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 전의 그날

노인은지긋이눈을감았다.취기가돌면습관처럼듣는슈베르트의’겨울나그네’건만웬지오늘은별로감흥이없다.

잔을들어바닥에깔린석류칵테일을입에털어넣고다시한잔을채운다.평소같으면감칠맛이났을연어회도오늘따라그저그렇다.막’우편마차’로넘어가려는씨디를세우고쿠스코(Cusco)로바꾼다.안데스풍의유려한선율이귓전을때린다.노인은다시지긋이눈을감는다.

44년전의그날,정확히는1970년6월5일이었다.

지난연말군대에서제대하고집에서빈둥거리던청년은주위의추천으로한지역봉사단체의간사로취직했다.

그러면서몇년전의추억을잊지못해마음맞는친구들과고전음악감상동호회를만들었다.공공기관에서장소도제공해주었고,호응도도높아그런대로재미있게꾸려나갔다.

현충일을하루앞둔그날저녁동호회친구들댓명이모여식사를함께했다.

처음에는간단한식사자리였지만,누군가빌미를만드는통에자리를옮겨술판이만들어졌다.그때만해도청년은술을입에대지못해건성으로따라가는정도였다.

그런데그녀J로말미암아술자리는엉뚱하게풀리기시작했다.

그녀는갓교육대학을졸업한신참교사였다.진주인근면단위시골학교에서근무하고있었는데음악모임에매우열성적이었다.여고시절에는피아노를잘쳤고,특히반주를잘해서지역음악행사에도불려다닐정도였다.

청년이술잔을받아놓고뜸을들이자약간취기가올랐던그녀가은근히시비를걸어왔다.

선생님(그녀보다네살정도많았던청년을그렇게불렀다),술잔은머한다꼬그리모시놓고있는데예.

아,내가술잘몬마시는거잘안다아입니꺼.

머땜에몬마시는데예.

그러자옆에있던누군가가한마디거들었다.

아,예수믿는다꼬몬마시는거잘암서저리샀는다.

체,치우이소고마.우리아부지도교회장론데내도이리마신다아입니꺼.선생님이술안마시모내는고마집에갈랍니더.남자가시시하거로술도몬마시고.

그녀가약간비틀거리며일어서는시늉을했을때청년의목소리가불쑥튀어나왔다.

알았심니더.알았어예.마시모될거아입니꺼.

그시간이후술판은크게벌어졌다.막걸리주전자가비워지기무섭게누군가가술을불렀고,안주가떨어지면금새새것으로채워졌다.

그날회계를맡았던C형에게는찬조금이답지했고늘자금이궁하다며투덜거리던그의입은귀에걸려있었다.

젊은혈기였을까.20대초,중반인그들은지역의열악한문화환경에대해질타를퍼부었고,우리들이야말로’문화의기수들’이라며자화자찬을쏟아놓았다.

삽시간에시간이흘러통행금지예비사이렌이울렸지만누구한사람일어나지않았다.

오히려내일이현충일이니영령들을추모하며밤을지새우자는제안이나왔다.아무도반대하지않았다.

식당주인을불러중간계산을해주고새술과안주를시키자아예방하나를내주며잘놀아라고맞장구까지쳤다.

그날밤다섯의청춘들은술을몇순배더돌리다가새벽녘에야잠이들었다.

여자둘,남자셋이었다.사내가눈을떴을때이미날은환하게밝아있었다.

여자들은없고남자셋만방바닥에널부러져누워있었다.먹다둔술상위에메모지가있었다.

그녀의글씨인듯어제미안했다는것과오후2시에다시일행이J다방에서만났으면좋겠다는내용이었다.

남자셋은목욕재계하고해장국까지먹었다.오후에다시만난일행은버스를타고도동딸기밭까지갔었다.

지난밤술판으로밤을지새우고도얌전하게깔깔거리며딸기를먹던그녀의모습이아직도눈에선했다.

그근엄하다던장로어버지에게지난밤일들을어떻게설득하고나왔는지도궁금했다.

노인은남은술을털어넣었다.달콤한석류쥬스의맛과짜릿한알코올이식도를자극한다.

몽롱한취기속에서도44년전그날의일들이주마등처럼뇌리를스쳐간다.

노인의눈동자는붉게충혈되어있다.

아마도취기때문만은아니리라.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