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 전망대 관람을 마치고 적상호 쪽으로 내려오다가 만난 곳이 사고史庫였다. 이 사고는 1614년(광해군 6년)에 세워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7년 간에 걸친 전란이 끝났지만 금수강산은 막대한 참화를 입었을 것이다. 특히나 왕조의 중요 기록물들이 소실되거나 탈취당했을 것이다. 하여 선조에 이어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중요 기록물의 분산 보관을 위해 적상산과 묘향산에 사고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찻길이 잘 닦여 1천m 고지도 쉽게 오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첩첩산중인 이곳까지 돌과 목재들을 날라 서고를 세웠다고 하니 그 노고가 어떠했을까. 두 채의 서고를 보니 숙연해지는 마음 금할 수가 없다. 조선 왕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적상산성과 서고를 지키기 위해 1643년(인조 21년) 호국사護國寺를 세웠다고 한다. 누각 앞에 두표, 중열 친구가 섰지만 어렴풋이 나왔다.
서고 내부의 모습이다. 당시의 상황을 소개한 그림들과 서책, 사본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른 쪽 그림은 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모습이다. 이곳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6.25 전쟁 당시 북한 괴뢰군에게 탈취되어 평양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설명이 게시되어 있다. 그나마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우리 국토에 보존되어 있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고 내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들이다. 이게 진본인지 사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의궤儀軌’에 나와 있는 임금님의 행차 모습도 전시되어 있다.
서고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안국사安國寺를 찾았다. 1천m 고지 적상산성 안에 위치한 안국사는 1277년 고려 충렬왕 연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유서 깊은 이 사찰은 1989년 적상산에 무주 양수발전소가 건립되면서 안국사 자리가 수몰됨에 따라 옛 호국사지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안국사 자리는 옛 호국사 자리인 셈이다.
해질녘 안국사에서바라본 풍광이다. 멀리 덕유 산자락이보인다. 맑은 날 적상산 정상에선 멀리 경남 거창이나 경북 김천 쪽과 충북 영동 쪽도 보인다고 한다.
오후 5시경 하산하여 목욕재계 후 무주 태권도원에 짐을 풀었다. 8인실의 큰 온돌에 네 명이 자리했으니 그 넉넉함이란 말해 무엇하랴. 오후 7시부터 식당에서 160여 명이 모여 뷔페로 차려진 저녁식사를 나누며 ‘비봉산악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진행했다. 소주와 맥주, 막걸리를 곁들인 푸짐한 만찬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소주가 바닥나자 난감하고 아쉬웠는데, 장기 친구가 후배들을 위협(?)하여 두 병을 더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장기 친구는 세 사람으로부터 최고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ㅎㅎ
만찬은 추억어린 교가(박두석 사, 나운영 곡) ‘지리산 높이 솟아 우리의 기상 / 흐르는 남강물은 맑고 푸르다 / 역사 깊은 진양성 우러러 보면 / 사나이 젊은 힘이 솟아 오른다 / 진고 진고 높은 이상을 / 영원히 영원히 지켜가자 우리 진고’를 후배의 알토 색소폰에 맞추어 감명 깊게 부르고 끝났다.
주흥이 끝나지 않은 우리는 남은 술과 안주를 방에까지 가져가서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담을 회고하며 마무리했다. (계속)
바위
2017년 10월 26일 at 2:44 오후
만찬 사진 속의 여자분들은 부부동반한 분들입니다. 몇몇 분들은 부부동반을 했지만 우리는 남자들만 갔습니다. 오해 없으시길….ㅎㅎ
데레사
2017년 10월 26일 at 3:52 오후
오해 없습니데이. 진고가 공학 아닌것 다 아는데요.
ㅎ
역시 고교 동문들이 제일 순수하지요.
대학은 좀 정치성향도 있고요.
바위
2017년 10월 26일 at 7:21 오후
감사합니다. 이해를 해주셔서요.
환절기에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