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공방 사흘

아내가 교회 모임으로 지난 금요일 새벽 제주도로 떠났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 하고 있다. 당초 계획은 어제(토요일) 밤에 돌아오는 걸로 되었지만, 강풍과 비로 비행기가 떠지 못 해 아직까지 발이 묶여 있다.

아내가 떠난 첫 날은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했다. 아내가 만들어둔 음식들이 있어 별도의 안주 없이도 거나하게 몇 잔 마실 수 있었다. 즐겨 듣는 음악들을 입맛대로 골라 들으면서.

알딸딸할 정도로 마신 김에 용기가 생겨 택시를 타고 연남동까지 진출했다. 버스로도 5분 거리지만 늙은이가 술냄새 풍기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어 택시를 이용했다.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주점에서 눈치 보며 생맥주에 조개스프도 먹었다. 나오다가 보니 실내포장마차 스타일의 주점에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어 들어가 소주도 한 잔했다.

첫 날 밤은 이처럼 걸리는 것 없이 자유를 만끽했다.

이튿 날은 아예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밤 10시께 아내가 도착할 예정이어서 아침식사를 하며 해장까지 했다. 전 날의 누적된 피로로 내내잤다. 아들이 점심을 같이 먹자는 걸 거절했고, 딸애가 외손녀 두 녀석을 데리고 오겠다는 것도 사양했다. 모처럼 혼자만의 자유를 맘껏 즐기기 위해서였다.

오후 5시나 되었을까.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비행기가 결항 되어 다음 날이나 올 수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렇찮아도 술이 덜 깨 쓴소리 들을 각오를 했었는데 못 온다니 오히려 잘 됐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밤중에 깨어 침대 옆 빈자릴 보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빈 걸 보니 왠지 냉기가 돌고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하고 45년여를 살면서 아내가 집을 비운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삭막하고 쓸쓸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게 부부의 정인가.

잠을 자는둥 마는둥 아침을 맞았다. 주일 아침이면 아들네 가족이 내가 다니는 교회로 온다. 아들이 고2 손자녀석을 데리고 왔다. 동네 콩나물국밥 집에서 아침 요기를 했다.

오전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몇 시 비행기를 타려나 하고 기다렸다. 오후 3시가 돼도 연락이 없길래 전화를 넣었더니 오늘도 어렵고 내일 새벽에나 출발할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흘째 독수공방을 하라는 얘기였다.

속으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또다시 썰렁한 침대에서 혼자 자야한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전 같으면 핑계김에 한 잔했겠지만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로지 아내가 빨리 왔으면 하는 생각뿐.

두 처형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0대 중반과 초반의 두 처형은 손윗동서들이 타계한 후 몇 년째 뎅그런 아파트에서 혼자 사신다. 자식들이 함께살자고 해도 편하게 혼자 살고 싶다며 막무가내였다. 만일 내가 혼자 살게 된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시간을 떼울 셈으로 50년대 후반의 국산영화를 보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밤 1시 비행기로 출발이 잡혔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내 없는 사흘, 자유의 만끽이 아니라 이젠 적막감과의 싸움이었다. 옆 지기의 소중함을 새롭게 느꼈다. 이젠 나도 뒤늦게 철이 난 것일까.

사람은 늙어가면서 철이 드는 모양이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4월 18일 at 7:53 오전

    사는게 그런겁니다.
    처음에는 좋다가 하루 이틀 지나면 또 그립고 필요해지기도 하고
    그렇지요. ㅎ

    그나저나 제주에서 고생 많이 하셨네요.
    뉴스로 비행기가 안 뜨는건 봤습니다.

    • paul6886

      2016년 4월 19일 at 3:07 오후

      데레사님,
      집에 혼자뿐이란 사실이 참담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일까요.
      암튼 사흘의 자유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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