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초록의 슬픔, 레이크 루이즈

로키산의보석이라는레이크루이즈.
원래이호수는에메랄드호수라고불렸었는데,
1884년,
영국빅토리아여왕의4째딸루이즈공주의이름을따서
레이크루이즈라고다시명명되었다.
그러나루이즈공주는평생그곳엘한번도안다녀갔다.

캐나디안로키에는영국왕실의이름이많이붙어져있다.
빅토리아빙하와산은빅토리아여왕의이름에서,
지금의알버타주는여왕의남편알버트공을기념하며,
(캐나다서북쪽의이땅에새로운주이름을붙여주는과정에서

사람들이루이즈공주의이름을따서’루이즈주’로명명하자고하자,
공주는자기의성인알버타,즉아버지알버트공으로부터받은이름을쓰도록간청해서

아버지알버트공을기념했다고한다.)

레이크루이즈도공주의이름을따서지었다.

카나타(Kanata)라는말은원주민인디안의말로마을(village)이라는뜻인데,

‘여기는우리땅’이라는의미도내포하고있다고한다.다행이,

나라이름은원주민이름인’캐나다’로남았지만
그원주민을다쫓아내고이곳저곳에자기들이름을대신붙인것이니
당시막강했던영국,백인들의세력을엿볼수있다.

루이스공주는1871년론후작(MarquisofLorne)과결혼했다.
당시영국왕실은유럽의여러왕가와혼인을해왔는데,
300년만에그전통을깨고왕실간의결혼이아닌영국귀족과결혼을해서
대단한화제가되었었다.
처음에는많은반대가있었지만,

어머니인빅토리아여왕과당시재상디즈레일리가이결혼을밀어줬다.
빅토리아여왕은내심썩어빠진유럽왕실을혐오하고있었다고한다.

약혼사진(그림?)

루이스공주는회화와조각을,남편론후작은시와문학을좋아했다고한다.
어떤면으로보나론후작은완벽한영국신사였다고하니,
외견상둘은잘어울릴듯했으나그리하지못했다.
그러다가
론후작이33세가되던1888년,4대총독으로캐나다에부임하게되자
사람들은이들부부의관계가좋아질것으로기대했으나,
루이즈공주가썰매사고로부상을당해영국으로돌아가는바람에
그들은다시별거하게되었다.
그후,공주는남편의임기5년의절반도캐나다에살지를않았다고한다.

레이크루이즈에있는페어몬트호텔간판

당시,

루이즈공주와캐나다언론은사이가좋지않았다.

루이즈공주가캐나다를좋아하지않는다는여론도있었으나,
말하기좋아하는사람들은그이유를
공주가영국과캐나다양쪽에남자를두고있어서그런것이라고도쑤군대기도했다.

페어몬트호텔내부

공주는어려서부터자유로운사고를가졌었고,결혼하기전에도로맨스가있었다.

그러나,

런던으로돌아간공주는자신의재능인그림과조각에몰두하면서

왕실조각가죠셉경(SirJosepy)에게조각을배우기시작했는데,

왕실에스튜디오까지마련할정도로열심이었다.

그러던어느날갑자기

조셉경은스튜디오에서공주의팔에안겨서숨을거뒀다.
사망원인은추측만난무할뿐기록에남아있지않다.

공주의남편론후작도주위에친구가많았다.대부분남자친구들.
그는동성애자였던것이다.

론후작은공주에게’나를좀이해해달라’고했으나
공주는동성애자남편을기피했다고한다.
그래서이들부부를
‘둘다남자의품에서위안을찾고싶은사람들’이라고비아냥거리기도했다.

미망인루이즈공주

임신을못하는공주와동성애자남편.
그러나그들은죽을때까지부부로남았다.
노후에치매가된남편을공주는잘돌봤다고기록되어있다.
노후의관계는훨씬좋았다고한다.

론후작은68세에폐렴으로세상을떠났다.

루이즈공주는2차대전이한창이었던1939년91세로세상을떠났다.

전쟁통이라서화장을해왕실납골당에안장했다고한다.

두부부는자신들의관심사였던인문,과학,예술분야를살려
왕립캐나다미술학교(RoyalCanadianAcademyofArts),
캐나다국립미술관(NationalGalleryofCanada)등의설립에초석을놓았다.

레이크루이즈배경에는세개의산봉우리가있다.
아버딘(Aberdeen)산.만년설봉우리르프로이(Lefroy),
그리고가운데뒤쪽으로넓게버티고있는빙하덮인빅토리아산이다.
그산들의품에안긴레이크루이즈,

에메랄드의도도한신비로움을뽐내고있지만
알고보면
자기에게이름을남겨준공주를한번도만나보지못한채
한없이깊은초록외로움에잠겨있는것이다.

루이즈공주처럼…

참고:구글,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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