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채워지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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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채워지는 달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엘리옷(T. S. Eliot)의 시 ‘The Waste Land’ 중의 일부이다. 이 시 덕분에 사월은 ‘잔인한 달’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시를 뒤집어 보면 ‘사월의 찬미(讚美)’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어찌 되었든 사월은 그렇다 치고, 나는 ‘오월은 채워지는 달’이라 부르고 싶다. 내가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산과 들에는 푸른 초목으로 채워지고 그녀의 시에서 나오는 라일락뿐만이 아니라 수 많은 종류의 꽃들이 곱게 피어 나니 그만한 횡재도 없다.

자연은 그 땅의 주인이든, 지나가는 과객(過客)이든 간에 차별을 두지 않고 그 속살을 보여 준다. 좀 거창하게 말을 한다면 그게 박애사상(博愛思想)일지도 모른다.

점심 식사 후에는 운동 겸 낫을 들고 산속으로 들어 간다. 솔밭이 있는데 넝쿨 식물이 소나무를 타고 올라 가는 것을 잘라 내기 위해서다. 칡넝쿨은 하루에 1 미터 자란다고 한다. 산속에서 그걸 다 잘라 내는 데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운동 시간으로는 적당하다.

처음에는 넝쿨식물 때문에 이상하게 뒤틀려서 자란 나무들을 베어 냈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는 주로 이상하게 뒤틀린 나무들을 정원에 심어 놓는 것을 보고 지금은 그런 나무들을 최대한 살리려고 하고 있다. 무엇이든 의미에 따라 해석이 다른 것을 체험한 셈이다.

‘사랑과 재채기는 감출 수 없다’는 말처럼 기쁨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다 즐겁게 보이니 표정이 밝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인식 되듯이, 때로는 환경이 감정을 조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하거나 풍광이 좋은 곳에 가서 기분전환을 하고 온다.

한국도 이젠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주로 해외여행을 선호하는 것 같다. 기왕에 나설 바에는 역사학도가 아니라면 유적지 보다는 풍광이 좋은 곳을 보는 게 에너지 충진에 훨씬 득이 있을 것이다.

그런 목적에서는 국내에도 갈 곳이 많다. 옛날에 민둥산들이 모두 산림이 우거졌고 해변가도 잘 정리 되어 있으니 가까운 친구와 다니다가 마음에 들면 더 머물고 아니면 패스하는 식이 인솔자를 따라 다닌 것 보다는 훨씬 더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재수가 좋으면 만선(滿船)이 되어 돌아 온 어선을 포구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곳에서 싱싱한 생선을 사서 매운탕 집에 가서 끓여 달래서 먹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일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고국에 가서 조선의 김정호가 지도를 그리듯이 서해안을 따라 남해안으로 다시 동해안을 따라서 강원도 꼭대기까지 돌아 볼 생각이다. 5/18/16

신록(新綠) / 素石 김진우.

 

작년 이 맘 때 푸르던 잎
금년에도 역시 푸르른데
익숙한 그 모습이
다시 만난 옛 친구처럼 반갑구나.

 

행여, 사람들이 그대를
新綠이라 부를지라도
서운해 하지는 마시게
그대는 언제나 내 옛 친구이니 말일세.

 

토끼소주(tokki so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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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소주(tokki soju).

한 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의 전통소주 양조법을 배우고 왔다. 그가 배운 대로 뉴욕에서 그 소주를 직접 양조하여 2홉짜리를 온라인에서 $24.95 달러에 판매하고 있는데 애주가들의 반응이 좋다고 한다. 뉴욕 브루클린(Brooklyn)에 토끼소주 시음장도 있다.

누룩과 쌀로 빚은 술, 그 누룩은 일반 이스트와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고 첨가되는 천연 재료의 향이 그대로 살아 있는 데서 그가 애초에 한국의 전통 소주에 매료된 것이라 한다.

일반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희석식 소주는 다섯 번 증류하여 알코올의 순도를 높인 다음 물을 섞어서 판매를 하는 것이지만 전통소주는 한번 증류한 것이 완제품이 되는 것에 차이가 있다. 전통소주는 생산량이 저조한 연유로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다.

그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의 충격을 받았다. 우선은 그 소주의 이름이다. 술을 앉히며 그 일정을 음력에 맞춰서 잡는 것을 보면서 달의 ‘옥도끼’ 전설을 알 게 되었는데 그래서 술 이름을 ‘토끼소주’라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상호이름을 외래어 내지는 외래어를 조합한 합성어라서 설명이 없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상호뿐만이 아니라 아파트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왜정시대엔 일제가 우리 말을 말살 시키려 했었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우리 말을 지우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외국인은 한국어를 이용하여 그 상품에 대한 이미지를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충격은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가치관(value)이 내국인과 외국인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말 하지만 애초에 우리 것은 다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제쳐 놓고 새로운 것만을 찾아 나서니 그게 문제이다.

남의 것을 카피하면 그 결점까지 따라온다. 원 개발자는 그 결점을 해결 할 수 있으나 모방을 한 자는 그런 원천 기술이 없기에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거북선, 그러나 그 후속이 없다.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 히트를 쳤다. 3억 인구의 미국에서 20만부 팔린 책이 4천만 인구의 한국에서는 6개월 만에 백만 부가 팔렸다. 저자가 두 번이나 한국에 가서 공개강좌를 하였다.

정약용은 200여 년 전에 목민심서에서 마이클 보다 더 디테일하게 예를 들면서 그 ‘정의(正義)를 정의(正意)’ 하였다. 백만 부의 책을 팔아 준 사람들 중에 과연 몇이나 목민심서를 읽었을 지가 궁금하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노벨상 수상자들 중 대부분은 늘 곁에 고전을 두고 읽었다고 한다. 한국의 달 속에 있던 토끼가 뉴욕으로 달아 났으니 금년 추석에는 꼭 확인을 해 보시라. 5/11/16 cane0913@hanmail.net

“여보, 아직도 내가 예뻐요?”

송철호, 김옥경

“여보, 아직도 내가 예뻐요?”

위 사진은 경상도 문경에서 사는 송철호, 김옥경 부부의 모습이다. 기자가 시골에 사는 노부부들의 모습들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대화내용을 사진설명으로 올려 놓은 것을 글 제목으로 차용했다. 여러 커플들이 있었으나 이 부부의 모습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부인의 질문에 빙그레 웃는 송철호씨의 옆모습이 순박하기 그지없다. 산골에서 사는 노부부, 부부가 화목하니 표정도 밝을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최고의 화장품은 ‘사랑’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해 본 소리이다. 자식들은 다 외지에서 살고 두 내외만 그곳에서 산다고 한다.

허리는 굽었으나 그 할머니에게 꽃 같은 시절이 왜 없었겠나? 할머니의 ‘아직도’라는 그 말에는 흘러간 세월이 배어있다. 세월은 갔으나 표정이나 말 투에 애교가 있으니 늘 젊게 사는 부부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할머니는 늘 확인해 보고 싶었든 말을 기자를 증인 삼아 다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년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좀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제일 흔한 게 사랑이고 또 쉽게 변질 되는 게 사랑이라는 말이니 그렇다.

노년에는 서로 존경 하는 게 그게 바로 사랑일 것이다. 존경이란 위대한 사람이나 손 위 사람에게만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나 혹은 손 아래일지라도 나보다 더 좋은 점이 있다면 당연히 존경심이 생기게 된다.

존경하는 마음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된다. 유한(有限)한 인생, 그럼에도 이심전심이 되는 누군가가 있는 한은 외로움이나 슬픈 것들을 이겨낼 수 있으니 그게 세상에 온 보람이 아니겠나? 또 그게 행복일 것이다. 5/9/16 cane0913@hanmail.net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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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

꽃들은 지고 산야(山野)는 온통 초록으로 변하니 봄 꽃에 환호(歡呼)하던 마음이 이제는 신록(新綠)을 찬탄(讚歎)하게 된다. 봄의 꽃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모습이 가을까지 지속되는 것도 마음에 든다.

옛사람들도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라 했다. 푸른 나무들의 그늘과 향기로운 풀들이 꽃 필 때 보다 더 좋다는 말이다. 화려한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세상의 이치가 자연에서도 적용되는 듯 하다.

연예인들이 마약을 하는 것은 그 결과가 어떨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추락하는 자신의 인기를 보면서 그 소외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외감은 마음뿐만이 아니라 건강까지도 앗아 간다. 화려한 직업의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걸맞게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니 세상사 모두 평(平)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池閣絶句 (연못 가의 정자에서 지은 절구)

茶山 丁若鏞

 

種花人只解看花(종화인지해간화)

不解花衰葉更奢(불해화쇠엽갱사)

頗愛一番霖雨後(파애일번림우후)

弱枝齊吐嫩黃芽(약지제토눈황아)

 

꽃을 심은 사람은 꽃만 볼 줄 알지만

꽃이 진 후에 나오는 잎이 더 좋은 줄을 모르네

연일 비가 내린 뒤에 한번 살펴보시게

작은 가지에서 일제히 돋아난 연 노란 색깔의 싹을.

 

다산은 이 시에서 인생의 sequence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것만 인생이 아니라 그에 연속되는 인생의 여정, 그걸 발견하는 사람만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산의 고목나무들을 자르고 보니 그 그루터기에 어느 것은 수 많은 새 가지를 내고 어느 것은 그렇지가 않다. 새 가지를 낸 나무는 아직 고목은 아닌데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살다 보면 다음단계에 연결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그걸 인생의 공백기라고 한다. 그럴 때는 그 공백에 그냥 주저 앉을 게 아니라 그것을 메울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 내는 게 인생의 지혜가 될 것이다. 특히 노년에는 설령 그것이 고상한 취미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내면을 충족 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보약이다.

이 신록의 계절에 자연은 이토록 늘 인간에게 적절한 메시지를 주고 있으니 조물주에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4/30/16 cane0913@hanmail.net

가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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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

이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이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 있나

판소리 본 창을 하기 전에 부르는 단가 중의 하나인 사철가의 시작 대목이다. 인생 팔십을 산다 해도 병든 날, 잠든 날, 근심걱정을 한 날들을 제하면 사십도 채 못산다는 내용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이다.

흰 머리가 생기고 얼굴이 주름이 생기는 것만 늙는 게 아니라 마음도 같이 늙는다. 유행가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 같을 때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젊어서는 유행가 가사를 그렇게 음미하게 되지는 않는다. 좀 더 늙으면 판소리 가사가 귀에 들어 온다.

젊었을 때는 판소리를 들으면 이태리 말로 부르는 오페라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으나 늙어서는 그걸 알아 들으니 그것도 묘하다. 사설(辭說)에 철학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은 가부끼를 서양의 오페라와 동격으로 놓고 감상을 하지만 한국에서 판소리는 영화 서편제에서나 등장하는 정도이니 그것도 아쉬운 점이다. 나는 스트레스가 있을 땐 민요를 크게 틀어 놓고 따라 부르면 좀 개운해 진다. 음치이지만 궁상각치우의 오음계에서는 별 탈이 없다.

위 사진은 영국 여왕의 젊었을 때와 현재의 모습이다. 꽃다운 시절은 여왕뿐만이 아니라 누구에나 다 있었다. 젊음은 이미 다 누려 봤기에 그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뒤를 돌아보면 오늘이 가장 늙은 날이 되겠지만 남은 날들에 대해서는 오늘이 분명 젊은 날이기 때문이다.

한 필우님의 글에,
봄 꽃들을 보면서 ‘저 꽃들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으며 가슴이 아려왔다. ‘술이 반 병이나 남았다’와 ‘술이 반 병 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 진다는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누구나 다 안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사철가에 이런 일침도 있으니 그런 게 판소리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은 100년 이상 잘 숙성된 아주 비싼 술인데, 어느 경우든 그 반 병에서 열 잔이 나올지 스무 잔이 나올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이 화창한 봄날에 그 반병이나 남은 술을 꺼내 놓고 좋은 안주도 한사라 준비하여 지긋이 서로 눈을 맞추며 인생을 찬미하심이 어떨는지? 4/27/16 cane09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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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田園住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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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의 저택)                (장동건-고소영 부부의 전원주택)

신문에서 장동건-고소영 부부의 전원주택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 주택이 세계건축커뮤니티(World Architecture Community)에서 제22회 세계건축상 ‘준공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평가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건축가가 자신의 기교를 부린 것 일뿐 전원주택의 목적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에는 전원주택(田園住宅)이란 말 자체가 없다. 한국에서 도시 사람이 자연을 찾아서 시골에 짓는 주택을 의미하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시골에 가서 초롱초롱한 별을 다시 만나게 되고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매 달 찾아 주니 그만한 소득도 없을 것이다.

자연을 찾아 갔으니 당연히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그 속에 들어 가야 한다. 또한 집은 외부에서 보았을 때 안정감을 줘야 하고 내부에서도 창을 통하여 밖의 자연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장씨의 집처럼 외관이 기하학적으로 된 집에서는 안정감을 얻을 수 없다. 또 건물 안에 마당이 있다고 한다. 즉 안 마당만 있다는 말이다.

전원주택의 키 포인트는 조경(造景)이다. 한자 자체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경치가 되겠으나 원래 조선의 조경은 일본과 달리 차경(借景)이다. 즉 주변의 경치를 빌려 쓴다는 말이니 주변의 공간과 조화를 우선으로 했다.

요즘 한국에서는 큰 바위를 예술적(?)으로 배치를 하고 다 자란 정원수를 심고 하는 형식이다.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경비는 차제하드라도 묘목을 심어 놓고 그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는 재미는 없을 것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儉而不陋),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華而不侈)”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백제의 궁궐을 평가한 말이다. 이 말은 현대의 주택에도 반드시 적용해야 할 조건이라 생각한다.

에너지 하우스를 연구하며 세계 각국의 주택에 관련된 기사나 자료들을 챙기며 비교분석을 하고 있다. 최소의 면적에서 최대의 효율을 얻기 위하여 수 십 채의 집을 설계하여 컴퓨터로 모의실험(simulation)을 하고 있다.

은퇴 후의 전원주택은 에너지 하우스와 일치되는 요구조건들이 많다. 우선은 실내공간의 낭비가 없어야 한다. 그게 직접적으로 에너지 손실과 연관되기 때문이고 건축주에게는 자재의 낭비로 인한 경비지출을 줄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주택은 수 백 년 동안 그 지역의 기후와 정서에 의하여 진화를 해 온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유명한 건축가가 특이하게 지은 집들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장동건 부부의 케이스뿐만이 아니라 강원도 산중에서 통 유리창을 달고 카페처럼 지은 주택이나 에너지 하우스라고 창고처럼 지은 부산의 어느 에너지주택 등등 모두 유명 건축가나 대학교수가 지은 집들이다.

그 유명 건축가들은 대부분 주택을 지은 경력이 없고 돈이 되는 큰 건물만 지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주택이 아니라 카페나 리조트의 건물처럼 상업용 건물들을 짓는 것이다. 한국은 수 십 년 동안 아파트 건축에만 집중을 한 연고로 소형주택에 대한 전문가가 부족하다.

주택의 첫째 조건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늑하고(cozy) 편안해야 한다. 특히 침실은 너무 넓거나 천정이 높으면 숙면을 취할 수 없다. 그래서 옛날 임금의 침전(寢殿)은 궁궐의 다른 곳보다 규모가 작았다.

두 번째로는 채광이 좋아야 한다. 풍수지리학 교수라는 모씨 왈 ‘요즘은 난방 시스템이 잘되어 있어서 북향도 상관없다’ 는 주장을 하나 주택의 채광은 건강에 필수이다.

세 번째로는 건물 자체가 외부와 호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습도조절과 실내공기의 오염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황토벽돌에 대하여 과대평가를 하고 있다. 주택은 목조건물이 가장 친환경적이다.

네 번째로는 주택은 외관상으로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택은 좌우가 대칭 (symmetry)된 모습을 한다. 미적(美的)인 관점뿐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건물의 하중(荷重)을 분산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기초를 아무리 튼튼하게 했을지라도 몇 년이 지나면 창틀이 잘 안 맞게 된다.

다섯 번째로는 지붕은 가능한 한 단순(simple) 해야 한다. 여러 구배를 주면 나중에 누수의 문제도 생기지만 그 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애틱(attic)의 열을 배출하는 데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전원주택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인터넷에서 House Plan을 색인해 보면 전문적으로 도면만 파는 회사들이 많다. 보통 1,000불 정도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사도 업자들이 이해를 못할 테니 그냥 그것을 스케치하여 내부를 필요에 따라 변경한 후에 업자와 상의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집의 내부구조는 절대적으로 부인에게 결정권을 주어야 한다. 그 이유는 여자들이 살림에는 남편이나 건축사보다 더 낫고 또 생활 패턴이 가정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구조가 건축비를 상승 시키는지 아니면 내려 가는지 만 건축사들의 자문을 받으면 된다.

내 설계로는 1,436 SF(40.4평)으로 침실 3개, 주방, 거실, 창고, 화장실 2개, laundry room을 만들 수 있다. 또 같은 면적에서 침실 1개와 창고를 빼고 차고(1대)를 넣어도 된다.

기왕에 짓는 집인데 하면서 한 평 두 평 늘리다 보면 집은 점점 더 커지게 마련이다. 그게 결국은 에너지 손실을 더하니 그런 우는 범하지 마시기를 부탁 드리고 싶다.
4/23/16 cane0913@hanmail.net

Over Valley And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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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술표준국에서 메릴랜드 주 게이더스버그에 지은 에너지 하우스로 일반 주택과 같은 구조로 지은 후에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여 연구를 하는 test bed house.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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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의 낙화(落花)가 생각난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에서의 ‘바람’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시속 25마일의 강풍이 불어 대더니 도그우드(dogwood)의 꽃잎이 거의 다 사라졌다. 시인은 바람을 탓하지 말라고 했으나 기왕에 핀 꽃인데 몇 일만 더 참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투정이 생겼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화려한 것도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게 정한 이치이련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딱따구리가 와서 집을 짓는 소리가 들린다. 불자라면 목탁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내 귀엔 목수가 망치질하는 소리 같다. 이 적막강산에 무슨 소리가 나니 그것도 정겹다.

자연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own business 를 하는 셈인데 인간들은 거기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다. 알면서도 나 또한 같이 휘둘리고 있는 내 심사도 묘하다.

소나무 묘목 50여 그루를 심었는데 세 그루만 실패하고 나머지는 다 뿌리를 내렸다. 이젠 좀 요령이 생겨서 일도 빨라졌다. 앞으로도 계속 심어 갈 생각이지만 날이 더워지면 성공률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종종 보던 땅벌이 뒤 뜰에 생겨 났다. 내 기억으로는 ‘옷빠시’라고 부른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하교 시에 벌집을 건드려 놓고 도망가면 뒤에 오던 학생들이 벌 때문에 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던 개구장이 시절도 생각난다.

자칫 내가 인과응보로 그런 곤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벌집을 없애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가 않다. 벌이 드나드는 구멍이 여러 군데가 있는 탓이다.

건너 집이 다시 안 보일 정도로 나무의 새 잎들이 많이 피었다. 꽃 대신 새 잎들이 그 자리를 채우니 역시 봄은 채우는 계절인 것 같다. 봄이시여, 가시더라도 더디 가시라.

낙화(落花) –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인생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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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n’t tied with a bow, but it’s still a gift.
인생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지 않았을지라도 여전히 선물이다.

The Plain DealerThe Cleveland Jewish News의 칼럼니스트인 레지나 브렛(Regina Brett) 이 그녀의 칼럼에서 한 말이다. 금년 5월에 60세가 되는 사람인데 10년 전인 나이 50에 쓴 글이라 한다.

선물이란 어떤 기대치가 아니라 누구로부터 이미 받은 ‘어떤 것’을 말할 게다. 젊었을 때 아련하던 먼 훗날이 노인의 모습으로 지금 거울 앞에 서있다. 턱시도(tuxedo)에 나비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겠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성장하여 제 앞가림들을 하고 있다면 일단은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같은 형편, 같은 환경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불행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살아온 연륜이 얼마인데 회한(悔恨)인들 왜 없겠나. 그러나 그 회한이 자신을 지배한다면 이미 받은 선물의 가치를 옳게 인지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마음을 열면 우주를 다 품을 수 있으나 마음을 닫으면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다고 한다. 성화 중에 손잡이가 없는 문 밖에서 예수님이 노크하는 그림이 있다.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줘야만 한다. 그 누군가가 다름아닌 나 자신이라는 의미가 있다.

행복이라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제1인칭인 내가 되기에 그 문은 다른 사람이 열어 줄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가 아니라 당연히 내가 열어야 한다. 노년에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1) 불공평한 세상에 대하여 환멸을 느낀다.
이런 감정이 깊이 지속되면 자칫 염세주의(厭世主義)에 빠질 수 있다. 아주 먼 옛날에도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재앙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나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로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편 73:12~14)

이론상으로는 공산주의만큼 멋진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본성을 떼어 놓고 이론만을 나열한 탓이다. 세상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또 미래에도 그 불공평한 것은 지속 될 것이다. 그 짐을 내려 놓으시라.

2)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지 마시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3) 먼저 자신을 용서 하시라. 거기엔 과거도 있겠고 현재도 있다. 그래야 남을 용서할 수 있다. 연극에서 1막, 2막이 있듯이 인생 역시 단원을 매기면 새로운 시도가 훨씬 용이하다.

4) 모든 논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5) 행복해지는 것은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6) 인생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주술처럼 외우시라. 그걸 다른 말로는 희망이라 한다.

7) 인생을 분석하지 마시라. 인생은 학문처럼 단순 명료한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받아 드리고 형편에 따른 대응이 최선이다.

8) 자신의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믿을만한 친구 한 명은 꼭 필요하다. 그 친구가 의사보다 더 많은 치료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 중 95%가 실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노인들 대부분은 신체의 병보다 치매에 대하여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 같다. 치매는 전체 노인들 중에서 20%가 걸리게 된다고 한다. 다른 병에 비하여 비율이 높은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치매도 이쁜 치매, 미운 치매로 분류를 하는 것 같다. 위의 몇 가지만 해결을 해도 최소한 미운치매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신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뛰어나게 똑똑한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 (唯上知與 下愚不移)
논어 양화(陽貨)편에 있는 말이다. 자신이 아주 똑똑하거나 아주 미련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은 세상사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선물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그게 인생이다.
4/15/16 cane0913@hanmail.net

죠지아 주에서의 상춘(賞春).

pine pollen Ga

송화(松花)는 다식(茶食)이 연상되었는데 소나무가 많은 죠지아에 와서 살다 보니 송화가 봄인듯하다. 호수나 차들이 온통 송화 가루로 노란색이 되어 버리고, 어떤 땐 산불이 나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처럼 바람에 송화가루가 날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송화가루는 꽃가루 알러지를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남성 호르몬에 좋다 하여 Pine Pollen Powder를 1온스에 45불씩 주고 사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근력이 딸리면 그걸 돈 주고 살 필요 없이 산에 가서 송화가루를 털어다가 먹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진시황이 그것을 알았었다면 솔밭에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50 feet 정도의 큰 나무들을 타고 올라 간 등나무 넝쿨이 퍼플(Purple)색 꽃들을 길게 늘어트리며 피워서 그만한 장관도 없다.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넝쿨식물은 타고 올라간 나무를 죽이기 때문에 우리 산에서는 보는 즉시 처리를 해서 그런 게 없다.

넝쿨식물은 땅에서는 꽃을 피울 수가 없다. 그래서 옆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못하면 지들끼리 줄기 몇 개가 어울려서 새끼 꼬듯이 올라가면서 기둥을 만든다. 그곳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갈등(葛藤)의 의미와는 다른 양상이다.

우리가 봄을 찬미(讚美)할 때 식물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햇볕을 더 많이 받으려는 지상에서의 경쟁, 양분을 더 많이 흡수하려는 뿌리들의 경쟁, 습한 땅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고 건조한 땅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다. 비옥한 땅에서 자라는 식물도 있고 박토에서만 자라는 식물도 있다.

농경(農耕)이란 사실 이런 식물의 생존경쟁에 인간이 개입하여 인위적으로 그 작물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탈피하기 위한 것이 Permaculture 운동이다.

“Permanent,” “Agriculture,”“Culture.”의 합성어로 1970년 호주의 Bill Mollison이 제창한 자연농법이다.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지형과 토질에 맞게 재배식물을 정하여 잡초 속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꿀벌을 키워서 식물의 수분(受粉)을 돕고, 대기중의 질소를 흡수하여 뿌리에 저장하는 식물을 심어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옆에 있는 다른 식물에 도움을 주게 하는 식이다.

생존경쟁에서 스스로 자란 과일이나 곡식, 채소는 훨씬 더 병충해에 강하고 다양한 영양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급자족의 목적이 아니라면 소출이 적어서 사업적으로는 아직 매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상춘(賞春)을 이야기하다가 글이 딴 곳으로 흘렀지만 봄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천문학에서도 춘분의 태양각을 황도 ‘0’도로 하니 봄은 상징적인 시작뿐만이 아니라 그 실제가 시작이다.

賞春.
素石 김진우.

따사한 봄볕은 꽃을 피우고
송화 가루는 봄맞이 단장으로
호수를 노랗게 물들이는데

북풍한설(北風寒雪)이
언제였던가 기억 속에서 저무네

새로움은 늘 그러하듯이
잠자던 꿈을 다시 일으켜 세우니
이 봄 또한 그러하다.

꿈은 삶의 원동력이다. 새로 시작된 이 절기에 아름다운 꿈을 설계하셔서 금년엔 모두 소원성취 하시기를 빌어 본다. 4/3/16  cane0913@hanmail.net

“무슨 사연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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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좀 쌀쌀한 날, 미 동북부에 있는 케이프 캇 해변의 언덕에 한 중년여인이 꽤 오랜 시간을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한 노신사가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가 꼭 자기 자신과 같다고 했다. 세파에 밀려서 부딪치고 깨지는 것은 늘 자기자신인데 바위는 언제나 멀쩡하다는 말이었다. ‘죽는 파도’ 그걸 카운트하고 있었다고 한다.

노신사는 우리의 손이나 발을 그 사람이라 아니하듯이 파도 역시 바다의 일부분이니 당신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라고 했다. 바다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면서 아래 해변에 펼쳐진 조약돌들이 바위에서 얻은 바다의 전리품(戰利品)이라 했다.

위 내용은 우울증환자의 투병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환자는 노신사와의 짧은 대화에서 얻은 발상의 전환으로 병을 털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땐 사소한 말에서도 힘을 얻게 된다.

위에 등장한 노신사, 적절한 비유로서 남을 위로할 줄도 알고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도 있다. 그건 어느 책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경륜에서 쌓여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늙는 과정에서 얻은 소득이다. 옛날 군인들이 길을 잃었을 땐 늙은 말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그 말을 따라가면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고령인구가 늘다 보니 노인문제가 이슈화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옛날에도 고려장 이야기가 있었으며 불효자는 공자시대에도 있었다. 그러기에 공자가 효(孝)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주장을 하였을 테니 말이다.

한국정부의 노인정책은 미국의 노인정책보다 우월하다. 문제는 실버산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전혀 전문적이 아닌 게 문제이다. 지식이 없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도 아니다.

요양병원에서 환자가 넘어지면 뼈가 부러진다고 환자를 묶어 놓는다고 한다. 넘어져서 뼈가 부러질 확률이 50%라면 묶어 놔서 생기는 근육손실은 100%이다.

죽은 것처럼 곤히 자는 사람도 수십 번을 뒤척이며 잠을 잔다. 몸의 혈행(血行)을 위한 인체의 반응이다. 한 환자의 아들이 쓴 글에 요양병원에서 모친을 묶어 놔서 수저도 못 들던 모친이 요양원으로 옮긴 후 수저도 들 수 있고 부축하여 산책도 한다고 했다.

사람을 묶어 놓는 건 물리적인 것 이상으로 정신적인 상처가 된다. 아무리 정신 줄을 놓았다 해도 자신이 묶여 있는 것은 안다. 단순히 병원이 편하자고 환자를 묶어 놓는 것이다.

행여 요양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경우,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묶어 놓지 말라고 계약서에 쓰시라.

박완서의 ‘황혼’은 1979년, 저자의 나이 40대에 발표한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에 시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며느리가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 하면서 ‘늙은 여자’라고 해서 스스로 그냥 늙은 여자로 화자(話者)가 되어 나온다. 그 늙은 여자는 며느리를 ‘젊은 여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러나 늙은 여자는 지금 정말 불쌍한 건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임을 깨닫는다.” 이 대목이 그 소설의 핵심이고 결론일 것이다.

시집살이가 고초당초보다 더 맵다고 하던 시절에도 그 소설 속의 ‘늙은 여자’는 명치 밑이 아팠었다. 노년의 소외감 탓이다. 소외감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기에 그걸 요리할 줄 아는 게 노인의 지혜일 것이다.

인터넷에 곱게 늙기 위한 좋은 글들이 많다. 그러나 처지와 형편이 각기 다르고 또 늙어서 갑자기 신선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젊은 시절의 고독이 문학적이라면 노년의 고독은 현실이다. 노년에는 굳이 논리적이거나 이상적인 화두가 필요한 건 아니다. 함께 자리하여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만으로도 족한 경우가 많다.

우선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요령을 터득하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미국에서 한인들이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분해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살펴보면 그 상대는 유색인종에게뿐 만이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똑같이 무례한 행동을 한다. 그럴 때 조언해 주는 말이 “Don’t take it personally” 이다. ‘그 사람이 (옳지는 않지만) 당신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 때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로 치환을 하다 보면 저 사람이 뭔가 나 아닌 다른 원인에서 기분이 상했구나 정도가 될 수 있다. 즉 3자적인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생엔 정답이 없다는데 나 역시 탁상공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때로는 내가 써먹는 요령이다.

어느 날 문득 노래의 가사가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갈급할 때 성구 한 구절이 심령을 흔들어서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도 있고, 법화경(法華經)의 한 소절에서 답을 얻어 불자(佛子)가 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종교는 논리가 아니라 체험이라고 한다.

오늘 이곳엔 비가 내린다. 그 우중에서도 꽃들은 여전히 미소를 보내고 있으니 그것도 배울만하지 않은가?  4/1/16  cane0913@hanmail.net

Lincolns Lament-Michael Hop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