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요사에큰족적을남긴가황歌皇남인수南仁樹선생은1918년10월18일경남진주시하촌동194번지(속칭’드무실’)에서태어났다.본명은강문수였지만최창수라는아명兒名이있었다.이를두고경주최씨였던선생이어머니장하방여사가부친사후진주강씨에게개가하여이름을바꾸었다는얘기도있다.
선생은진주제2공립심상소학교(현봉래초등학교)를졸업했는데,내초등학교선배이기도하다.
선생은1938년21세때’눈물의해협’이란노래로데뷔했고1938년’애수의소야곡’이크게힛트하면서독보적인가수의길을걷게되었다.선생은당시가요계의큰별이었던현인선생과쌍벽을이루며서민들에게타고난미성美聲으로명가요들을선물했다.’이별의부산정거장’을비롯한주옥과도같은노래들로후세에’가황’이란칭호를얻었다.
선생은1962년6월26일45세의한창나이에폐결핵으로서울백병원에서타계했다.
고향진주에서는1996년부터2008년까지’남인수가요제’를열어선생을기렸지만,일제강점기당시강압에못이겨친일가요몇곡부른게’친일파’로낙인찍혀가요제는중단되었다.
다만,진주진양호에선생의동상과노래비가세워져있다.참으로안타까운일이다.
남인수선생을생각하며추억한토막.
내가봉래초등학교를다닐때인50년대중반선생의자택이학교부근에있었다.교문에서내려와(봉래는계단을한참올라가야운동장이나오고,운동장에서계단을한참올라가야교실이있었다)백미터정도직진하면작은네거리남쪽오른편에아담한양옥집이선생의자택이었다.
자녀는아들둘,딸둘로넷이었고,큰딸명자씨가나와같은학년이었던걸로기억한다.
진주출신으로유명한가요작곡가들이있다.
이재호,손목인,이봉조,정민섭선생등이있지만그분들이만든고향의노래는별로기억에없다.
그래서가황의망향가’내고장진주’가더가슴속에사무치는지도모르겠다.
윗사진은촉석루를배경으로남강변에서찍은사진(남인수선생은왼쪽끝인듯),아래사진은’황성옛터’를부르는선생의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