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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지도 밖으로 나간’ 한비야에게 산이란…”에너지 원천” - 마운틴
‘지도 밖으로 나간’ 한비야에게 산이란…”에너지 원천”

전 세계 70여 개국을 누비며 세상의 바람을 가른 ‘바람의 딸’ 한비야(51), 그녀는 더 이상 오지여행가가 아니다. 그녀는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굶어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구촌 버려진 곳곳을 찾아다니며, 때로는 누나같이, 때로는 어머니같이 따뜻하게 세상을 감싸 안는 구호단체 월드비전 팀장이다. 바람의 딸이 세상에 ‘구호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가 아니라 그녀의 변신은 완전 무죄다. 대학 낙방생에서 클래식 다방 DJ로, 대학생으로, 유학생으로, 국제 홍보회사 직원으로, 세계 오지여행가로, 국제구호단체 팀장으로…. 그녀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 순간 어릴 적 꿈꿔오던 일을 하고 있었다. 꿈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겐 이루어진다는사실을 그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그녀는 지금 월드비전 구호팀장을 그만두고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그것도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꿈을 가진 여자, 꿈을 꾸는 여자, 꿈을 좇는 여자 한비야. 그녀에게 꿈을 빼면 그녀의 존재는 없다.

그러나 그녀인들 왜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겠나? “산에도 굴곡이 있듯 인생에도 수많은 부침이 있다. 내리막의 순간에도 그 고비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속 정진하니 이미 그 고비들은 극복되어져 있더라. 멀리 있는 산도 도저히 못 올라갈 것 같아 보이지만, 열심히 오르고 보면 먼 길을 왔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자신을 극복했다는 큰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좌절의 쓴 경험을 산에 빗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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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거북바위에서 포즈를 취한 한비야씨.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좌절 내지는 고비는 공부 잘하던 한비야가 원하던 대학에 낙방한 것이다. 한번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그녀로서는 충격이었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2주간의 ‘방황 가출’을 감행했고, 이후 6년간 고졸로서 세상의 쓰라린 경험을 했다. 다방 DJ, 번역 아르바이트 등 돈 되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했다. 하지만 항상 남는 건 ‘고졸 디스카운트’였다. 번역도 그녀가 대학생보다 더 매끄럽게 했다고 하면서도 받은 돈은 절반에 불과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다시 대학 들어가기로 마음을 다 잡았다. 6년 만에 원하던 그 대학에 합격했으나 포기하고, 특별장학생으로 뽑힌 대학에 들어갔다. “온갖 고생을 겪은 그 6년간의 경험이 그 이후 한비야의 삶을 사는 데 굉장히 큰 힘이 됐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한 한비야는 대학원 졸업 뒤 국제 홍보회사 버슨-마스텔라 한국지사에서 근무했다. 3년 여간 직장생활 하던 그녀는 어릴 적 꿈인 ‘세계 오지여행’을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훌훌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던진 것이다.

93년부터 99년까지 7년간 세상 오지란 오지는 다 다녔다. 그것도 여자 혼자서. 지구 세 바퀴 반을 돌았으니, ㎞로 따지면 14만여 ㎞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50㎞이다. 이 거리를 311번이나 걸었다는 얘기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도 이 정도 걸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그녀의 어렸을 때 일화 한토막. 그녀의 어릴 적 별명은 ‘여자 김정호’였다. 잦은 이사와 꿈 많은 소녀의 호기심으로 이곳저곳 누비다 집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사 갈 때마다 골목길, 건물 등을 꼼꼼히 표시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그녀는 이를 토대로 아예 동네지도를 만들었다. 다시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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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고산을 오르다 발목을 접질려 포터에게 업혀 내려오고 있다.

꿈 많고 호기심 많았던 그녀는 7년간 70여 개국을 돌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경험을 했다. 그녀의 나이또래 다른 사람에 비하면 아마 두 세배 이상 인간사회에 대한 경험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녀의 책에서 못 본 오지여행 에피소드가 듣고 싶었다. 재미있고 장황한 얘기가 나올 줄 기대했는데 의외의 상황을 소개했다. “외국에 나가보니 한국이란 국가보다 기업이 휠씬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시리아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일이다. 국경부터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모 대기업에 전화 걸어 사정을 얘기하니, 가짜 해외출장원을 발급해주더라. 이를 국경통제소에 제출하니, 환대하며 바로 통과시켜주었다. 글로벌 시대의 기업 영향력이 바로 뇌리에 들어오더라.” 비슷한 경험을 몇몇 나라에서 더 겪었다고 했다.

세계일주는 99년까지 계속 됐다.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돌고 마침표를 찍었다. 왜?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거대한 중국을 가보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역마살은 중국 구석구석까지 이어졌다. 중국견문록이란 책까지 썼다. 그녀가 쓴 7권의 책 중 2005년 나온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가장 잘 팔렸다.다른 책들고 베스트 셀러였다.

중국에서 1년간 공부하고 있을 때 월드비전 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처음 ‘월드비전’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무슨 세계안경점 주인이 홍보요원이 필요해서 전화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 세계안경점 같은 이름이 그녀가 오지여행가 다음으로 꿈꿔왔던 구호단체일 줄이랴 꿈엔들 알았겠나. 그대로 “OK"했다. 그게 지난 2000년의 일이다. 그 이후 그녀는 비행기로 세계의 오지를 다니며 구호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총 100여 개국에 지구 열 바퀴 이상 돌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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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그녀의 이 같은 역마살, 아니 에너지는 어디서 나올까?

그녀는 한마디로 “산”이라고 했다. 완전한 산 예찬론자였다. 그녀에게 산은 인생, 그 자체였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운 등산이 지금 그녀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매주 거르지 않고 산에 오른다.


그녀와 같이북한산 산행을했다. 소요시간도 아예 5~6시간정도 잡자고 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그 날 눈, 비가 온다고 했다. 올라가는 길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등산객들은 굉장히 많았다. 앞 사람을 추월하기 힘들 정도로 줄지어 가고 있었다. 북한산성 매표소를 지나 올라갔다.‘바람의 딸’ 같이 쌩쌩 날았다.태고사 위쪽 거북바위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마지막 사진을 찍는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내 비가 아닌 눈으로 변했다. 펑펑 내렸다. 함박눈 수준이었다. 등산객들은 전부 급히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들 갈등했다. 계속 올라가야 하느냐, 아니면 그냥 내려가느냐의 문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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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긴급 구호물자 배분 현장에서.

그녀는 다음 날의 중요한 약속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길까 잠시 걱정하더니 그래도 오르자고 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한 발짝만 더 가면 100도인데, 99도에서 멈출 수 없어. 99도까지 오느라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말이야.”

대성문으로 올라가는 길은 봄 속의 겨울이었다. 3월에 눈 덮인 나무를 보면서 그 설림(雪林) 속의 새순을 동시에 경험했다. 6시간 뒤 하산 길은 일행 4명 모두에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만큼 기쁨이었다. 올라가는 길은 눈보라 때문에, 미끄러운 등산로 때문에 풍광을 감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했지만 산의 다른 쪽은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 가지에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새순, 눈 덮인 가지 등 완전 딴 판이었다. 그러니 세상은 한 면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한쪽으로만 보지 말라는 걸 암시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에너지 넘치는 그녀도 ‘한 면만 가지고 살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에 들었다.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떻게 결정을 내려왔는지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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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구호 활동하면서.

세상에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양보하지 못할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정말 궁금했다.

첫째, 꿈을 계속 꾸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녀의 어릴 적 꿈은 세계 오지여행가였다. 그 꿈은 지금 과거형이 됐다. 그 다음 꿈이 남을 위해 사는 일, 즉 구호단체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도 과거형이고, 동시에 현재형이다. 그럼 미래의 꿈은? 난민촌을 위해서 현장에서 계속 일을 하며, 동시에 우리나라의 세계시민교육을 주도하는 것이다. 머지 않아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 공익광고 출연료 1억원을 청소년 글로벌 교육에 써달라며 쾌척했다. 이것도 곧 현실화 될 전망이다.

둘째,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녀는 “이 일이 하느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자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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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이란 긴급 구호에 나서.

셋째, 산에 가는 것이다. 산에 가는 일은 한국에 있으면 웬만한 일보다 우선순위에 있다고 했다. 그녀의 등산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됐다.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산에 올랐다. 그 손이 아직 따뜻하게 느껴지고, 당시 지나치는 사람들이 해준 “장하다” “착하다” “귀엽다”는 등의 칭찬은 지금까지 ‘나 자신을 존중하게끔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북한산 국립공원 입장료가 300원 시절부터 500원, 800원, 1000원, 1300원, 1600원까지 내고 다녔던 기억도 그대로 했다. 그리고백두대간을종주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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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구호활동을 하면서 어린이들과 함께.

오지여행가에서 ‘부드러운 구호 팀장’이 되고 싶다는 한비야. 그녀는 기본적으로 싸움닭이었다. 싸움닭들은 자기감정을 잘 숨기질 못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손해 볼 줄 뻔히 알면서도 감정을 드러낸다. 그녀가 쓴 책에서도 솔직한 표현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남자들한테 감히 하기 힘든, 어쩌면 내숭만 떨 것 같은(남자의 기준으로 볼 때) 여자의 속옷 얘기라던 지, 정제되지 않은 사랑얘기 등은 그녀가 아니면 표현하기 힘든 문체로 적혀져 있다.

그녀가 남한테 선물을 줄 때 항상 적는 표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꿈을 꼭 이루세요’이다. 누구던지 꿈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없으면 강제로라도 ‘가져라’는 의미에서 그녀는 굶어죽는 아이들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지구촌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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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2 Comments

  1. 화창

    03.30,2009 at 8:56 오후

    한비야씨~~~ 참 좋은 사람입니다!   

  2. 단비

    04.05,2009 at 10:52 오전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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