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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수요일에 제임스 케힐(James Cahill)을 인터뷰했습니다.

케힐이 누구냐고요?

이 분이 국제 심포지움에 참가차 방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 약속을 잡고난 후까지가장 걱정했던 게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신 분이더라도

일반 대중들이 관심을 갖기에는 어려운 분들을 인터뷰하게 될 때

늘상 하게 되는 고민이지요.

나만 이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아니면 독자들도 관심이 있을까?

기사를 실컷 써 놓았는데

사내(社內)에서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이러면

애써 해 놓은 인터뷰가 물거품이 되거든요.

특히나 ‘학자’같은 경우가 더욱 그렇지요.

보통 학자라고 하면 어렵고 따분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제임스 케힐은 미국 U.C.버클리대 명예교수로

중국회화사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올해 82세이구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사진은 이렇습니다.

jamesphotobig_596[1].jpg

이 분은 34세 때인 1960년 스위스의 한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중국 회화사(Chinese Paintings)’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책이 세계 곳곳에서 번역돼 출간되면서

중국 회화사 개설서의 고전으로 자리잡아버렸거든요.

사람들이 서양의 인상파 그림에는 열광하면서도

중국회화, 혹은 동양화 하면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왠지 관제(製) 같고, 틀에 박힌 것 같고, 어렵고….

중국 회화에 대한 저의 인식을 깡그리 바꿔준 것이

바로 케힐의 이 책,

‘중국회화사’입니다.

P081020002[1].jpg

(제가 소장하고 있는 케힐의 ‘중국회화사’입니다.근 10년 전에 산 책인데

‘열화당이 세기말에 드리는 사은 대잔치 정가의 50%’라는 빨간 딱지가 선명하군요 ㅋ)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지요

무엇보다도

‘역사책’을 숫자가 난무하는 연대기에서 벗어나

굉장히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중국 그림이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케힐은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피상적 의미에서는 송나라와 그 후대의 중국회화에서 인간이 지배적 테마는 아니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 따져 본다면 인간이 그 중심이었다.

인간은 그림 속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양식상 그의 존재를 흔히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느끼게 한다. 더욱이 중국인들이 회화에 부여하는 가치는 인간적 가치이다"

이 얼마나 인문학자다운 문장입니까?

여튼,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고 저 혼자 설렜습니다.

물론 약간 부담이 되기도 했지요.

무엇보다도 워낙 대가(大家)였고,

그리고 통역이 없었다는 게…. -_-;; 하하.

통역이 없는 건 왕왕 있는 일인데..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영어를 할 줄은 알지만 당신은 한국말을 하나도 모른다.

고로 내가 당신보다 우월하다.

나, 한국어로 한국 신문에 글 쓰는 한국 기자다.

영어 못한다고 해서 창피해 할 필요 없다.

네, 그 날도 그런 배짱을 가지고 겁없이 인터뷰하러 갔습니다.

전날에케힐에 대한 자료를읽어보았더니

얘기 되는(기사 되는) 건 딱 두 가지더군요.

케힐이 1940년대 후반 한국에서 군복무했다는 거랑,

중국회화사 책 세계적으로 히트친 거.

외국인을 인터뷰할 경우

그 사람이 한국과의 인연이 깊으면 기사 가치가 커집니다.

독자들이 더 관심을 가지니까요.

그리고 케힐이 어쨌든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중국회화사 책을 통해서니까…

그 두가지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대강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1. 왜 서양인인데 중국 그림을 공부하게 되셨나요?

2. 한국 군복무의 추억은?

3. 30대 때 쓴 책으로 스타가 됐는데 지금도 그 책에 만족하세요?

4. 좋아하는 중국 화가는 누구인가요?

5.좋아하는 한국 화가는 누구인가요?

…….무지 유치하지요?

원래 인터뷰 질문이라는 게 재미삼아 하는 백문백답 수준을 못 벗어납니다.

1번은 제가 인터뷰할 때마다 항상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한 인간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가 항상 궁금하거든요.

이 질문을 할 때마다 저는 6하원칙 중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그 맨 마지막에 있는 why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번 질문은 제가 정말 궁금해서 넣은 질문입니다.

80 넘은 노학자는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30대 때의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요?

혹 무지 부끄러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제가 초년병 때 쓴 기사 보면 엄청나게 창피하거든요.. -_-;;

4번은 미술사에 일가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5번은 미술사를거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넣었습니다.

요즘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 덕에 신윤복이 한창 인기니

만약 케힐이 신윤복을 알면 그 얘기를 섞어서 쓰면

가독성 있고 재미있는 인터뷰가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결전의 그날,

호텔방에서 만난 케힐은 부축을 받아야만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노인이었습니다.

가는 귀가 먹어서 보청기를 사용해야만 했는데

다행히도 엉망인 제 영어는 잘 알아들으시더군요.

자리에 앉자마자

1번 질문을 던졌지요.

사실 가면서까지 걱정했습니다.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면 기사 안 되는데….

만일 1번 질문에…

"나는 그림이라는 존재가 내뿜는 심오한 힘에 운명적으로 이끌렸어요…."

…….이렇게 답하면…

정말 재미없잖아요… -_-;;

그런데 이 할아버지,

"어? 너 통역인 줄 알았더니 인터뷰어였어?"

하더니만 단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응. 내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에 있었거든.

반도호텔이라는데 머물면서 일본어 통역병으로 군복무를 했어.

당시 나는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있었는데,

어느날 골동품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그림 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샀어….

그 중 산수화 하나랑 화조화 하나에 낙관이 있길래 사전을 찾아봤더니

조천리(趙千理)랑 이도(李道)라고, 송나라 때 유명한 화가 거더라고.

그게 계기가 돼서 나중에 미국에 돌아가서 중국 회화 공부를 하게 됐지.

근데 알고보니까 그 때 산 그 그림들 몽땅 가짜였다?"

어쩜 이렇게 기사 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만 해주시는지요…

세계적인 중국회화사 연구자를 미술사학자로 만든 게

60년 전 한국서 산 가짜 그림이라니…

정말 재밌잖아요?

보통 연세 드신 분들은 옛 추억에 젖어

회고담을 지나치게 길게 늘어놓는 경우가 많아서

시간 맞추느라 실례를 무릅쓰고말씀을 잘라야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분은 딱 간결하게, 기사되게만 말씀해주시더군요.

덕분에 2번 질문은 아예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가지고 간 ‘중국회화사’ 책을 보시더니

완전 신이 나서 "니가 그 책 읽었다니 하는 말인데, 나 그 책 덕에 유명해졌잖아.

책 나오고 나서 사람들이 나 모욕하려고 ‘소설같다’고 했는데

나 그 말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난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거든"

이러는 겁니다.

기회다, 싶어서

3번 질문을 던졌더니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나 다시는 그런 책 못 써. 지금은 훨씬 더 알고 있는 게 많은데도 말이지…

그 때 나 굉장히 어렸거든.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그런 책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

아.. 그랬구나…

대가의 이 말에 저는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저도 때때로 대학교 때 제가 썼던 레포트들을 읽어보면서

깜짝깜짝놀라곤 하거든요.

그 땐 내가 이런 생각도 할 수있었구나, 하구요.

그리고는 곧 씁쓸해지지요.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할 거라는 걸

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이가 먹고 머리가 굵어지면

생각하는 것도,표현하는 것도조심스러워지지요.

신중함은 한 편으로는 미덕입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유로운 사고를 구속한다는 점에서 해악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나머지 질문들로 돌아가자면

5번 질문은 "한국 화가들 잘 모른다"며답을 꺼리시길래

"아카데믹한 거 말고 훼이버릿한 걸로 해 주세요"라고 끈질기게 물어서

"16~17세기 조선 그림에 관심이 있고, 김홍도와 정선이 기억에 남는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신윤복을 모르시길래,

‘바람의 화원’과 연결시키려던 야심찬 계획은 물거품이… -_-;;

4번 질문에는

남송(南宋)의 하규(夏珪)를 좋아한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는 굉장한 깊이(great depth)를 가졌다"는 말과함께요.

왠지 그럴 것만 같았습니다.

하규는 문학적 감수성이풍부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화가거든요.

하규는동시대의 마원(馬遠), 마린(馬麟)과 함께

‘남송 마하파(馬夏派)’로 분류되는 화가입니다.

남송 마하파의 화풍을 일컬어 ‘남송원체(南宋院體)’ 화풍이라고 합니다.

하규도, 마원도, 마린도

선비 화가가 아니라

황제의 궁정에 있는 화원(畵院)에서 일하는 직업화가였거든요.

하규는참으로 시적이고 서정적인 풍경화를 즐겨 그렸지요.

넓은 수면과,

물 가의 집,

물위의 배,

그리고 한 점 인물.

케힐이 ‘중국회화사’에서 소개한 하규의 그림은 다음의 것입니다.

계산청원도[1].jpg

하규, ‘계산청원도(溪山淸遠圖)’ 권(卷) 부분, 타이뻬이 고궁박물원 소장.

케힐은 그의 책에서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몽롱한 분위기의 저녁 안개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둥근 돌이 있는, 여기 게재된 부분도는

아마도 마하파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걸작이라 할 수 있는 ‘계산청원도권’의 일부이다.

비단 대신 종이에 그려졌으므로 우리는 붓질의 광택을 음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암면에는 기울어진 붓으로 마른 붓질이 구사되고, 나뭇잎은 붓끝의 터럭들이 흐트러져

갈라진 붓으로 되고, 약해 보이는 다리와 외로운 나그네는 확고하기는 하나 뻣뻣하지 않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가장 높이 상찬하는 것은, 가장 엷게 퍼지는 담묵으로부터

가장 진한 농묵에까지 걸쳐 묵의 농담을 미묘하게 조절하고 있는 하규의 솜씨다."

1999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샀던 이 책의 저자를 근 10년만에 만난 저는

기념으로 책에 그의 싸인을 받아 왔습니다.

‘열화당이 세기말에 드리는 사은 대잔치, 정가의 50%’라는 빨간 딱지가 맘에 걸려서

포스트잇을 그 위에 붙여 가리느라 노심초사했습니다.

물론 케힐은 한글을 모르겠지만, 50%라는 걸 보고 눈치챌까봐요..ㅠㅠ

싸인 한 번 보실래요?

(왠지 자랑하고 싶다는.. ^^;)

P081019002[1].jpg

아,

그리고

그날, 제가 쓴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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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전(前) 서울서 산 가짜 그림이 내 인생 바꿨죠"

中 회화사 세계적 석학 제임스 케힐 교수
"34세에 낸 ‘중국회화사’ 뛰어넘는 책 아직 못 써"
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

▲ 중국 회화사 연구의 권위자인 제임스 케힐 미국 UC 버클리대 명예교수는“불화나 초 기 중국 회화보다는 사람 냄새 나는 누항의 그림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는다”고 말했 다. 이진한 기자 magnum9@chosun.com

1948년 서울, 주한미군 일본어 통역병으로 복무 중이던 22세의 UC 버클리대학생이 한 골동품 상점에 멈춰 섰다. 벽안(碧眼)의 이 청년을 사로잡은 것은 송(宋)대 유명 화가들의 낙관이 있는 풍경화와 화조화(花鳥畵). 주머니를 털어 그림을 산 청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미시간대학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 원(元)대 문인화(文人畵)에 대한 논문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중국 회화사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그림들은 몽땅 가짜였지요. 어쨌든 60년 전 서울에서 만난 그 그림들이 미술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를 미술사 연구자로 만든 계기가 되었어요."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중국 회화사 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제임스 케힐(Cahill·82) UC 버클리대 명예교수가 옛 이야기를 하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6일 열리는 한·중 회화 국제학술 심포지엄과 17일 있을 특강에 참가차 방한했다.

케힐 교수는 그림에 대한 단선적인 양식(style) 분석을 넘어서 양식이 지니는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탐구해 중국 회화사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특히 그가 34세 때인 1960년 스위스의 한 출판사에서 낸 ‘중국회화사(Chinese Painting)’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번역돼 출간되면서 중국 회화사 개설서의 고전(古典)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그는 흔히 ‘중국회화사의 곰브리치’라 불린다.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의 대가다.

젊은 학자였던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 책의 특징은 연대기 중심으로 이루어진 딱딱한 기존 역사서와는 달리 서사적이고 문학적인 문체로 쓰였다는 것. 그는 "책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소설같다’고 비판했지만 나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면서 "1948년 서울에서 그 일만 아니었으면 나는 역사가가 아니라 작가(作家)가 됐을 것"이라며 웃었다. "30대 때 쓴 책에 아직도 만족하냐고요? 그후에도 책을 냈지만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못했어요. 앞으로도 못 쓰겠죠.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요. 그때 나는 굉장히 젊었지요.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치기 어린 자부심 덕분에 그 책이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해요."

문청(文靑)답게 그는 종교화보다는 많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세속의 그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중국 화가 중에서는 서정적인 풍경화를 많이 그린 남송(南宋) 화가 하규(夏珪)를 좋아하고, 한국 화가 중에서는 조선시대의 김홍도(金弘道)와 정선(鄭敾)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특히 요즘 그의 관심사는 청(淸)대의 민화(民�). 내년에 청대의 평민들이 생활 속에서 가까이 했던 그림들에 대한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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