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전’어버이날’이지나고오늘교회에서’어버이주일’을보내고나니문득두분의어머님이떠오른다.
한분은나를낳으신육신의어머니이고,또한분은아내를낳으신장모님(평소에는’병모님’이라고불렀다)이시다.
두분모두내겐잊을수없는어머님들이시다.
육신의어머님은팔십평생을함께하셨고,병모님은삼십여년을모셨다.
어머님은당신의말씀처럼열여덟꽃다운나이에시집오셔서시부모님과독자이신아버님,다섯의시누이와사셨다.
어렸을때본어머님은항상일에파묻혀사셨다.성질이급하신할아버지를잘도모시고조석간더운진지를지어드렸었다.유난히술을좋아하셨던할아버지는꼭아침해장술을하셨다.아침여섯시쯤일어나신할아버지께서’에헴’하고잔기침을하시면오분안에술상을봐올렸다.겨울이면따끈한정종반주전자에대구구이나가오리무침을올렸다.여름이면막걸리에고추전같은부침개를올렸다.
만일일분이라도늦었다간그날아침집안공기는할아버지의’쎄(혀,舌)차는’소리로싸늘했었다.
그뿐아니다.여름이면할아버지의무명이나삼베옷을매일같이빨래하고다리미질까지해서아침마다새옷으로드렸다.저녁마다숯을피운다리미질을했는데,그때마다내가한쪽에서빨래를잡아주는어려움을겪었다.
내가중2때할아버지가돌아가셔서한숨돌리는가했지만그후엔다섯남매치닥거리하시느라고생하셨다.
그래서늘하신말씀,전생에내가무신죄를지었길래이고생이고하신말씀이기억난다.
어머님은맏이인내게많은사랑을쏟아주셨다.쌀밥구경하기어려웠을때인60년대에도아버님과내밥만쌀밥으로푸고다른가족들은섞은보리밥을먹어야만했다.
맏이였지만결혼과함께분가를했고,두해후는고향을떠나서울로왔다.명절때나부모님생신때는반드시찾아뵈었다.그때마다꼭시장에서병어회를떠오셨고백합이나가오리를빠뜨리지않으셨다.
지금도기억나는일이있다.돌아가시기한해전인1999년9월초,일이있어경남함양에들렀다가지인을만나갓나온전어회로폭음을했었다.
함양서택시를타고진주까지왔는데,집으로간기억이없었다.새벽녘정신이들어눈을떴더니누군가내게부채질을하고있었다.실눈으로봤더니어머님이그때까지안주무시고부채질을하며계셨던것이었다.
일어나려다가죄송해서도로돌아누워버렸다.한참후어머님이자리를떠시고나서야일어났다.
지금도어머님을생각하면떠오르는죄송한추억이다.
병모님은막내딸을내게시집보내고많은걱정을하셨다.
당시아버님의사업실패로집안이어려움을겪을때여서마음고생이많았을것이다.그래서가끔씩우리집에오시면꼭이렇게묻곤했다.자네,요새는밥걱정없이지내는가.
그래서잘사는처형들집에서좋은게있으면챙겨놨다가갖고오시곤했다.그때마다아내는자존심상한다며앙탈을부리고는했었다.
병모님을생각하면가슴아픈일들이떠오른다.
아흔세살까지장수하셨지만마지막십년은치매로많은고생을하셨다.우리집에도가끔오셔서몇주씩계시곤했는데,그때마다우리가족은비상이었다.
방안에서아무기척이없어들여다보면아무옷장이나뒤지고계셨다.아내가엄마,뭐해요하고물으면이상하다,돈을여기넣어놨는데아무래도00가가져간것같다며애들을의심했다.한두번이아니었다.
어떤때는처형집에전화를걸어00(아내이름)가어떤남애(남자)하고방안에같이있는데아무래도이상하다고말하곤했다.아내가나와함께있는걸보고낯선남자와있다고전화한것이었다.
가끔씩은무작정집을나가안들어오시곤했다.다행히옷이나지팡이에성함과전화번호를적어놓아몇시간후파출소에서연락이왔었다.내가병모님,어디가시려고나갔어요하고물으면부산아들네집에갈라고나갔다며태연하게대답하셨다.그래차도안타고부산으로어떻게가세요하고물으면퉁명하게대답하셨다.봐라,집을나가서저큰길을따라쭉내리가모부산아이가.내가그것도모리는춘피이(바보)가하고역정을내셨다.
병모님은티비에서’동물의왕국’을좋아하셨다.그래서시도때도없이’동물의왕국’을틀라고주문하셨다.
병모님은생각난듯보게,박서방.호래이나오능거한번틀어보게하고떼를쓰셨다.그때는티비에서안나오는시간이라고하면통하질않았다.그래서꾀를내어병모님,호래이들이전부배고파서밥묵으로갔어요하면,그래.그라모난중에밥다묵고오모한번틀어보게하고쉽게단념을하셨다.
그후에는동물씨디를사와서보여드리기도했었다.
‘어버이날’을보내며하늘나라에먼저가신두분어머님생각을떠올렸다.
지금쯤아픔도눈물도없는그곳에서편안한안식을취하고계실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