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데이트

술잔을 홀짝이던 노인이 오디오의 스윗치를 눌렀다.

끌로드 치아리 악단이 연주하는 ‘안개낀 밤의 데이트’가 흘러나왔다. 싱그런 현악기군의 반주 속에 묻어나오는, 언제 들어도 가슴 짜릿한 멜로디에 노인은 잠시 현기증을 일으켰다. 참, 오래 됐지. 사십 년도 훌쩍 지나 반세기가 다 돼가는 일이었어. 노인은 다시 잔을 들었다.

1970년 4월, 지난 해 말 군에서 제대한 청년은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지만 중소도시에서의 일자리는 만만치 않았다. 소일 삼아 몇 년 전 벌였던 고전음악 감상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촉석공원 내에 있는 시립도서관에서 정기감상회를 가질 수 있었다. 도서관이 휴관하는 매주 월요일 저녁 여유롭게 감상모임을 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엔 도서관장의 도움이 컸다. 교사 출신인 K관장은 전폭적으로 모임을 지원해주었다.

관장은 도서관 일 말고도 청소년 문화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청년은 관장을 도와 ‘청소년 도서관학교’도 주관해서 도와주었고, 5월 ‘청소년의 달’을 맞아 ‘청소년예술제’ 준비도 거들었다. 이 행사에는 시내 국민학교 선생님들 몇 분도 참여했는데 거기서 청년은 새내기 여선생님 G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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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코 앞에 둔 4월 하순이었다. 도서관에서 밤 늦게 선생님들과 행사 준비를 했다. 밤 열 시쯤 되었을까. 여선생 G가 먼저 일어섰다. 그러자 관장이 청년을 불렀다. 어이, 보래(봐라). 니 자전거 타고 왔제? 예. 그라모 니가 밤도 늦었는데 G선생 좀 데부다주모 안 되겄나? 그러자 여선생이 손을 내저었다. 관장님, 갠찮십니더. 지 혼자도 울매든지 갈 수 있어예. 그래도 관장은 막무가내였다. 아이구, 예뿐 선생님을 혼자 보냈다가 뭔 일이라도 나모 안 되지예. 보래, 자전거로 좀 모시다조라. 알겄제?

그러더니 관장이 내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어이, 저 여선생 말이다. 작년에 시내에 첫 발령 받은 신출내긴기라. 괜찮은 사람인께 니가 데리다줌서 잘 엮어봐라. 떨구모(놓치면) 안 된다이.

자전거를 끌고 여선생과 공원을 내려왔다. 촉석루 앞을 지나 서장대 가는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었다. 거기서부터 큰 길까지는 비탈길이었다. 완만한 경사지만 여선생은 자전거에 타지 않으려고 했다. 영남포정사 길목을 지나 세무서 앞에서 길을 물었다. 선생님 댁이 오덴데예? 상봉서동이라예. 아, 그라모 큰 길로 나가서 인사동 로타리로 해서 가모 되겄네예.

큰 길에서 좌회전해서 가다가 인사동 로터리에서 우회전했다. 그때만 해도 큰 공장이었던 조일견직을 지나 서부시장 쪽으로 달렸다. 자전거 뒷자리에 탄 여선생은 청년의 허리께를 잡았다. 난생 처음 여인의 손길을 느낀 청년의 가슴은 파닥거렸다. 해서 괜히 페달을 세게 저었다. 좀 천천히 가입시더. 여선생은 불안한 지 허리께를 더 세게 붙잡았다. 알았십니더. 말은 하면서도 청년의 발길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봉곡동을 지나 ‘봉 알자리’도 지나쳤다. 목적지를 얼마 앞에 둔 여선생이 말했다. 제 방에 가서 커피 한 잔 하실랍니꺼?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오데예(아니요). 선생님 혼자 사는데 지가 밤 늦게 가모 옆 방에서 머라쿠겄십니꺼. 갠찮십니더.

집을 코 앞에 두고 두 사람 다 자전거에서 내렸다. 집 옆에 구멍가게가 있었다. 여선생이 말했다. 그라모 저게 가서 음료수라도 마십시더. 가게로 뛰어간 여선생이 맥주 한 병을 내왔다. 이까지 태아준다꼬 수고했십니더. 맥주 한 잔 하이소. 그러자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지는예, 술은 몬 하는데예. 그래예?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잘 마시는데. 그라모 사이다라도 한 잔 하이소. 청년은 여선생이 건내준 사이다를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청년의 난생 처음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 바보야, 그때 못 먹어도 맥주 한 잔은 마셔야지.

가슴을 쓸어내리기라도 하듯 노인은 단 숨에 잔을 들이켰다.

10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4월 28일 at 8:01 오후

    자신의 얘기군요.
    이제는 담담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첫사랑 얘기가 재미있는데요.

    그 이후가 궁금합니다.

    • 바위

      2016년 4월 29일 at 11:10 오전

      소싯적의 이야기를 써봤습니다.ㅎㅎ
      이후의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이곳저곳에 몇 편 썼습니다.

  2. 혜 안

    2016년 4월 29일 at 11:32 오전

    인연입니다.

    • 바위

      2016년 4월 29일 at 10:32 오후

      실패했던 지난 이야기였습니다.
      인연이 아니었지요.
      감사합니다.

  3. 미미김

    2016년 4월 30일 at 5:35 오전

    🍂 아, 이래서 인생은 추억먹고 산다 했지요. 차분한 미소 같은 글 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바위

      2016년 5월 1일 at 11:35 오후

      저도 감사합니다.

  4. 미미김

    2016년 4월 30일 at 9:13 오전

    🍂아, 이래서 인생은 추억먹고 산다 했나요. 차분한미소 같은 글 감사합니다.

    • 바위

      2016년 5월 1일 at 10:57 오후

      나이 먹으니 지난 일들이 새록새록 그립습니다.
      해서 넋두리 삼아 기억의 실타래를 풀고 있지요.
      고맙습니다.

  5. 미미김

    2016년 4월 30일 at 9:25 오전

    🍀바위님, 실패했던 지난 이야기라니요? 인연이 아니였다니요? 이런 옹달샘 같은 스토리에 무슨 말씀을… 평생인연이 아니었다는거지요.

    • 바위

      2016년 5월 1일 at 10:55 오후

      그런가요.
      평생 인연은 아니었지만, 인연은 맞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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