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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이 문제라면, 당신네 개미허리는?”

<지기자의文史雜記>

"전족이 문제라면, 당신네 개미허리는?"/200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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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하는 여성들이 신었던 신발인 궁혜>

지금으로부터100년전인 1907년 1월6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청(淸) 나라 정부의 ‘전족(纏足) 금지령’을 보도했다.

금지령 자체는 1906년초 정식으로 반포됐지만, 미국 신문이 이를1년 뒤 보도한 것이다.

당시청조는 여러차례 전족을 금지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 실권자인자희태후(서태후)는1901년 조령(懿旨/의지)를 발표해 전족을 금하도록했고, 이어1905년 개혁정책 속에도이를 포함시켰으나, 1천년이 넘는 오래된 풍속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1906년 광서제는 법률을 반포해전족을 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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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을 금한 서태후>

뉴욕타임스는 기사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수천년간 중국의 부녀자들이 이러한 관습에 젖었는데, 갑자기 법률을 정하면주민들의 저항으로 오히려 사회적 혼란만 초래하지 않겠는가. 만약 미국의 국회가미국 여성들이 가슴과 허리를 졸라매는 것을 못하게법으로 정한다면 유행을좇아가는 여성들이 그런 것을 갑자기 그만두겠는가. 그런데 청 황제는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광서제)는 전족금지령과 함께 또하나의 법령을 반포했는데, ‘아내와 딸 중에전족을 한 사람이 있으면청나라 관리로 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전족은,오대 남당(南唐)의 마지막 왕인 이욱(李煜 937~978)이 궁녀들이 싣는 가죽신발(宮鞋)에 유별나게 집착하는 성 도착증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음악과 시에 능한 이욱은예낭이라는 궁녀가 발을 비단으로 싸고 금으로 만든 연꽃대에서 춤추는 것을 즐겼다. 조그만신발을 신고 몸을 사뿐사뿐 움직이며 춤추는 것을 요염하게 본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작은 발을 금련(金蓮/금으로 된 연꽃)이라 불렀다. 중국의 고대소설 금병매에 등장하는 ‘반금련’의 ‘금련’도 여기서 따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발이 10센티 이상 자라지 않도록 유아 때부터 싸맸다. 성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커가는 발가락은 거꾸로 발바닥쪽으로 파고들어, 겉보기에는 작고 앙증스럽지만, 실은 본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기형의 발이 되고 마는것이다. 1천년간 중국 여성들은 이 남성본위의 ‘성 도착적 관습’으로 고통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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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걸어가는 청대의 여성>

이 전족이 서방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1888년 청나라에 온 미국의 여의사 헤이들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서태후와 한 공사 부인간의 대화를 실었다.

"중국인들의 발 문제와 관련해서양인들은 우리를 아주 우습게 보는 모양입니다."<공사 부인>

"서양인들도 그에 못지않은풍습이 있던데 뭘. 나는 서양 여자들이 어떻게 허리를 잘룩하게 잡아매는지 자세히 보고싶어."<서태후>

한번은 영국의 기자가 청말기 영국유학 경험이 있는관리 구홍밍(辜鴻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족을 한 중국 여성들이 100파운드(약 45kg)의 몸무게를 작은 발에 집중하는 것은 인간의 생리에 거스러는것 아닌가?"

이에 구홍밍은 이렇게 받아쳤다.

"영국 여성들이 허리를 꿀벌의 허리(蜂腰/한국말로 하면 개미허리) 처럼 싸두른 것은 생리상 기형을 만드는 것 아닌가?"

서태후와 구홍밍 모두 전족의 문제점은 알고 있었지만, ‘오랑캐’인 서양인들로부터 지적당하는 것은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서태후는 자신이 돈을 내 여학교를 세웠는데, 거기서도 전족을 한 여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청나라를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 서태후지만, ‘전족’을 금지시키는데는 꽤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1백년전까지도 ‘전족’으로 상징되는 오랜차별적 관습에 울어야 했던중국 여성들은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남녀평등을 구가하고 있다. 정부 각부처에 여성 간부의 비율이 한국이나 일본보다 중국이 높다.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은유교적 남녀차별 의식을한꺼번에 무너뜨렸고, ‘여성은 세상의 절반’이라는 마오쩌뚱의 구호는이를 가속시켰다. 중국이경제개발면에서는 비록 아시아 주변국들보다 뒤졌다고 하지만,훨씬 개방적인 남녀평등 의식은여성인력 활용면에서 한국-일본을 앞설 가능성이 높다.그런 점에서 중국의 잠재력은매우 크다.

재미있는 현상은 전족으로 여자들의 발을 잡아맸던 중국이 지금은세계최대의 신발생산국이며 수출국이란 점이다.

역사는 생각보다 빨리 변한다./ hbjee@chosun.com

2 Comments

  1. 세계인

    2008년 2월 14일 at 2:51 오후

    전족을 중국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생각해봅니다. 중국사회에서 예쁘고 재능이 있으면 춤과 노래를 가르쳤고 아니면 농업이나 실용기술을 가르쳤슴니다. 전족도 노동에 종사하지않는 부류(기생은 일부분이며 부자나 상류층으로 보아야 함)에게 적용되었으며 예술, 사교, 안주인 역활을 했지요. 아마 성적인 매력도 중요했겠지요. 좋은 쇠는 못을 만들지않고 좋은 남자는 군인을 많들지않는다는 사고와 비슷합니다.

    전족을 한 여자는 걸을 수 없고 노동에 종사하지 않슴니다. 이러다보니 전족이 퍼졌으며 전족이 없어진 지금도 농촌에서 한족여자들은 집에서 빈둥거리며 남편을 부리는 사고가 있는 것 같슴니다. 전족조차 못해 여자가 노동을 하면 남자의 체면이 손상되는 엣날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청시대에서도 한족의 습관이 만주여자들에게 옮겨오자 지속적으로 만주여자의 전족 금지령을 내림니다. 말씀하시는 서태후시대는 이미 한족과 만주족의 경계가 많이 엷어진 시대입니다. 저는 전족은 없어졌지만 전족으로 형성된 사고방식은 아직도 중국인들에게 많이 남아있다 생각을 합니다.   

  2. 지해범

    2008년 2월 14일 at 3:32 오후

    전족으로 형성된 사고방식이 지금의 중국인들에게 남아있다는 지적은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어떤 부분에 어떤 형태로 남아있다고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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