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 온도(Heat index).

heat index

체감 온도(Heat index).

미국 전역이 더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일기예보에서는 Heat dome이라고도 하고 heat blanket이라고도 한다. 사람의 심리가 묘해서 나만 더운 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덥다고 하니 견딜 만은 하다. 실제로 미 전역의 온도분포도를 보면 이곳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문제는 온도가 아니라 습도가 사람을 잡는다. 일기예보에서 그 날의 온도와 함께 Heat Index를 발표한다.

94℉ (34.44 ℃)일 때 습도가 85% 라면 135℉ (57.22 ℃)와 같다는 것이다. 도표의 붉은 색 부분은 대단히 위험한 조건을 말한다. 밖에 나갈 생각은 아예 접고 집에서 독서삼매에 들어 가는 것도 피서의 한 요령이 될 것이다.

위의 표는 화씨라서 한국에서는 익숙하지가 않겠지만 필요한 분은 인터넷 도량환산 사이트를 이용하여 참고하면 될 듯 하다.

속담에 ‘여름 손님은 범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있다. 손님이 오면 옷을 마음대로 벗을 수도 없고 주부는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피서지 근교에 사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안튼 손님치레에 홍역을 치를 것이다.

그럴 게 아니라 인터넷으로 근처에 숙소를 잡아 놓고 친구를 불러 내어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멋진 일일 듯 하다. 그런 때는‘서울 가서 출세한 놈이 한턱 쏘겠다’고 큰소리를 쳐도 오해할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이 산중에서 타잔 차림으로 지내다 보니 발등만 하얗고 온통 까맣게 되었다. 발은 스니커를 신고 돌아 다닌 탓이다.

옛날 우물에 담가 두었다가 먹던 수박이나 참외처럼 시원하고 달은 것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 입맛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은 그게 먹고 싶다. 7/25/16

예의범절 vs. 매너와 에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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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범절(禮儀凡節) vs. 매너(Manners) 와 에티켓(Etiquette).

상류사회와 평민들을 극명하게 대조 시킨 게 영화 타이태닉이다. 우선 놀이 문화부터가 다르다. 신나게 춤을 추며 노는 3등 선실, 점잖게 카드 놀이를 하는 1등 선실의 대비가 그 중 하나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속한 그룹에서 즐기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터넷에 우리 고유의 예의범절이 고리타분하다는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공자왈 맹자왈 한다는 것이다. 어떤 글에는 공자가 죽어야 한국이 발전한다는 주장도 있다.

근본이 없으니 우선 우리 것을 매도하려 드는 것이다. 우리의 풍습이 중국에서 온 줄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하나 입춘방(立春榜)을 써서 붙이는 것 외에는 중국의 풍습과 일치되는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에티켓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흔히 말하는 매너(Manners) 와 에티켓(Etiquette)은 같은 말이 아니다. 사전에서는 매너를 Way of behaving toward others. 라고 했다. 즉 타인에 대한 처신을 말한다. 거기에는 배려(concern)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매너가 좋다/나쁘다’라는 표현을 쓴다.

반면에 에티켓(Etiquette)은 Conventional requirements as to social behavior. 즉 사회적인 행동에서 통상적인 필요 조건이라 했다. 이 경우엔 ‘에티켓이 있다/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어느 민족이든 나름대로의 풍습이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옳지 않은 것도 있어서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는 자정의 기능에 의하여 다듬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 고유의 예의범절엔 매너와 에티켓이 함축되어 있다.

그럼에도 야당 대표라는 자가 그냥 자기 의견을 말하면 될 것을 ‘대통령의 치마폭’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비난하는 것을 보면 여자 대통령이라고 깔보는 저면이 내재되어 있다. 저질이다.

한국엔 공자가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자(놈 者)들처럼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들이 다 죽어야 제대로 된 국가가 될 수 있고 또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7/20/16

세상은 생각보다 훈훈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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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생각보다 훈훈한 곳이다.

옛날에는 카메라의 초점을 수동으로 맞춰야 했지만 요즘은 모두 자동으로 되어 있어서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동초점에서도 카메라의 조리개를 많이 열어주면 초점지점의 전/후는 초점에서 벗어 난다. 그걸 사진용어로 Shallow depth of field 라고 한다.

살아 가면서 세상을 보는 눈 역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 화합과 갈등이 있다. 그 중 어디에 렌즈의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게 심하게 편의(偏倚:bias)되면 이분법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해 버린다. 사람은 지속적인 자극에 대하여 무뎌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중 스트레스는 점점 더 예민해지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아파트의 층간 소음으로 일어난 살인사건처럼 소음이 거슬려서 나중에는 그 소음이 굉음(轟音)이 되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훈훈한 사연들도 많고 붙들고 같이 울고 싶은 사연들도 있다.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다. 평생 정신장애를 앓던 70대 노인이 모은 돈 3,800만원을 사회에 환원해달라는 유언을 하고 별세를 하였다고 한다.

사회가 자신을 평생 돌봐줬다는 이유에서이다. 처지와 형편을 초월하여 감사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 그게 어쩌면 득도(得道)의 경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천지창조는 내가 태어나던 날 이루어졌다.’꽤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내 시야에 들어 오는 주위환경, 내가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 내가 느끼는 기온, 내가 숨쉬는 공기, 내가 만나는 주위 사람들, 등등이 내 우주에 속한 것들일 것이다.

그런 우주에서 틀린 그림을 찾아 내듯이 사사건건 세상을 비난하는 글들을 인터넷에 연속적으로 올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선구자(先驅者)라고 착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한 공해도 없다.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이 심훈의 상록수 시대도 아니고 요즘 아이들 열살 만 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안다.

세상이 힘들고 지칠 땐 눈 들어 다른 곳을 보면 다소 안정이 된다. 20대 청년 소월의 시처럼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들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Anything Thats Part of You

한여름의 편지.

갯벌2

한여름의 편지.

春 ◦ 夏 ◦ 秋 ◦ 冬, 여름은 젊은이들의 계절이다. 작열(灼熱)하는 태양이 그들의 열정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방학이나 휴가시즌이 되기 때문에 젊은 날의 추억의 대부분은 여름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노년에는 기온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는 탓에 우선은 그 더위를 감내하기에는 체력이 달린다. 물리(物理)의 법칙은 물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도 작용하는 것 같다. 여름에는 늘어지고 겨울에는 움츠러드니 말이다.

그럴지라도 물이 있는 계곡이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에서 지난 날을 추억하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계곡에서는 어렸을 때 천렵(川獵)을 하던 생각이 날 수도 있겠고, 해변에서는 멀리 수평선 넘어 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아련한 그리움, 거기엔 뚜렷한 대상이 없다. 젊은 날의 꿈일 수도 있고, 또 지난 날들에 대한 아쉬움 등등 모든 게 섞여 있다. 미 동부의 해변은 대서양이기에 그 끝이 유럽의 어디쯤이 될 것이다. 유럽에서 살아 본적도 없으면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나니 그것도 묘하다.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
그 밖의 일이야 부러울 줄이 있으랴.

윤선도의 시조이다. 당대엔 양반들이나 누릴 수 있는 피서방법이다. 종들은 땡볕에 나가서 구술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달리 생각을 해 보면 이제는 모두 양반이 된 셈이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피서요령이 되니 말이다.

전에 한국에 갔을 때 친구가 우이동의 계곡에 있는 어느 식당에 안내를 했다. 물 가가 아니라 바윗돌로 징검다릴 놓고 실개천 가운데에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음식이나 술 맛이 일품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민족이기에 발상 역시 획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곳 애틀란타 지역은 3개월째 가뭄이란다. 농작물에 피해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보면서 이 정도의 더위는 감내해야 할 것 같다. 연일 섭씨 32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7/13/16

뜨거운 여름 날의 Daydream (白日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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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날의 Daydream (白日夢).

낭만적인 여름이라면 우선 남태평양의 천혜의 경관이 떠오른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 대개의 경우 그런 곳에는 여유로움이 있는 탓일 게다.

이 산중에서의 여름도 뭔가는 있을 법도 한데 아직 그걸 찾지 못하고 있다. 한 겨울엔 바람도 세차게 불더니 여름엔 너무 더운 탓인지 바람도 자취를 감추었다. 지도를 보고 가까운 호수를 찾아 갔다.

입구의 게이트(Gate)에서 거주자 외는 못 들어 간다고 한다. 7마일을 돌아 가면 호수에 들어 갈 수 있다는데 그런 수고까지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돌아 왔다.

죠지아는 디벨로퍼(Developer)들이 호숫가의 땅을 사서 주택단지를 만들고 주거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다. 그런 이유에서 다른 곳 보다 집값이 더 비싸다. 죠지아는 지세가 험한 계곡이 많은 탓에 호수에 진입할 길은 많이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초여름을 맹하(孟夏), 한여름을 성하(盛夏)라고 부른다. 요즘은 초여름부터 34도까지 올라 갔으니 그 구분도 애매하게 되었다. 하기야 한국의 삼한사온(三寒四溫)도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었으니 지구 곳곳이 과거의 통계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그럼에도 사람이 늙어 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인터넷에 노년의 삶에 대한 좋은 글들이 많이 올라 온다. 그러나 형편과 처지가 다 다르니 그걸 따라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것은 너무 이상에 치우친 경우도 있고 또 어느 글은 신선이 되라는 주문도 있다. 나 같은 속물에게는 당치도 않은 말이다.

미국 노인들은 어떨까 하여 인터넷 서핑을 하여 보았다. 테네시에 사는 한 할머니의 글인데 ‘노년의 풍요로움은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에서 기인된다’는 내용이다. 삶에 바빠서 대충 지나쳤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 관찰해보라는 조언이었다.

그의 공식을 대입해 보니 철마다 한가할 여유가 없다.
Keeps in busy..

한가지 원칙을 알면 그 적용 범위는 수 없이 많다. 남은 날들 중에서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인데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노년의 풍요일 것이다. 6/29/16

갈증(渴症)에 대한 내 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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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渴症)에 대한 내 처방전.

갈증은 체내에서 물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다만 당뇨는 다음(多飮), 다뇨(多尿), 다식(多食)의 증상이 오기에 병의 근본적 치료가 필요 하다.

특별한 질환이 없음에도 갈증이 심하여 물배를 채우다가 소화장애를 겪는 사람들도 있다.

물을 하루에 2 리터 이상을 마시라는 주문도 있으나 물의 필요량은 그렇게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체질에 따라 다르다. 갈증을 느낄 때 필요량의 물을 마시는 게 본인의 세포에게 충실한 것이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수독증(水毒症)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물을 마셔도 갈증이 멎지 않는 경우가 있다. 주로 여름철에 그런 현상이 오게 되는데 내 경우는 맥주가 그 처방이다. 홀랜드 맥주인 하이네켄(Heineken)이 나에겐 맞는다. 알코올이 5.6%인데 쌉쌀한 맛이 다른 맥주보다 더한 것 같다.

물론 갈증이 멎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다.

불치병환자들에게 어떤 처방을 내면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 되었느냐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불치병이라는 말은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을 들이 댄다.

과학이란 우선 논리가 성립되어야 하고 그 과정을 증명해야 하며 어느 누구든 그 방법대로 실험을 하였을 경우 결과가 항상 같아야 한다. 미국 FDA에서 약품허가 조건이 67%의 효과가 있고 다른 부작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면 허가 조건이 충족된다. 결국은 나머지 33%는 치료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민간요법을 무조건 배제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불치병에서는 시도해 볼 필요가 충분히 있다. 우선은 경제적인 부담이 적고, 제약의 그 뿌리는 민간요법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학대학에서 약초학은 필수 과목이다.

약초에 관한 한은 인도가 세계에서 제일 권위가 있다. 그래서 탕제(湯劑)을 넘어선 아로마 요법까지 개발하였던 것이다.

병은 자신이 주치의가 되어야 하고 그 병에 대하여 스스로 practical한 자세로 세심한 관찰을 하여야 한다. 자신의 몸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병이든 3주 이내에 몸의 변화가 없다면 그 치료법은 자신과는 안 맞는 치료법이다. (3주 이내에 완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오늘 기온이 34도입니다. 6/13/16.

‘플라스마’로 배기가스를 정화 시킨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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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마 자동차 배기가스를 정화 시킨다는데,

한국기계연구원에서 플라스마(Plasma)로 자동차 배기(排氣)가스를 완전연소 시키는 제품을 개발하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신문사에 제공한 그림에는 처리 후 배출되는 가스가 산소(O2)로 표시 되어 있다. 의도적인 오도(誤導)로 생각되는 이유는 그 개발제품 자체가 또 다른 환경문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우선 어느 경우든 연소 후에는 순수 산소(O2)가 나올 수가 없다. 산소 자체가 연소의 주동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반드시 다른 분자와 결합된 상태로 배출된다. 연소 후 산소는 이산화탄소(CO2)나 산화질소(NOx) 등으로 다른 분자와 결합된 모습이 된다.

문제는 플라스마는 다량의 오존(O3)을 발생하는 것이다. 오존은 대기중의 산화질소나 휘발성 유기물질에 태양의 자외선에 의한 광화학 작용으로도 발생한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 일기예보와 함께 오존예보를 한다.

만일 차량마다 플라스마 배기처리장치를 달고 다닌다면 흐린 날이나 밤에도 수시로 오존경보가 내려야 할 지경이 되어 버린다. 현재 자동차의 배기가스문제는 제조업체에서 연비조작을 위하여 SCR(Selective Catalytic Reduction) 촉매 시스템의 기능을 정지 시켜서 발생했다.

플라스마 배기가스처리 장치의 성능 시험에서는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기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오존 측정기도 함께 설치하여 검사를 해야 할 것이다.

플라스마란 고체, 액체, 기체가 아닌 제4의 물질이다. 고전압(高電壓)을 코로나 방전을 시키면 쉽게 얻어진다. 그 과정에서 전자와 원자를 분리 시키면서 이온화 현상이 일어 난다. 그런 기능에 의하여 불연소 가스를 태울 수는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다량의 오존(O3)이 발생 된다.

대부분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이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다. 소각장에서는 굴뚝으로 오존을 배출하지만 차량에 부착된 플라스마장치는 그대로 노상에 배출하게 된다.

오존은 맹독성 물질이다. 인체뿐만이 아니라 농작물에도 상당한 피해를 주고 금속은 금방 부식할 정도이다. 침수되었던 지하실의 곰팡이 냄새 제거나 화재로 인한 그을림 냄새제거 등등 탈취 목적으로도 사용한다.

인체가 오존에 노출되면 만성 호흡질환, 천식 악화, 폐활량 감소, 폐렴, 눈의 가려움증, 아토피 피부질환, 생체 면역능력 감소되고, 오존을 흡입하였을 경우 허파꽈리가 부풀어 오르는 흉부통증, 기침, 목 부위 자극, 울혈 반응 및 기관지염, 폐기종, 천식 악화 등 건강피해 영향요인으로 작용한다.

집에 공기 청정기를 설치한 후에 목이 아프거나 눈이 가려운 사람은 오존에 민감한 사람으로 청정기의 코로나 방전에서 발생되는 오존 탓이다.

이제 환경문제는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장 건강을 치고 들어 오는 상황까지 되었다. 과거엔 직업병이라 하여 특정 작업환경에서 얻어지던 질병들이 전혀 그런 직업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만큼 생활환경이 보편적으로 악화 되었다는 방증이다.

병의 치료목적으로 복용한 약이 인체의 다른 장기를 병들게 하듯이 환경문제 역시 기존 문제해결을 위한 조치가 얼마 뒤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우를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 속담에도 ‘후라이 판에서 튀어 나와 불 속으로 들어 간다’는 말이 있으니 말이다. 6/10/16

미세먼지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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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유감(有感).

아마 한국처럼 단숨에 집단교육이 잘되는 나라도 없을 것 같다. 정치이념의 개입으로 태생된 ‘구멍 숭숭 광우뼝’으로 온 나라가 홍역을 치렀었다.

고기집들이 파리를 날리거나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었었다.

한국은 광우병 임상이 zero임에도 어느 의사는 ‘한국인의 유전인자는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95%’라고 겁을 주기도 했었다. 점쟁이처럼 말하던 그 의사는 지금쯤엔 노벨상을 받았어야 한다.

애틀란타에 사는 이선영이라는 주부는 손석희의 100분 토론에서 ‘미국사람들은 광우병 때문에 고기도 골라 먹고, 한국에는 늙은 소만 수출한다’고 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었다.

이번에는 미세먼지이다. 조중동 모두 사설로 취급하였으나 그 Fact를 옳게 짚지는 못했다. 자동차 제조사인 폭스바겐의 배기개스 조작으로 인하여 시작된 미세먼지가 고등어에 불을 붙였다.

고등어 값의 폭락이 문제가 아니라 집에서 생선구이나 고기구이를 자주 해 먹던 주부들은 가슴이 답답해 지거나 목이 개운치 않으면 영락없이 미세먼지 탓으로 간주할까 그게 염려가 된다.

통상적으로 주부들은 무슨 구이를 할 때는 창문을 열어 놓고 배출기의 홴(Fan)을 튼다. 집 안에 냄새가 배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미세먼지 문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 때는 건강 이야기가 빠졌으니 웬지 찜찜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염려 마시라,
우리 인체가 고등어 몇 마리를 구웠다고 그게 치명적이 되지는 않는다.

얼마 전에는 약초 연구가라는 사람이 올린 ‘현미를 먹으면 서서히 죽는다’는 글 때문에 몇 십 년을 현미를 먹었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었다.

그의 글 중에 ‘썩은 논 물에서 자랐기에 그 독소가 벼의 껍질에 축적되어 있다’는 내용이 있다. 논의 물은 썩을 정도로 오래 가둬두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논에는 가 보지도 않고 상상으로 쓴 것이니 그건 연구의 결과는 아니다.

물론 현미가 누구에게나 다 맞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증상이 현미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걸 몸에 좋다고 억지로 먹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흘렀지만 휘발유(개솔린)와 경유(디젤)는 서로 다른 환경문제를 만든다. 휘발유 차에서는 이산화탄소(CO2)의 배출이 많아서 그게 지구 온난화를 야기하는 반면 경유 차에서는 이산화탄소의 배출은 적으나 탄화질소(NOx)를 많이 배출하는데 이 게 바로 미세먼지이다.

지구 온난화를 피하려면 경유차량을 주 교통수단으로 선택해야 하겠고, 미세먼지를 줄이려면 휘발유 차량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경유차량은 휘발유보다 적은 연료로 더 큰 힘을 얻지만 엔진이 복잡하여 휘발유 엔진 보다 비싸다.

국립환경과학원의 ‘대기오염물질 배출량 산정 결과(2012년)’에 의하면 미세먼지(PM10) 배출 비중은 ‘제조업 연소’가 65%, ‘도로 이동 오염원(모든 자동차)’은 11%다. 나머지는 공사장에서 발생하는 비산먼지이다. 도로 이동 오염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엔진의 배기가스가 아니라 타이어의 마모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란다.

가능하다면 주거지역은 도로나 공장, 발전소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게 우선은 상책이 될 것이다.

건강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과민반응은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된다. 아는 만큼 조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게 건강상식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무조건 모두 건강 합시다. 6/6/16

반딧불이 찾아 왔네, 우리 산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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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찾아 왔네, 우리 산골에.

국민학교 때 유리병에 반딧불을 잡아 넣고 그 불빛으로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학교에서 배운 형설지공(螢雪之功)을 흉내 내본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기질이 평생 연구원을 하게 만든 것 같다.

어제 밤에 금년 들어 처음으로 반딧불을 보았다. 옛 친구를 만난 만큼이나 반가웠으니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 듯싶다.

자연의 질서, 어찌 보면 그게 무언의 약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언질은 없었지만 매년 그 때가 되면 기다려지는 것들이 계절에 따라 있다. 어제 밤에 만난 반딧불도 그 중 하나이다.

서울 태생들은 어렸을 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대부분 옛날 거리나 극장이나 백화점 위주로 이야기를 하지만 나 같은 촌놈들은 냇가에서 고기를 잡던 이야기나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이야기, 한 여름 우물에 넣어 두었던 수박 먹은 이야기 등등이 전부다.

요즘은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있다는 것 그보다 더 친밀감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촌놈이라는 별칭이 더 정겹다.

그럼에도 한국에 있을 땐 양식집에서는 촌놈 소리를 안 들으려고 좀더 세련된 연출을 하려 들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살아 보니 다른 민족의 음식이나 풍습을 모르는 게 창피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민족이 다르니 당연한 것이고, 물어 보면 또 친절히 알려 준다. 또 그런 걸 통달했다고 해서 더 세련된 것은 물론 아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레스토랑에 가면 음식주문 하는 게 고역이었다. 메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면 빵은 soft를 원하느냐 hard를 원하느냐, 고기는 well-done이냐 medium이냐, 술은 어느 것을 원 하느냐, 수프는? 디저트는? 음료는? 등등 말도 짧지만 무엇이 내 입에 맞는지를 알 수 없으니 난감했었다.

그 촌놈에게 어제 반딧불이 찾아 온 것이다. 어찌 보면 서산 갯마을의 그 반딧불과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원산지가 어디였든 그게 무슨 문제랴. 반가운 마음이 더한데. ㅎㅎ 6/3/16

‘육목단’은 벌써 지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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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목단’은 벌써 지고 없는데,

나는 조영남의 노래를 좋아한다. 장사익이나 조용필처럼 감정이입(感情移入)을 과장되게 연출하지 않아서 듣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의 노래 중 ‘모란동백’을 최고로 친다.

그가 어느 콘서트에서 ‘화투를 좋아하다가 쫄딱 망했다’고 했단다. ‘조영남의 대작’이라는 가사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대작(大作)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대작(代作)이라는 말이었다.

화가가 조수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의 변명처럼 ‘자신의 원본을 사진 찍어서 보내며 이렇게 그려라’하였으니 내 작품이라 한다면 그건 수 많은 화가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그림이나 서예, 조각 등등에서 위작(僞作) 논란이 일어 나는 것은 그 작품 속에 작가의 혼이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흔히 예술(藝術)을 서양의 Art에 대한 정의를 이용하여 설명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이유는 한자를 풀면 그 속에 해석이 따라 오기 때문이다. 한자 예(藝)나 술(術)은 둘 다 재주를 의미한다.

학(學)은 이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술(術)은 반드시 실존적(實存的)이라야 한다. 그래서 의학(醫學)에서 임상(臨床)이 없으면 의술(醫術)이 될 수 없고, 반대로 병을 치료 했으나 이론적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엔 의술(醫術)일 뿐 의학(醫學)이라 말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바느질이나 수 놓는 것을 ‘한 땀, 한 땀’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만큼 단숨에 머리에 각인되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그게 우리말의 위대함이다.

작가의 한 땀 한 땀이 배어 있는 작품에 의해서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신(神)은 한 사람에게 열 가지 재주를 주지는 않는다. 미국 벤자민 프랭크린은 발명가이며 정치가, 저술가였으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의 예술가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곤궁 하였었다. 그 재주를 돈으로 바꾸는 재주가 없었던 탓이다.

화가나 작곡가의 작품은 사후(死後)에 장사꾼들에 의하여 값이 폭등하였다. 돈 버는 재주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클라식 음악의 경우 작품번호 옆에 그 음악의 분위기에 걸 맞는 ‘월광’이나 ‘운명’처럼 부제를 달아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연애를 할 때는 누구나 다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실연을 당했을 때가 시인이 될 확률이 더 많다. 시궁이후공론(詩窮而後工論)이라는 말이 있다. 시인은 곤궁할 때 좋은 시가 나온다는 말이다. 시인들은 이 말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옥죄어 오는 고뇌는 좋은 환경 속에서의 인위적인 고뇌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조씨의 그림을 산 사람들은 예술적인 감각이전에 유명인의 그림이니 후에 돈이 될 듯싶어서 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대작을 해 준 사람을 찾아 가서 화투를 이용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두 그림을 나란히 걸어 놓고,
“이쪽은 조영남의 1억짜리 그림, 이 쪽은 대작화가의 4억짜리 그림”

나이 60이면 그 나름대로의 화풍이 분명히 정립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무명화가라 하지만 돈 버는 재주가 없을 뿐이지 그림까지 못 그리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돈이 인간의 품위를 정하는 잣대가 되는 세상이라서 그게 나를 슬프게 한다. 5/3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