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낙엽

내가노인을처음만난것은20여년전이었다.그때는나도동네에산지스무해가넘어집을나서면몇발짝못가아는사람들과인사를나눌만큼토박이소리를들었다.

그러다보니나이를떠나오다가다차나소주한잔씩을나눌만한이웃들이생겼고,누군가의제안으로여남은명이모여친목회를만들었다.그친목회에서만난사람이그노인이었다.

노인은나보다나이도열살이나더먹었고동네에서는알아주는재력가였다.그는동네중심가에있는3층짜리건물의소유주였으며그건물1층에서제과점을운영하고있었다.

예순에접어든노인은항상웃는얼굴에우스갯소리도잘날렸고웬만한자리의술값은거의혼자서내다시피했기에두툼한신망까지얻고있었다.그렇지만’물좋고정자좋은곳없다’고노인에게도아픈상처가있었으니부인을일찍떠나보내고홀몸이란것이었다.슬하에는자식이있긴했지만서른남짓의외아들만두었다.

돈있겠다,인품까지좋다보니주위에서새장가를들라고했지만의외로노인은강경했다.

외아들이아직장가도못갔는데치닥거리를해주어야지혼자만편안한삶을살수없다는이유에서였다.

대신편안하게여생을살다가가고싶다고했다.그런연유에선지노인의주변에는많은사람들이들끓었고저녁이면거나하게취해서콧노래를부르며집으로돌아가는모습을자주볼수있었다.

그러던노인이동네를떠나경기도S시로이사를가겠다는선언을한것이10년전이었다.

제과점도잘되었고동네중심가에자리한건물이한창상승기류를타고있었는데,이사를가겠다는노인의선언에그를아는모두는뭔가이상하다며고개를내저었다.

나를포함한몇몇이노인을불러내어대포를나누면서물었다.도대체이사를가는이유가뭐냐고.

의외로노인의대답은간단했다.아들이S시에서큰사업을벌였는데따라가서도와야한다는것이었다.

첨단산업계통의사업체를벌인아들에게계속적인투자가필요하고은행빚보다는건물을팔아뒤를봐주어야겠다는노인의각오는대단했다.

그때는이미아들도장가를들어유치원에다니는손자까지두었다.

노인의생각에나를비롯한모두는맹렬하게반대했다.아들을도우고싶으면차라리수입의상당부분을매월보내주거나그것도적다면차라리건물을담보로대출을받아도와주라고강권했다.

그래도노인의생각을꺽을수는없었다.우리들모두는노인의고지식한처사에야유까지보냈다.어떤사람은삿대질까지하며칠십나이에아들놈한테싹쓸어서주었다간얼마못가쪽박을차게될거라며비아냥거렸다.그래도노인은꿈쩍도안했다.

결국10년전노인은모든재산을정리해서아들이있는S시로떠났다.

떠난지몇달후우리들몇명을그곳으로초청했다.서넛은노인의꼴을보기싫다며손사래를쳤지만나를포함한여섯명이노인을찾아갔다.

시내변두리에위치한아들네아파트에서노인은함께살고있었다.그때까지만해도노인은칠십이라는나이보다는훨씬건강한육신이었고그특유의유쾌한웃음소리로우리를맞아주었다.

마흔줄에들어선아들도공손하게우리를맞았고알뜰한상차림으로우리를접대했다.노인을만나고온우리는어쩌면노인의판단이잘된것일수도있겠다며다소마음을놓기까지했다.

그로부터5년이지나노인은다시우리들앞에나타났다.

노인의출현은그냥한번다니러온것이아니라아예터를잡고살겠다며왔다는것이었다.노인은동네작은빌라한채를샀다고했다.행색도5년전에비해말이아니었다.의복도꾀죄죄한데다가용모는더초라했다.아무리다섯해가지났지만그렇게행색이변할수는없었다.

몇몇이옛정을생각해서자리를마련하고노인을불렀지만끝내나타나지않았다.그래도나와몇사람이먹거리를사들고노인이사는집을찾았지만만나기싫다며문전박대를당했다.

그후에도몇번노인을만나자는시도가빗나갔고얼마못가노인의존재는우리들머릿속에서사라졌다.

내가그후우연히노인을만난것은그가우리동네에다시터를잡은지5년후이니꼭십년만이었다.

10월도하순이어서낙엽이뚝뚝떨어지는일요일오후였다.그날나는동네뒷산의둘레길이라도걸어볼요량으로산책길에나섰다.불과열흘전만해도불타오르듯붉은자태를자랑하던단풍들이낙엽이되어사람들의발길에여지없이짓밟히고있었다.마치부대끼는인생의말로末路를보는것만같아인생무상人生無常을되뇌이며발걸음을옮기던내눈에어깨가축처져맞은편에서다가오는그노인의초라한행색이들어왔던것이다.

나는반가움에소리쳐노인을불렀고잠시주춤하던노인도엷은미소를지으며내게손을내밀었다.

우리는둘레길의공간에있는작은나무의자에나란히앉았다.

팔순에접어든노인의얼굴은굵은주름살속에병색이짙어보였다.서로의건강과집안의안녕을묻는인사로노인과의대화는시작되었다.

노인은말을시작하자지난십년간닫았던입속을대청소라도하듯쉴새없이말들을쏟아놓았다.오히려내가간간히노인의말을끊으며생수병을건낼정도였다.

동생,내말좀들어봐.지난십년간나는입을닫고살아왔다네.그러다보니입안엔바늘이돋고내가슴은새카맣게타버렸지.모든게자업자득自業自得인데,무슨말을더하겠나.그래서누가뭐라고해도난입을닫고살아왔다네.그게벌써십년이되었다네.자네들이그토록아들에게재산을넘겨주면안된다고난리를부렸을때,그때내귀엔아뭇소리도안들렸다네.어미를일찍여의고애비손으로부실하게키운자식이라뭐든지해주고싶었던게내맘이었거든.그래서주위의반대에도모든걸아들에게넘겨줄수밖에없었지.

10년전아들을따라S시로갈때만해도아들과의사이는좋았었지.물론며늘애도잘해주었고.가끔씩만났던손자녀석도할애비라면지애비보다도더좋아했거든.그렇지만막상한집에서살고보니그게아니었어.매일같이얼굴을대하며살다보니손자놈이내게짜증을내는거야.

이따금안아서볼때기에입이라도맞출라치면할애비한테서냄새가난다며도망을치는게야.그것까지는괜찮아.며늘애는손자놈을나무라기는커녕오히려샐쭉한얼굴로시애비를쳐다보는거지.

이렇듯작은앙금에서시작된감정의골은날이갈수록깊어졌지.아들도처음엔며늘애와손자녀석을나무라더니언제부턴가내게불평을늘어놓는게야.나중엔애비땜에부부사이마저멀어지겠다며내게대들었거든.심지어사업이지지부진한것도애비가집안분위기를흐린탓이라며툴툴댔으니까.하나밖에없는아들에게내가진것다주고도그런대접받으며오년을견뎠지.그러다가결정한거야.

자식을떠나야겠다고.그때자네들의비아냥을들으며만일을위해얼마간의내노잣돈은남겨둔게있었거든.막상아들곁을떠나려니갈곳이있어야지.그래서이동네로들어온게야.

그때자네들을만나고싶지않은건내알량한자존심때문이었어.자네들충고를듣지않고고집부린못난결과를자네들에게보이고싶지않았거든.동생,이제내나이팔십이야.얼마나더살겠나.또살아야할희망도없고.

그래,형님.아들은어떻게되었나요?사업은잘되고있겠지요.

몰라.아들놈하고소식끊은지도벌써오년이지났네.명절이오고가도내겐기별조차없어.그렇다고다시내발로아들놈을찾아갈순없어.그나마아들에게그렇게라도도왔으니이애빌원망은않겠지.

동생,저길보게.낙엽이길바닥에수북히쌓였군그래.

저낙엽을보면꼭나를보는것같다네.한때는싱싱한젊은날도있었고불타오르듯잘나가던시절도있었지.

그러다가이젠길바닥에떨어져발에밟히는못난신세가되었단말일세.

저낙엽이꼭초라한내모습같아.허허.

노인과나는떨어지는낙엽을하염없이쳐다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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