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에피소드 한 토막

폐결핵얘길하다보니지난날공무원시절얘기가나왔다.

지방에서신문기자로근무하며젊은나이에’목에힘좀주며’살았다.

입사한지석달동안’돼지꼬리’를그리다가시청출입을하며종종시장을만나’독대’를하기도했다.

그때생각엔시장이엄청높은사람인줄알았고,군출신이어선지부속실직원들을쌍소리섞어가며쥐잡듯이하는걸보고속으로몹시분개하기도했었다.

아마요즘그런기관장이있다면그자리에단하루도붙어있지못할것이다.ㅎㅎ

그시장에대한앙갚음으로가끔시정의부조리를쓰기도했지만,깨지는건하급공무원들이었다.어떤때는기사가나간다는소릴들은시청직원이신문사까지쪼르르달려와서붙잡고눈물로하소연하기도했다.기사좀빼달라고.

그땐젊은혈기에거절했지만,지금생각하면그건오만한’객기’였다.

그러다가1974년봄별정직공무원으로발령받고상경하니상황이역전되었다.

낯선서울에서의삶은고단했고상대적좌절감에빠지기도했지만,좋은사람들을만나많은공부를했다.

명문대를나와고시에합격한엘리트공무원이납작한도시락에보리밥을싸와맛있게먹는걸보며저런사람이있어우리나라의앞날이밝겠다는자긍심도가졌다.김칫국물이벌겋게베인보리밥을먹었던그는나중에중앙은행총재가되어국가경제발전에큰기여를했다.

그시절의에피소드한토막.

공무원으로출근한지서너달쯤지나고서였다.당시내가근무했던사무실엔1급관리관부터2급갑이사관,3급갑서기관이나그에상당한비서관들이있었다.나는그들보다한직급밑이었고,나와같은직급이두사람더있었다.그중한사람은일반직사무관이었는데,고시출신이었고그부친이유명대학교의내로라하는경제학교수였다.

셋은나이도서른전후로비슷해서친구처럼가깝게지냈다.

그때가6월쯤이었다.퇴근을하려는데사무관A가나와또다른친구를부르더니셋이서한잔하자고했다.

그때만해도나는술을전혀할줄몰랐다.첫출근했던날,신입식을한다며과장들몇분에게잡혀사직공원인근대폿집에서혼이난적이있었다.권하는술을넙죽넙죽받아마신후적선동영화진흥공사앞에서화곡동가는89번버스를탔다.결국졸다가종점까지가서택시를타고집으로가기도했다.

그래서술자리가있으면안마시려고피해다녔다.그런데A가셋이서한잔하자는데피할수가없었다.

A가우리를데리고간곳은명륜동성균관대학교부근의한정식집이었다.

미리예약을했는지주안상이깔끔하게차려져있었고한복을입은아가씨들이대기하고있었다.

그런데서너순배돌리던A가고스톱을치자고제안했다.당시나는고스톱고짜도몰랐지만거절할수도없었다.모른다고했더니가르쳐주겠다고말하는데야.

그판의정설처럼판돈은처음배운내가몽땅따버렸다.

문제는,시간이꽤흘러통금시간이가까왔다는것이었다.그때는자정부터다음날4시까지가통행금지였고,단속이무척엄한시절이었다.

명륜동에서집이있는화곡동까지가려면택시를타도한시간거리였다.전셋집단칸방에전화가있을리없고,인근처형댁에전화가있었지만연락하기에는너무늦은시간이었다.

자정이다돼가는데기다리고있을아내와돌지난아들생각을하니속이바싹바싹타왔다.집으로가겠다고했더니둘은그러지말고술좀마시고여기서자고가자며붙들었다.

그렇지만도저히외박을할수가없어돈을내놓고가겠다며일어섰다.

밖으로나오니자정이코앞이라택시잡기가힘들었다.가까스로택시를잡고화곡동까지가자고했더니통금이임박한데화곡동까지는어렵다고했다.

돈을더얹어주겠다고했지만제2한강교(지금의’양화대교’)를건너기가어렵다는것이었다.당시그곳은헌병들이바리케이트를쳐놓고지켰다.내가알아서하겠으니걱정말고가자니까기사가긴가만가하며차를몰았다.급한김에큰소리는쳤지만나역시난감하기는마찬가지였다.

이윽고자정이넘어제2한강교에도착하니헌병들이바리케이트를쳐놓고있었다.물론주위에차는고사하고개미새끼한마리없었다.

차를세우고검문하는헌병에게무조건공무원증을내밀었다.그러고는높은분들모시고일을보다가늦었다며적당히둘러대었다.신분증을보던헌병은선선히알았다며바리케이트를열어주었다.

다리를건너김포가도를쏜살같이달리면서택시기사가한마디던졌다.아니,아저씨는어디다니길래헌병들이군소리없이보내줍니까.기사생활몇년되었지만통금시간에제2한강교넘기는처음이요.

나도그런시절을산적이있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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