌듯하다고 한다.

국가(國家)란 그런 것이다. 거기에 부연하여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없다. 그러나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가 무슬림 전사자의 부모를 모욕한 것이 문제되어 지지율이 폭락했다. 미국은 물론 북한에도 있는 전쟁영웅이 유독 한국에만 없다. 혹독한 전쟁을 치른 나라에서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인정을 안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백선엽장군을 민족의 반역자라고 한 국회의원도 있고, 흥남 철수의 주인공인 어느 장군의 동상을 공원에서 철거하겠다고 데모하던 자들도 있었다.

중국은 한국에서 설치하는 레이더 하나에도 방방 뛰는데 한국 대통령이라는 노무현은 미국에 와서 북한의 핵개발은 자위적인 조치라고 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미국은 침략자라는 말이다. 자신이 군 통수권자인지도, 또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떤 위치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신’을 운운하는 자들이 정치권에서 행세를 하고 있다.

아래는 한겨레 신문이 아니라 조선일보 변희원 기자의 영화‘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평이다.

이념과 임무에만 충실한 캐릭터로 그려지다 보니 인물은 평면적이고, ‘국군은 선, 북한군은 악’이란 흑백논리가 적용된다. 특히 북한군은 90년대 이전까지 국민학생들이 배운 대로 ‘뿔 달린 괴물’처럼 극단적으로 묘사된다. ‘JSA 공동경비구역’ ‘웰컴투 동막골’ ‘고지전’처럼 국군과 북한군의 관계를 선악(善惡)으로만 그려내지 않은 영화들이 이미 수년 전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이는 퇴보에 가깝다.

변 기자는 전쟁을 피크닉 정도로 아는 것 같다. 위에 언급한 영화들은 한국 좌파들의 작품이다. 아니면 군대를 가보지 않은 자들의 이상론일 뿐이다. 군인은 Born to kill enemy가 그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미국에 수 많은 전쟁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미군은 항상 선이었고 독일군은 항상 악이었다. 거기에 변기자나 어느 영화 평론가처럼 흑백논리 운운하는 영화평은 없었다.

적국에 대하여 흑백논리(黑白論理) 혹은 이분법(二分法)이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들의 조국은 어디이며 그 조국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나 있는지?’ 8/13/16.

호랑이 장가 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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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장가 드는 .

내가 어릴 적엔 햇살이 내리면서 비가 오면 ‘여우 시집가고 호랑이 장가 드는 날’이라 했었다. 왜 여우가 호랑이한테 시집을 간다고 했는지의 사연은 잊었지만 어제 산책 중에 그 비를 만났었다.

양반들은 소나기를 만나도 달음질을 안 했다고 한다. 경박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가 아니라 뛰어 본들 상황이 별로 달라질 것 같지가 않기에 안경 벗어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걸었다.

‘비 맞은 중’ 이야기도 생각하면서 지름 길을 놔 두고 그냥 한 바퀴를 다 돌고 집에 들어 왔다. 더운 날 비를 맞으면 시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젖은 옷은 다리에 감기고 햇볕은 여전하니 습도가 올라 갈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일기예보가 안 맞는다고 차라리 옛날 속담이 더 정확하다는 기사도 있었다. 미국 일기예보는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나 눈이 올 확률 60%, 40% 식으로 예보를 하니 비가 오거나, 안 오거나 둘 다 맞는다.

요즘은 위성에서 바닷물의 수온까지 측정을 하지만 내가 공군에 있었던 70년대까지만 해도 각 지역의 기상상태를 단파로 송신을 하면 그걸 취합하여 기압등선을 그려서 기상도를 작성하였었다.

국제협약에 의하여 공표된 주파수를 찾아서 북한은 물론 중공, 소련 등등의 자료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음성통신이 아니라 모르스 코드에 의한 CW라서 기상통신소에는 늘 삑삑대는 소리뿐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장비가 좋아서 거의 족집게 수준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으니 불평은 여전하다.

어떤 날은 폭우가 쏟아 지는 곳에서 불과 몇 마일을 지나서는 도로가 전혀 비에 젖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런 걸 틀렸다고 따지다 보면 세상엔 맞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좋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다’는 속담처럼 좋은 일엔 좋은 대로, 궂은 일은 좋게 치환하여 살아 가는 것도 삶의 지혜가 될 수 있다.

바람아 부지 마라 비올 바람 부지 마라
가뜩이 차변된 님 길 질다고 아니올세
저님이 내 집 온후 구년수(九年水)를 지소서.

기녀문학에 나오는 시조이다. 그렇지 않아도 뜸해진 님이 비 핑계를 대고 안 올지도 모르니 (참았다가) 그 님이 온 다음에 중국 고사에 나오는 9년 홍수처럼 비가 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비가 올 바람은 그 옛날에도 알았었으니 국지적인 것은 늘 자신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젠 장가 간 호랑이가 결혼기념으로 이 더위나 가져 갔으면 좋겠다. ㅎㅎ  8/3/16

체감 온도(Heat 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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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 온도(Heat index).

미국 전역이 더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일기예보에서는 Heat dome이라고도 하고 heat blanket이라고도 한다. 사람의 심리가 묘해서 나만 더운 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덥다고 하니 견딜 만은 하다. 실제로 미 전역의 온도분포도를 보면 이곳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문제는 온도가 아니라 습도가 사람을 잡는다. 일기예보에서 그 날의 온도와 함께 Heat Index를 발표한다.

94℉ (34.44 ℃)일 때 습도가 85% 라면 135℉ (57.22 ℃)와 같다는 것이다. 도표의 붉은 색 부분은 대단히 위험한 조건을 말한다. 밖에 나갈 생각은 아예 접고 집에서 독서삼매에 들어 가는 것도 피서의 한 요령이 될 것이다.

위의 표는 화씨라서 한국에서는 익숙하지가 않겠지만 필요한 분은 인터넷 도량환산 사이트를 이용하여 참고하면 될 듯 하다.

속담에 ‘여름 손님은 범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있다. 손님이 오면 옷을 마음대로 벗을 수도 없고 주부는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피서지 근교에 사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안튼 손님치레에 홍역을 치를 것이다.

그럴 게 아니라 인터넷으로 근처에 숙소를 잡아 놓고 친구를 불러 내어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멋진 일일 듯 하다. 그런 때는‘서울 가서 출세한 놈이 한턱 쏘겠다’고 큰소리를 쳐도 오해할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이 산중에서 타잔 차림으로 지내다 보니 발등만 하얗고 온통 까맣게 되었다. 발은 스니커를 신고 돌아 다닌 탓이다.

옛날 우물에 담가 두었다가 먹던 수박이나 참외처럼 시원하고 달은 것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 입맛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은 그게 먹고 싶다. 7/25/16

예의범절 vs. 매너와 에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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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범절(禮儀凡節) vs. 매너(Manners) 와 에티켓(Etiquette).

상류사회와 평민들을 극명하게 대조 시킨 게 영화 타이태닉이다. 우선 놀이 문화부터가 다르다. 신나게 춤을 추며 노는 3등 선실, 점잖게 카드 놀이를 하는 1등 선실의 대비가 그 중 하나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속한 그룹에서 즐기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터넷에 우리 고유의 예의범절이 고리타분하다는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공자왈 맹자왈 한다는 것이다. 어떤 글에는 공자가 죽어야 한국이 발전한다는 주장도 있다.

근본이 없으니 우선 우리 것을 매도하려 드는 것이다. 우리의 풍습이 중국에서 온 줄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하나 입춘방(立春榜)을 써서 붙이는 것 외에는 중국의 풍습과 일치되는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에티켓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흔히 말하는 매너(Manners) 와 에티켓(Etiquette)은 같은 말이 아니다. 사전에서는 매너를 Way of behaving toward others. 라고 했다. 즉 타인에 대한 처신을 말한다. 거기에는 배려(concern)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매너가 좋다/나쁘다’라는 표현을 쓴다.

반면에 에티켓(Etiquette)은 Conventional requirements as to social behavior. 즉 사회적인 행동에서 통상적인 필요 조건이라 했다. 이 경우엔 ‘에티켓이 있다/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어느 민족이든 나름대로의 풍습이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옳지 않은 것도 있어서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는 자정의 기능에 의하여 다듬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 고유의 예의범절엔 매너와 에티켓이 함축되어 있다.

그럼에도 야당 대표라는 자가 그냥 자기 의견을 말하면 될 것을 ‘대통령의 치마폭’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비난하는 것을 보면 여자 대통령이라고 깔보는 저면이 내재되어 있다. 저질이다.

한국엔 공자가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자(놈 者)들처럼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들이 다 죽어야 제대로 된 국가가 될 수 있고 또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7/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