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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5000년 중화민족이 주도할 것이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되살아난다<上>

지해범(조선일보 논설위원 겸 동북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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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황(炎黃)과 요순(堯舜)이 고대 중국의 신선(神人)이라면, 마오쩌둥(毛澤東)은 현대 중국의 신선이다. 염황요순의 신족(神族)이 홀로 과거 오천년을 걸어왔고, 마오쩌둥의 신족이 장차 세계의 오천년을 주도할 것이다.”

성탄절인 12월25일 마오 탄생 120주년을 하루 앞두고 중국 좌파들의 천국으로 일컬어지는 오유지향(烏有之鄕ㆍ유토피아) 서점 사이트에 올라있는 글 내용이다. ‘마오쩌둥은 누구인가(毛澤東是誰?)’란 제목의 이 글을 쓴 사람은 중국예술연구원 중국문화연구소의 모루오(摩羅ㆍ52세ㆍ본명 万松生) 연구원이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 500년간 지구상에서 식민지화된 종족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모두 실패했으나 마오쩌둥이 영도한 중국만은 철저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마오의 민족만이 5천년 문명의 깊이와 부단히 이어져온 사회조직의 훈련을 통해 야만적 식민주의자들이 상상하지 못한 역량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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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毛와 여비서 張玉鳳>

마오쩌둥을 신격화한 모루오의 글은 최근 중국사회에서 결코 돌출적인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좌파 사이트 홍가회(紅歌會)에는 중국 네티즌들에 의해 9대 논객의 하나로 꼽힌 저명한 좌파학자 장홍량(張宏良) 중앙민족대학 교수의 글을 포함해 수백 편의 격문성 글이 올라있다. 장 교수는 ‘마오쩌둥 사상은 중화민족 부흥의 현명한 지혜이며 날카로운 검이다’(12월21일), ‘마오쩌둥 사상은 당(黨)의 혼이며, 군의 혼이며, 민족의 혼이다’(12월24일)‘ 같은 글을 사흘이 멀다하고 발표하고 있다.

마오 사상을 전파하는 좌파 사이트는 이 두 사이트 외에도 홍색문화망(紅色文化網), 위위곤륜망(蘶蘶昆崙網), 해강재선(海疆在線) 등 수십종에 달한다. ‘오유지향 서점’ 사이트는 그동안 좌파 지식인들의 본거지였던 오유지향 사이트가 당국의 압력으로 폐쇄되자 대타격으로 문을 연 사이트이다. 여기에는 마오연보(年譜), 마오문풍(文風), ‘중국에는 마오쩌둥이 있다(中國有个毛澤東)’ 같은 신간 소개도 수십건 올라있다. 요컨대 마오의 ‘위대한 사상’을 오늘의 중국 사회에 부활시키려는 지식인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신(新)좌파’라 부른다. 신좌파의 주요 구성원은 대학교수, 관변 연구소의 연구원, 퇴직한 공산당원, 변호사 등이다. 이들은 전체 지식인 가운데서 소수에 불과하지만 ‘공정과 분배’라는 명분을 쥐고 있어 언제든지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마오의 위상은 1981년 당의 공식평가가 내려진 뒤 오랫동안 고정돼 있었다. 공산당은 그해 여름 열린 11기 6중전회에서 오랜 토론을 거쳐 덩샤오핑(鄧小平) 주도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이 결의는 중국 혁명중 마오의 역사적 지위와 사상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문혁에 대해서는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고 명시했다. 이를 통해 덩은 마오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정리함으로써 훗날 역사논란의 여지를 막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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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치는 마오쩌둥>

그 덕분에 마오는 중국의 공식 문서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해 중국의 독립과 통일을 달성한 위대한 지도자’로 건재하다. 중국 헌법은 서문에서 ‘국내 여러 민족은 공산당의 영도하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지도하에, 인민민주 전제정치를 견지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마오 사상이란 도시 노동자 중심의 마르크스 레닌 이론을 농민이 다수인 중국 현실에 맞게 변형해 제국주의 열강과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가리킨다. 일종의 공산당 조직전략이자 전쟁 방법론이었던 그의 이론이 지금은 국가 핵심 지도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중국 청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그의 사상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학습한다.

13억 중국인은 매일 마오쩌둥을 만난다. 중국 인민폐 1위안부터 10·20·50·100위안짜리 화폐 모두에 마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하루에도 수만명이 찾는 천안문 성벽 한가운데는 365일 그의 사진이 걸려있어 지나는 사람을 내려다본다. 택시나 버스 기사들은 운전석 앞에 마오 사진을 붙여놓고 ‘무사고’와 ‘대박’을 기원한다. 소규모 점포 상인이나 식당 주인들도 가게 한편에 작은 제단을 차려놓고 관우(關羽)와 함께 마오를 재물신(財物神)으로 숭배하며 향을 올린다.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마오는 이미 사람의 경지를 뛰어넘는 ‘신선’ 같은 존재이자 서민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신통력있는 인물로 각인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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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안에서 집무를 보는 마오>

그러나 중국의 지난 30년을 냉정하게 돌아보면 ‘마오쩌둥 지우기(去毛化)’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시장경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마오가 추구했던 국유제와 균분(均分)의 이념은 크게 약화됐다. 또 2000년 들어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3개 대표이론’을 들고 나오면서 노동자·농민 중심의 공산당의 성격도 변질됐다. 이 이론은 경제발전의 주역인 사기업 경영자와 금융가 등에게 공산당 가입 자격을 준 것으로, 공산당은 이를 통해 약 5000만명의 ‘새로운 사회계층’을 지지기반으로 추가로 확보했다. 마오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더이상 공산당이 아닌 셈이다.

마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등 그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질 경우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다. 천안문 사태 당시 해외로 망명한 왕단(王丹)은 “마오 통치시기(1949~76년) 발생한 반우파투쟁과 대약진운동, 대기근, 문화혁명으로 최대 7000만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피해자 가족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마오의 위상은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또 전용열차 승무원과 공군연예단원, 여배우 등 무수한 여성들을 건드린 마오의 ‘밤생활’이 낱낱이 까발려진다면, 그에게 남아있던 중국인들의 환상도 깨질 것이다. 그동안 이와 관련해 마오 주치의 등 개인 차원의 폭로는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자료공개는 없었다. 과거사 논란을 차단하기 위한 봉인조치다./계속

4 Comments

  1. 데레사

    2014년 1월 4일 at 2:39 오전

    모택동, 옛 우리의 기억속에는 공포와 죽의장막속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지만 중국인들 중에는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은것
    같던데요.
    여기저기 사진도 많이 걸려 있고, 또 사진을 많이 팔기도 하고요.

    중국은 더 이상 공산당이 아닌것 같기도 하고 공산당인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해서요. ㅎ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 만추

    2014년 1월 4일 at 7:18 오후

    털을 제거해.    

  3. 지해범

    2014년 1월 5일 at 9:12 오후

    데레사님,
    중국이 어디로 갈지 저도 궁금합니다. ㅎㅎ   

  4. 지해범

    2014년 1월 5일 at 9:13 오후

    털은 뽑혔고 자국이 남아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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