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 R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간이 되면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고 했다. 마침 긴한 일을 처리하던 중이어서 안 되겠다고 했더니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온 친구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다시 전화를 넣었다. 열두 시 반에 충무로 명보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평생 교직에 몸을 담았었다. 십여 년 전 퇴직해서 연금으로 걱정없이 살고 있다. 퇴직 당시만 해도 친구들 가운데 가장 활기차고 건강했다. 목소리도 제일 컸고 통도 컸다. 간혹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면 반드시 술 값은 친구의 몫이었다. 더러 다른 친구들이 술 값을 계산하겠다고 나섰다가는 예외 없이 욕바가지를 얻어 먹었다. 아요, 이 친구야. 담에 낼로 안 볼라쿠모 니가 계산해라. 니는 돈 걱정 말고 술만 처묵으모 될 거 아이가.
친구는 선대의 유산을 제법 물려받았다. 지금도 번듯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고향에도 집과 전답이 있다. 그렇지만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없다’는 세상 말처럼 그에게도 고민거리들은 있었다. 여직도 아흔을 훌쩍넘긴 노모가 있다. 약간의 치매끼가 있는 노모는 일흔이 된 며느리를 아직까지 시집 살이시킨다며 친구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봐라, 친구야. 참말로 미치겄다. 할매가 구십이 넘었시모 주는 밥이나 묵고 가마이 있시모 안 좋겄나. 안죽도 칠십이 된 며느리 시집 살이시키는기라. 시장에서 장을 봐오모 콩나물은 와 사왔노, 고등어는 와이리 물이 갔노 하고 시비로 거는기라. 그라모 또 고부 간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아이가. 집구석에서 이 나이꺼정 그런 꼬라지 보고 살아야 되는 내 맘은 우떠컸노.
설상가상으로 친구는 3년 전부터 암에 걸려 투병 중이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무조건 일 인당 소주 세 배이(병)부터 시켜놓던 호주가였지만 술도 끊었다. 게다가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 신세를 져야 잠을 청한다며 하소연했다. 이런 친구가 갑자기 점심을 먹자며 연락해 온 것이었다.
명보극장 앞에서 친구와 만났다. 둘은 종종 들렀던 인근 B복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이어서 복잡했지만 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복매운탕 2인분을 시키고 소주 한 병도 같이 주문했다. 내가 마시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친구도 막걸리 한 통을 시켰다. 갠찮겄나? 내 물음에 친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인자 죽기 아이모 살기다 고마.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술과 안주를 비웠다. 친구는 유독 미나리를 좋아했다. 오랜 단골이라 주인장과도 잘 아는 친구는 계속 미나리를 주문했다. 그러곤 내게도 권했다. 미나리 이거 마이 묵으라. 최고다 아이가. 그래, 요새 건강은 좀 우떻노? 그러자 친구의 얼굴에 수심이 덮였다. 말도 말아라. 삼시세끼 밥은 묵는데, 몬 죽어서 근그이 묵는다쿵께. 그래, 노모는 건강하시고? 하모, 우리 집에서 젤로 건강한 사람이 어머이라. 마느래도 골골하제, 그란데 노인은 펄펄 나는기라. 가마이 봉께 백수白壽도 문제 아이겄던데. 까딱하모 내가 먼저 갈 거 겉에서 거기 걱정인기라.
한 시간 넘게 점심을 먹었다. 결국 나는 소주 두 병을, 친구도 막걸리 한 통을 마셨다. 친구의 성격을 아는 터라 화장실 가는 체하며 내가 계산했다. 뒤늦게 안 친구는 화를 냈다. 야, 이 사람아. 내가 불렀는데 니가 와 돈을 내고 난리고. 겨우 달래서 식당 앞 데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따사로운 봄볕이 마중했다. 눈치 빠른 주인장이 커피 두 잔을 타왔다.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킨 친구가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올해 나이가 맻이고? 니는 해방둥이 닭띤게 칠십 둘이고 내는 개띤게 칠십 하나 아이가. 니는 나이도 모리나. 앗다, 벌씨로 그리 됐나.
의자에서 일어서던 친구가 기웃뚱 하더니 순식간에 옆으로 쓰러졌다. 가까스로 친구를 부축했다. 와, 술을 묵은께 어지럽나? 친구는 대답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숨을 씩씩거렸다. 얼굴은 창백했다. 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참, 세월도 무상한기라. 그리 펄펄 날던 놈도 세월 앞에는 아무것도 아이네.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려 친구가 사는 영등포까지 같이 갔다. 택시 안에서 친구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니 죽는 거 보고 죽어야 될 낀데, 그래야 안 되겄나. 그래, 내 죽을 때까지만 살아라. 니가 문상 와야지. 아파트단지 앞에서 친구는 내렸다. 내리면서 내 손에 종이 한 장을 쥐어주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고는 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 친구 연희동까지 좀 데리다 주이소.
친구가 쥐어준 돈은 오만 원짜리였다.
데레사
2016년 4월 23일 at 5:58 오후
가슴이 뭉클 합니다.
여자들은 술이야 안 마시지만 만나면 이 비슷한 얘기들이
많이 오 갑니다.
물론 밥값은 서로 낼려고 하고요.
모진 세월입니다.
그 세월을 감당할 자가 없지요.
그래도 남은 세월, 잘 지낼려고 바둥거려 봅니다.
바위
2016년 4월 23일 at 11:22 오후
데레사님,
한결 같은 소망이지만 건강하게 살다가
가족들 걱정 안 시키고 가는 거겠지요.
그래서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화내지 않고, 마음 편히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영지
2016년 4월 23일 at 7:44 오후
서로 배려해주는 친구분과의 우정이 좋지요?
그런데, 친구분 어머니는 혹시 치매는 아닌가요?
바위
2016년 4월 23일 at 11:18 오후
영지님,
친구 어머니는 약간의 치매끼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활기찼던 친구가 순식간에 위축 되는 모습,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지요.
enjel02
2016년 4월 24일 at 1:20 오후
나이 많아지네 누구나가 다 의기소침해지고
게다가 그래도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음 낳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지요 딱한 것 같아요
건강하게 잘 챙기며 사는 날까지
우정 변치 말고 즐거운 마름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바위
2016년 4월 24일 at 1:52 오후
enjel02님,
늙으면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위축되지요.
이걸 극복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 여가를 즐깁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배려하며 건강하게 살아야겠지요.
Jaydee
2016년 4월 28일 at 2:25 오후
This is a most useful cotiitbunron to the debate
바위
2016년 4월 28일 at 5:37 오후
Thank you!
Andie
2016년 4월 28일 at 2:52 오후
"On a related note, does anyone know why one is supposed to run to the grocery store and buy French Toast fixins when snow is in the fos?Barte"cecause you don't know how to make grits, country ham, and biscuits and gravy?
바위
2016년 4월 28일 at 5:36 오후
Thank you!
비풍초
2016년 5월 2일 at 2:42 오후
늙은 부모를 늙은 자식이 모시고 사는 문제.. 이거 진짜 문제입니다. 남들은 효자, 효부라고 하겠지만, 당사자들은 그말이 칭찬같이 들리지 않습니다. 효자이다가 불효자되는 것도 순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놔 줘야하는 게 이 시대의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위
2016년 5월 2일 at 5:18 오후
늙은 부모 모시는 게 고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