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한 한인 여성의 미국 대학 졸업 축사
미국은바야흐로졸업시즌이다.

각급학교졸업식이있고,유명인사들의졸업축사가미디어에오른다.

나의친구최임자,

그녀는지난겨울2014,펜실바니아주립대애빙톤(PennStateAvington)졸업식에서

영광스럽게도졸업축사를했다.

그녀가자랑스럽다.

(아래는그녀의영어축사를번역한것이다.)

졸업식축사사진을블로그에옮길수없어이사진으로대신한다.

펜실바니아주립대애빙돈(PennStateAvington)2014가을졸업식축사

20141219

최임자

존경하옵는총장님과교수님들,그리고귀빈여러분,반갑습니다.

그리고졸업생과가족,친지분들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저는1971년대학을졸업하자마자단돈15불을들고미국에왔습니다.

그런제가오늘영광스럽게도자리에섰습니다.

그때,한국에서미국쌘프란시스코로가는비행기를탔는데

중간에일본동경공항에서세시간을기다리게되었지요.

기다리는동안저는6불짜리선글래스를샀습니다.당시가진재산이15불인데말이지요.

.그랬습니다.기막힌투자였습니다.왜냐구요?

방년22아가씨의주머니속에15불이있으나9불이있으나무슨차이가있었겠어요?

아가씨에게는근사한썬글라스를끼고멋지게보이는것이

훨씬중요한투자가아니었겠어요?

70년대초반의한국에서는

가난한젊은여성이,그것도영어전공자도아닌한국문학전공자가

미국에가겠다는꿈을꾸는것은엉뚱한일이었지요.

그렇지만저는낙천가였고특히뜻이있는곳에길이있다라는믿음이있었습니다.

그래서대학3학년부터상업영어강의를듣기시작했습니다.

편으로는미국평화봉사단원에게영어회화지도를받아가면서

학비마련을위해아르바이트도열심히했지요.

혹시라도미국에기회가온다면기회를잡기위해서였습니다.

대학졸업직전에드디어기회가왔습니다.

당시한국의유일한영자신문인코리아헤럴드에구인광고가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있는어떤무역회사에서

한국과의무역업무를도울직원명을구한다는광고였습니다.

치열한경쟁이있었지만제가뽑혔습니다.

하지만유감스럽게도저는무역회사에7개월정도근무하고

남편()따라필라델피아로와서1972결혼하게되었습니다.

,

저는펜실바니아의몽고메리카운티에정착하여자녀를키웠습니다.

부동산중개업을하면서지역봉사활동으로한국여성의핫라인에도참여하게되었습니다.

일을하며저는이중언어를구사하는여성변호사가되어

가정폭력으로고통받는한국여성들을돕고싶었습니다.

법과대학진학을고려하던중,저는20묵은한국의고려대학교학사학위로도

미국의법과대학원에진학하는것이가능하다는것을알게되었지요.

그래서법과대학원을가기로결심했지요.

LSAT(법대입학국가고시)시험을번이나치뤘지만

펜실바니아의템플대학교법과대학원입학허가를받기엔성적이모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때법대에낙방한것이얼마나다행인지요!제가아니라도

지금이지역에는한국인1.5,2세등의훌륭한번호사들이많이배출되어있습니다.

2014기준으로스무명이넘는한국계변호사가필라델피아한인업소록에기재되어있지요.

그리고저는2010년부터템플대법대출신변호사를

저희센터의부원장으로모시고함께일하고있습니다.

변호사의꿈을접은후,

저는나이마흔넷에유펜대학교(UniversityofPennsylvania)석사과정에입학하여

조직역학을공부,5년만에학위를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학위는살아가는데신용보증서가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배운지식과학위도중요하지만

실제삶에서는사람들과의인맥형성이훨씬중요하다는것을

경험을통해깨닿되었습니다.

여러분이아는가못지않게누구를아는가중요하다는말이지요.

그러면같은사람이어떻게많은사람들을알게되었냐구요?

과외활동(specialcurricularactivity)을통해서입니다!

별것아니라고생각하는과외활동인생에있어서변화를만들어내는겁니다.

여러분,

아직직장을구했으면우선봉사활동이나무슨일이라도시작해보세요.

교회도좋고,정당사무소나어떤곳에서든지인턴자리부터찾아보세요.

편한곳만둘러보지말고너머로시야를넓히세요.

그리고

현재좋은직장을가지고있더라도

작은지역봉사활동은여러분의경력을더욱빛나게것입니다.

여러분께드릴조언은자신감을가지라는것입니다.

어려운일이닥쳐도꿋꿋이버텨내세요.

어떤조직안에서살아남는쉽지는않지요.

사실대부분의젊은이들이봉사활동을시도하고나서그냥주저앉습니다.

텃세같은것도있고,과중한시간과노력부담이많아져힘들어지기때문이지요.

경우는달랐습니다.

그룹안에서아무도존재따위에는관심조차없었습니다.

제가봉사했던카운티여성회(CountyWonen’sCommission)

공화당여성위원회(RepublicanPartyWomen’sCouncil)에서

제가그구릅의일원이라고느끼게때까지거의10가까이걸렸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지도층에서저를눈여겨보기시작했습니다.

제가흔치않은소수아시아계여성에다

유펜대학교의석사학위까지있다는것을알게것이지요.

그래서1999초봄,

저는몽고메리카운티의중요직에후보로출마해달라는부탁을받았습니다.

그것이비록공화당의표심잡기위한구색갖추기작전일부라했어도

저에게는떨어진다해도잃을것이별로없었습니다.

선거에서는졌지요.

하지만경험을통해아주많은사람들을알게되었습니다.

,저는전혀다른용도로인맥을활용하게됩니.

2002친정어머니가암에걸렸습니다.

저는하던일을접고7개월동안어머니병수발을들었습니다.그때,

언어장벽이있는한인노인을위한가정간호시스템이절실히필요하다고느꼈습니다.

그러나당시에는그런시설이거의전무한상태였지요.

그래서저는아시안노인들을위한

비영리가정간호시설을하나시작해보겠다고마음먹었습니다.

시작을하기위한종잣돈이필요했지요.그래서,

과외활동알던인맥몇몇사람에게연락해서종잣돈을애기결과

놀랍게도뿐만아니라사무실공간,훈련시설,그리고가르칠선생까지해결되었습니다.

,

팬아시안노인복지센터,2014년새로옮긴건물이다.

그래서2005저는펜아시안노인복지원(PennAsianSeniorServices,PASSi)열게되었고,

9동안저의모든열정을쏟아부었습니다.

이제펜아시안노인복지원은500여명의연로하신이민자들에게

11언어로서비스하고있습니다.아시아계노인들도18퍼센트나되지요.

회사직원도480명이나되고요.

20141뉴욕타임즈는저희노인복지원을업계의모범적인혁신가로크게소개했고,

AARP잡지는201411월호에저의성공사례기사를실었습니다.

이건제가여러분에게자랑하려고하는이야기가아닙니다.

아시안이민여성이무언가를이루고자걸었던여정을

여러분과함께나누고싶은것입니다.

오늘은여러분의날입니다.

여러분모두는이제펜실바니아주립대졸업장을갖되었습니다.

학위하나만으로도여러분은이미나은위치에올라섰습니다.

열정대로따라가세요!

자신감을가지고무슨일에든지최선을하십시오!

성공은대개여러시련끝에찾아오기마련이지만,그러나명심하십시오,

뜻이있는곳에길이있다것을!

여러분의미래에성공이이루어지기를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