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바다는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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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각 앞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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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암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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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암각시문

–  우암 송시열의 「암각시문」-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떠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쫒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으리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밖에
담비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 이 바위에 씌어진 시문은 조선 인조 ~ 숙종때의 대 정치가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사망하던 해(숙종15년,1689)에 지었다.
숙종14년 10월 희빈 장씨가 왕자(경종)를 출생하자 숙종은 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 정월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고 종묘사직에 고(告)했는데, 우암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우암을 태운 배가 백도 부근을 지나던 중 풍랑을 만나 며칠간 머무르면서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심경을 읊었다.
결국 우암은 그 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올라가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여든 셋이었다.
( 위 내용은 보길도 소재 우암 송시열의 「암각시문」 안내문에서 옮김) ]

고산 윤선도의 낙서재(樂書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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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재(樂書齋)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1637(인조 15)에 들어와
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처음에는 모옥(茅屋)으로 지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에 의해 와가(瓦家)로 바뀜.
( 모옥(茅屋) : 띠나 이엉 따위로 만든 집 )

더 많은 자료는 블로그에 있습니다 ^&^ ㅡ>>      http://blog.naver.com/anwjdanwjd

은빛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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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漁父歌)

                                                            이현보(李賢輔) 作

이 듕에 시름 업스니 어부(漁父)의 생애이로다
일엽편주(一葉扁舟)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 두고
인세(人世)를 다 니젯거니 날 가난 줄를 알랴

(현대역)

이러한 생활 속에 근심 걱정할 것 없으니 어부의 생활이 최고로다.
조그마한 쪽배를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띄워 두고
인간 세사를 잊었거니 세월 가는 줄을 알랴.

이현보(李賢輔
조선 중종 때의 문신(1467~1555). 만년에 고향으로 은퇴하여 시가를 읊조리며 생활하였다.

나 어렸을 적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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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심기 어린이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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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새참 어린이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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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리개질 어린이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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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들나가기. 3,4,5> 모내기. 6> 새참. 7,8> 김매기.
9,10> 보리타작(도리깨질). 11,12> 자리개질. 13> 농악놀이.

1970년대 이전에는 이렇게 모심기와 보리타작을 했습니다.
세월이 불과 50여년 지났것만, 이제 이런 모습이 전설로 되었습니다.
‘장뜰두레놀이 보존회’에서는 이 전통을 계승하고자 해마다 증평 들노래 축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