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사연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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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좀 쌀쌀한 날, 미 동북부에 있는 케이프 캇 해변의 언덕에 한 중년여인이 꽤 오랜 시간을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한 노신사가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가 꼭 자기 자신과 같다고 했다. 세파에 밀려서 부딪치고 깨지는 것은 늘 자기자신인데 바위는 언제나 멀쩡하다는 말이었다. ‘죽는 파도’ 그걸 카운트하고 있었다고 한다.

노신사는 우리의 손이나 발을 그 사람이라 아니하듯이 파도 역시 바다의 일부분이니 당신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라고 했다. 바다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면서 아래 해변에 펼쳐진 조약돌들이 바위에서 얻은 바다의 전리품(戰利品)이라 했다.

위 내용은 우울증환자의 투병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환자는 노신사와의 짧은 대화에서 얻은 발상의 전환으로 병을 털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땐 사소한 말에서도 힘을 얻게 된다.

위에 등장한 노신사, 적절한 비유로서 남을 위로할 줄도 알고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도 있다. 그건 어느 책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경륜에서 쌓여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늙는 과정에서 얻은 소득이다. 옛날 군인들이 길을 잃었을 땐 늙은 말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그 말을 따라가면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고령인구가 늘다 보니 노인문제가 이슈화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옛날에도 고려장 이야기가 있었으며 불효자는 공자시대에도 있었다. 그러기에 공자가 효(孝)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주장을 하였을 테니 말이다.

한국정부의 노인정책은 미국의 노인정책보다 우월하다. 문제는 실버산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전혀 전문적이 아닌 게 문제이다. 지식이 없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도 아니다.

요양병원에서 환자가 넘어지면 뼈가 부러진다고 환자를 묶어 놓는다고 한다. 넘어져서 뼈가 부러질 확률이 50%라면 묶어 놔서 생기는 근육손실은 100%이다.

죽은 것처럼 곤히 자는 사람도 수십 번을 뒤척이며 잠을 잔다. 몸의 혈행(血行)을 위한 인체의 반응이다. 한 환자의 아들이 쓴 글에 요양병원에서 모친을 묶어 놔서 수저도 못 들던 모친이 요양원으로 옮긴 후 수저도 들 수 있고 부축하여 산책도 한다고 했다.

사람을 묶어 놓는 건 물리적인 것 이상으로 정신적인 상처가 된다. 아무리 정신 줄을 놓았다 해도 자신이 묶여 있는 것은 안다. 단순히 병원이 편하자고 환자를 묶어 놓는 것이다.

행여 요양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경우,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묶어 놓지 말라고 계약서에 쓰시라.

박완서의 ‘황혼’은 1979년, 저자의 나이 40대에 발표한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에 시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며느리가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 하면서 ‘늙은 여자’라고 해서 스스로 그냥 늙은 여자로 화자(話者)가 되어 나온다. 그 늙은 여자는 며느리를 ‘젊은 여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러나 늙은 여자는 지금 정말 불쌍한 건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임을 깨닫는다.” 이 대목이 그 소설의 핵심이고 결론일 것이다.

시집살이가 고초당초보다 더 맵다고 하던 시절에도 그 소설 속의 ‘늙은 여자’는 명치 밑이 아팠었다. 노년의 소외감 탓이다. 소외감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기에 그걸 요리할 줄 아는 게 노인의 지혜일 것이다.

인터넷에 곱게 늙기 위한 좋은 글들이 많다. 그러나 처지와 형편이 각기 다르고 또 늙어서 갑자기 신선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젊은 시절의 고독이 문학적이라면 노년의 고독은 현실이다. 노년에는 굳이 논리적이거나 이상적인 화두가 필요한 건 아니다. 함께 자리하여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만으로도 족한 경우가 많다.

우선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요령을 터득하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미국에서 한인들이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분해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살펴보면 그 상대는 유색인종에게뿐 만이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똑같이 무례한 행동을 한다. 그럴 때 조언해 주는 말이 “Don’t take it personally” 이다. ‘그 사람이 (옳지는 않지만) 당신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 때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로 치환을 하다 보면 저 사람이 뭔가 나 아닌 다른 원인에서 기분이 상했구나 정도가 될 수 있다. 즉 3자적인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생엔 정답이 없다는데 나 역시 탁상공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때로는 내가 써먹는 요령이다.

어느 날 문득 노래의 가사가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갈급할 때 성구 한 구절이 심령을 흔들어서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도 있고, 법화경(法華經)의 한 소절에서 답을 얻어 불자(佛子)가 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종교는 논리가 아니라 체험이라고 한다.

오늘 이곳엔 비가 내린다. 그 우중에서도 꽃들은 여전히 미소를 보내고 있으니 그것도 배울만하지 않은가?  4/1/16  cane0913@hanmail.net

Lincolns Lament-Michael Hoppe.

“무슨 사연이 있겠지””에 대한 4개의 생각

  1. 미미김

    네 테레사님. 그, 나이들면 고집이 세어지고 또 눈은 더 똥그래 지는데 왜 그러는건가요?? 저를두고 하는말입니다… 늘 좋은글 거저읽고있읍니다. 감사합니다.

    1. 김진우 글쓴이

      제 경험으로는 스스로 고집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사실 고집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니
      행여 내가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닌가 하면서 절제를 하게 되지요.

      가끔은 집념과 아집을 혼동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2. 데레사

    잔잔한 음악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아침입니다.
    꽃이 지천으로 피어서 오라고 손짓 하는 곳이 많아 좀 있다
    나가 볼려고요.
    버스 몇정거장만 타고 가서 내리면 꽃 핀 곳으로 갈것 같아서
    무조건 나가 볼려고요.

    나이 들어 갈수록 얘기 상대가 줄어드는것 또한 현실이지만 자기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친구는 또 얼마든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두들 고집이 세어지니 그 또한 사귀기 쉽지도 않죠. ㅎ

    좋은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1. 김진우 글쓴이

      인터넷 덕분에 통상의 동네 노인들보다는 친구 사귀기가 수월한 면도 있습니다.
      마우스 클릭 하나로 사라지는 친구도 있겠지만
      진솔한 친구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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