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객주客主에서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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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김주영의 소설 객주客主를 다시 읽고 있다. 지난 80년대 초반 모 신문에 연재되면서 읽기 시작했지만 후에 아홉 권의 책으로 나온 후에도 몇 번인가 읽었다. 읽을수록 글의 묘미에 빠져 들었다.

이 책의 2권은 제1부 외장外場 중中편인데 첫머리인 제2장 초로草露에 재미 있는 글이 나온다. 혼자 읽기 아까워 그대로 옮겨본다.

“호남 땅에 한 원님이 있었습니다그려. 그 작자는 정령政令이 엄급嚴急하고 백성을 다룸에 형벌이 가혹하여 백성들은 항상 벌벌 떨며 조석으로 가슴을 졸이고, 숨은 쉬고 있었으되 천상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밟는 형국이었습니다요. 하루는 심지 깊은 한 아전이 吏屬들을 전부 모이게 한 다음 공론하기를,

‘우리 원님이 정사는 대중이 없는데다 형벌만은 잔혹하기 이를 데가 없으니 하루의 치정治政이 곧 하루의 폐단이 되고 있소. 만약 이대로 몇년을 지나고 보면 비단 수하인 우리들만 결딴날 뿐만이 아니라 고을의 궁핍한 백성들이 거개가 유리 분산되고 서로 쥐어뜯고 다투기를 마다하지 않겠으니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우리 고을이 번성하고 백성이 태평하기를 바랄 수가 있겠소. 지금 곧 안전님을 추방할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고을의 백성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라고 허두를 떼긴 하였으되, 좌중에 앉아 있던 이속들이 서로들의 염량만을 살피고 의중을 떠보려고 했을 뿐이었구려. 잘못했다간 도륙이 날 지경인데 설사 마음에 있었다 한들 감히 생의를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요. 그러나 닭이 열 마리에 한 마리 봉이 있더라고 한 결기 있는 이속이 참다 못해 한 꾀를 내놓았구려.

‘앞으로 이러하고 뒤는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발설하니, 그 꾀가 아주 용하다며 좌중이 박장대소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어느 날, 원님이 아침 일찍 일어나 조사朝仕를 끝내고 마침 별 공사도 없고 하여 혼자 조용히 앉아서 책을 뒤지고 있었겠다요. 그때 나이 어린 통인녀석 하나가 동헌 방으로 득달 같이 뛰어들었습니다. 그 통인 놈은 원님이 어인 거조냐고 묻기도 전에 소매를 모양 있게 걷어붙이더니 뜻밖에도 원님의 뺨을 사정 두지 않고 갈겨댔습니다요.

통인 놈이 원님의 뺨을 치다니 그게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 아니고선 할 짓이 못 된다는 걸 원님인들 몰랐겠수. 갓 쓰고 박치기를 해도 제멋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욕받이로 지내는 통인 놈이 한 짓이라 원님도 처음엔 얼덜떨했습니다그려. 그러나 원님도 곧 정신을 차려서 곧장 벨 기세로 동헌 뜰에 서 있는 늙은 관속을 불러서 저 놈 잡으라고 호령하지 않았겠수. 그러나 일은 점입가경이었소. 동헌 뜰에 모여 있던 관속배들과 통인 놈들은 서로 낯짝만을 멀뚱거리고 바라보고만 있을 뿐으로 어느 놈 하나 원님의 분부를 거행하려는 놈이 없었습니다그려. 괴이쩍었던 원님이 다시 급창及唱과 사령使令들을 불러 득달 같이 분부 거행하라고 소리소리 질렀겠다요. 그러나 그 놈들 역시 입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려 히죽히죽 웃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 안전님께서 오늘 아침에 실성을 한 것이 틀림이 없네. 통인 녀석이 멀쩡한 채로 안전님의 뺨을 칠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호랑이에게 고기를 달라는 게 옳았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히죽거리고 웃기만 할 뿐이었지요.

성미가 급한 원님은 분기가 상투 끝까지 북받쳐올라 창문을 박차고 책상을 뒤엎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퍼르르 떠는데, 그야말로 거동이 가관이었고 말씀이 대중없었지요. 통인들이 지체없이 책실로 뛰어들어서 원님의 해괴한 거동을 낱낱이 아뢸 수밖에요.

‘안전님께서 갑자기 병환이 나서 안정을 못 하시고 수하것들이 보기에도 민망하리 만큼 광기를 부리고 계시니 이 일을 수습하기 난당이요. 시방 보기에 아주 대단하십니다.’

자제들과 책방 사람들이 황망히 나가보았지요. 과연 듣던대로였습니다. 좌불안석은 물론이요, 책상을 엎었다가 엎은 책상을 다시 바로 놓았고 온갖 뜸베질로 기광을 다 부림에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의 체통으로는 차마 입에 올리기 여간 망측한 꼴이 아니엇습니다그려.

책방 사람들이 나온 것을 본 원님은 곧장 통인 놈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와서 자기의 뺨을 사정두지 않고 때린 일과 관속배들이 영을 거역하고 코대답도 않던 일을 죄다 말하는데, 곡절이 뒤죽박죽이었고 이야기의 전후사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지리산가리산이었습니다그려. 게다가 분에 못 이긴 원님의 눈알이 허공에 매달렸고 전신은 땀으로 적시었고 입에는 게거품을 잔뜩 물었으매 거동이 만분 수상할 수밖에 없었지요.

책실들이 보기에도 미친병이 발작하였음은 의심둘 나위가 없었습니다요. 또한 감히 범접할 수가 없을 통인녀석이 원님의 뺨을 쳤다는 사실만 두고 보아도 누가 눈으로 본 바도 아니요, 순리나 상식으로 가늠하더라도 그럴 이치가 만에 하나 있을 수가 없었겠지요. 자제 되는 사람이 아비에게 은밀히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달래기를,

‘아버님, 제발 고정하십시오. 통인아이가 설사 불학무식하고 버릇 못 배운 놈이라 할지라도 어찌 아버님의 뺨을 때릴 이치가 있겠습니까. 아버님께서 병환이 나신 것이 분명하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자제 되는 사람은 의원을 청하여 진맥을 하고 약첩이나 써서 병구완을 할 작정이었으나, 원님이란 작자가 그 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겠다요. 자기에게 무슨 병이 있다고 약을 쓰려는 것이냐는 것입니다요. 원님은 약도 마다하고 진종일을 길길이 날뛰기 시작하니 책실에서는 병짓이 우중하달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원님으로서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소.

책실에서조차 병짓으로 여기고 있는데 누가 원님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가 있었겠수. 원님이 밥을 먹을 리 없었고 잠을 잘 리 만무였습니다. 더욱이나 치정을 할 경황 또한 없게 되었소. 가근방 백성들까지도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소. 감사가 그 소문을 얻어듣고 즉시 원님을 파직시키고 말았구려. 원님은 부득이 치행治行하여 상경치 않을 수가 없었소. 귀로에 감영에 들러 감사를 만났을 때 감사가 친히 손을 잡고 은밀히 문병하였습니다요.

‘신환이 있으시다니 이제는 좀 어떠시오?’

그 말을 들은 원님은 대경실색으로 모가지를 비틀어 꼽고 발명하기를, ‘제가 정녕 병짓이 있었던 것이아니올시다’하고 그 통인 관속것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일의 졸가리를 따져 하소연하려 들었소이다그려. 그러나 감사는 얼른 손을 내저어 병짓이 재발하는 것 같으니 서둘러 떠나셔야겠다고 당부할 뿐이었습니다요.

원님은 감히 발명할 기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지요. 자기 집으로 돌아가긴 하였으나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절로 발광이 나고 입에 거품이 일도록 분함이 솟구쳐올랏습니다그려. 그러나 혹 그 일을 두고 막 발설을 할라치면 가권들은 필야 그 병짓이 재발한 것으로 여겨 의원을 불러댄다 약을 달인다 하고 야단법석을 떨어 원님은 마침내 단념을 하고 된장에 풋고추 쳐박히듯 방안에 틀어박혀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일신에 한이 맺혀 있으니 반찬그릇을 부시다시피 먹어준들 그것이 살로 갈 리 만무였고 반거충이 형색으로 입 한 번 뻥긋 못하고 집안에서만 빙빙 도는 신세가 되었으니 신관이 날로 틀려갔고 산다는 것에 재미를 느낄 이치가 없었겠지요.

그 원님이 노경에 이르매 이제서야 나이도 늙었고 나이 만큼 세월도 많이 흘러 그 일은 이미 옛날의 일이 되었습니다그려. 자기도 한이 어지간히 풀리고 이제는 발설을 하더라도 가권들이 발작으로는 여기지 않을 때가 되었기에 그저 웃는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옛날 호남 어느 고을의 원으로 있을 적에 통인 놈에게 뺨을 얻어맞았던 일을 너희들은 아직도 내 광기로만 알고 있느냐’고 넌지시 물었겠다요. 여러 가권들이 드디어 깜짝 놀라 서로들을 바라보면서 ‘아버님의 증세가 그 동안 재발하지 않더니 이제 늙어 세상 하직할 임시에 와서 다시 나타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하고 장탄식을 늘어놓고 근심과 초조의 빛이 확연하였소. 원님은 종내 죽을 때까지 분을 품고서도 토로치 못하였다는 얘깁니다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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