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생각보다 훈훈한 곳이다.

shallow depth of field

세상은 생각보다 훈훈한 곳이다.

옛날에는 카메라의 초점을 수동으로 맞춰야 했지만 요즘은 모두 자동으로 되어 있어서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동초점에서도 카메라의 조리개를 많이 열어주면 초점지점의 전/후는 초점에서 벗어 난다. 그걸 사진용어로 Shallow depth of field 라고 한다.

살아 가면서 세상을 보는 눈 역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 화합과 갈등이 있다. 그 중 어디에 렌즈의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게 심하게 편의(偏倚:bias)되면 이분법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해 버린다. 사람은 지속적인 자극에 대하여 무뎌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중 스트레스는 점점 더 예민해지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아파트의 층간 소음으로 일어난 살인사건처럼 소음이 거슬려서 나중에는 그 소음이 굉음(轟音)이 되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훈훈한 사연들도 많고 붙들고 같이 울고 싶은 사연들도 있다.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다. 평생 정신장애를 앓던 70대 노인이 모은 돈 3,800만원을 사회에 환원해달라는 유언을 하고 별세를 하였다고 한다.

사회가 자신을 평생 돌봐줬다는 이유에서이다. 처지와 형편을 초월하여 감사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 그게 어쩌면 득도(得道)의 경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천지창조는 내가 태어나던 날 이루어졌다.’꽤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내 시야에 들어 오는 주위환경, 내가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 내가 느끼는 기온, 내가 숨쉬는 공기, 내가 만나는 주위 사람들, 등등이 내 우주에 속한 것들일 것이다.

그런 우주에서 틀린 그림을 찾아 내듯이 사사건건 세상을 비난하는 글들을 인터넷에 연속적으로 올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선구자(先驅者)라고 착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한 공해도 없다.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이 심훈의 상록수 시대도 아니고 요즘 아이들 열살 만 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안다.

세상이 힘들고 지칠 땐 눈 들어 다른 곳을 보면 다소 안정이 된다. 20대 청년 소월의 시처럼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들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Anything Thats Part of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