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열차집’과 ‘호박마담’

며칠 전 한 종편방송을 보다가 술주정꾼 땜에 훌쩍이는 식당 여주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았다.

소주 두 병을 마시고 괜한 트집을 잡아 행패를 부리다가 급기야는 다른 손님까지 내쫓았다고 한다. 그 술취한 사내는 파출소까지 끌려와서도 소란을 피웠다.
피해조서를 받던 식당 여주인은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이젠 술취한 사람들 땜에 이 장사도 한계에 왔어요.
그 장면을 보던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여인네가 있었다. ‘열차집’의 ‘호박마담’이었다.
80년대 후반, 겁도 없이 세상속으로 뛰어들었던 내가 지인들과 즐겨찾던 식당이 있었다.
찌개 종류로 밥이나 술을 팔았던 허름한 식당이었는데 간판도 없었다. 식탁이라고는 주방을 막아 놓은 긴 난간대가 전부였다. 이 난간대 앞에 여남은 개의 등받이도 없는 의자가 있었고 우리는 혼자서 장사하는 여자 주인과 마주보며 밥을 먹거나 술을 마셨다. 간혹 재수 좋은 날은 가오리나 물오징어를 사와서 무쳐주거나 끓여주곤 했다.
가격도 저렴해서 그 시절 늘 호주머니가 얄팍했던 내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만큼이나 반가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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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식당을 ‘열차집’이라고 불렀다. 길다란 난간대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식당이야 그런 훌주그레한 집들이 그 시절엔 많았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었던 건 여주인이었다. 그때 여주인은 우리 나이 또래의 사십대 초반이었는데 지독한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그래도 꼴에 여자랍시고 입술 연지는 항상 빨갛게 칠했지만 얼굴은 메주덩어리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우리들 중 누군가가 여주인을 놀린답시고 얼씨구,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나 하고 농을 던졌다가 호되게 당했다.
그래, 호박이면 워쩔 것이고 수박이면 워쩔 것이여. 누가 이녁더러 데리고 살랍디여? 아구창으로 곱다시 술이나 처묵지 싸가지 웂이 주둥일 놀린당가요.
그 이후로 우리는 여주인을 ‘호박마담’이라고 불렀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부른 게 아니고 우리끼리만 불렀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취중에 여주인을 어이, 호박마담하고 불렀다가 또 다시 욕바가지를 먹었다.
이 아자씨가 술을 처묵고 정신줄을 놨다냐, 누구더러 호박이라꼬 불러쌌는다요. 아자씨는 양귀비를 데불고 산답디여? 아무나 보고 호박이라꼬 불러싸모 아구창에 똥바가지가 들어가는 줄 아씨요.
거칠 것 없이 욕바가지를 안기는 여주인이었지만 그래도 인정머리는 있었다.
고단했던 시절이라 두세 달씩 외상을 긋기도 했지만독촉 한 번한 적 없었다. 벼룩도 낯짝이있더러고 몇 푼이라도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렀다. 자리에 앉아 술도 청하기 전 계산을 할라치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앗따, 사람나고 돈났다고 안 합디여. 그 돈 웂어도 굶어 죽질 않응께 자주자주 좀 들리시요잉.
우리가 거하게 마신 후 2차라도 가려고 머릴 맞대면 날카로운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옴메, 이 아자씨들, 아직도 정신 몬 채맀다요. 그 만큼 마셨시모 얼릉 집으로 가서 마누라 엉덩이나 뚜디리 줄 알아야제, 뭐 한다꼬 수작들을 부려샀소잉.
그 호박마담의 대담한 본색을 본 적이 있었다.
추운 겨울 저녁나절이었다. 옆자리서 일행도 없이 소줏잔을 기울이던 삼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무엇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마시던 술잔을 바닥에 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여주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시비를 걸었다.
처음엔 얌전히 다독거리던 그녀였지만 청년의 입에서 독한 욕설이 나오자 사태가 급변했다.
그녀의 고함이 터진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니 친구여? 어데서 욕질을 하구 있어. 내가 니 눈깔에는 만만하게 보여. 이 새끼야.
그러고는 그 청년에게 찬물 한 바가지를 퍼부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우리는 놀란 눈으로 청년을 지켜봤다.
그러나 웬걸, 난 데 없이 물벼락을 맞은 청년은 잠시 여주인을 꼬나보더니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놓고 말없이 나가버렸다.
그 ‘열차집’이 문을 닫은 지도 오래 되었다.
호박마담의 행방 또한 알 길이 없다.
취객으로 인해 울먹거리는 여인네를 보다가 그녀가 생각남은 웬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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