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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인사들의 ‘거시기 산악회’

혹시 거시기 산악회라고 들어봤나요?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문인들이나 명사들도 다양한 산악회를 만들어 산에 다니고 있다. 수많은 산악회가 자기 나름대로의 이름을 걸고 산에 올라간다. 별의 별 산악회, 별의별 이름이 다 눈에 띈다. 현재 산악회가 약 4만여 개 되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이름만 되면 알만한 민주화 운동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거시기 산악회’가 있다. 애초부터 거시기란 이름을 걸고 산에 올랐던 것은 아니다. 70년대 초 이돈명 변호사, 이중재 전 국회의원, 고 정익용씨 등 친한 세 사람이 산에 다니며 우의를 다지면서 시작됐다. 산악회 이름도 없었다. 그냥 산이 좋아서 산에 올랐다. 사람도 세 사람이니 산악회라 이름 붙이기도 거시기 했다.

그러던 소모임이 80년대 들어 신군부 통치에 반발한 교수, 기자들이 대거 해직되자, 시국 변론에 나선 이돈명 변호사가 이들을 산에 데리고 갔다. 이 때 들어온 사람들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서울사회 경제연구소 이사장, 고 박현채 교수, 송건호 전 한겨례신문 사장, 리영희 교수, 이호철 소설가, 고 조태일 시인 등이 합류했다. 이들 대부분 이돈명 변호사의 시국 변론에 신세를 진 사람들이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자 한국 고전번역원 초대원장, 김병오 전 국회의원 등도 산행 대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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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산악회 멤버들. 앞줄 맨오른쪽이 백낙청 교수, 맨왼쪽이 깐수 정수일 교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거시기 산악회란 이름은 한국 곤충학자로 유명한 배상희 교수가 고려대 농대에서 강의했다. 평소에 워낙 거시기란 말을 잘 쓰자, 하루는 한 학생이 1시간 강의에 ‘거시기’란 말을 몇 번 사용하는지 끝까지 세어보았다 한다. 총 100번 가까이 했다고 한다. 모두 박장대소했다. 배상희 교수는 지금은 고향 진주에 내려가 있지만 평소 대화 중에도 거시기란 말을 빼면 말이 연결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배 교수가 산에 와서 이 말을 전하자, 산 중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같이 산행했던 이돈명 변호사가 이 말을 듣고, 재미있으니 앞으로 우리 모임을 거시기 산악회로 하자고 제의했다. 모두가 흔쾌히 승낙했다. 그 때가 80년대 중반이었다.

이들은 아직까지 매주 일요일 산행 전통이 이어가고 있다. 산행하는 날은 바로 술 마시는 날이기도 했다. 고 박현채 교수 같은 사람은 ‘술을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간다’며 산행 마친 뒤 북한산 아래에 있는 술집들을 수차례 전전했다고 한다.

80년대엔 시국관련 일들이 워낙 자주 일어나다보니 산이 이들의 일종의 도피처이자 안식처 역할도 했다. 일 하면서 못하던 말들을 산에 가서 마음껏 쏟아내기도 했다. 지나가는 산행객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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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교수와 일행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

이후 깐수 정수일 교수와 성균관대 임형택 동양철학 교수도 산행대열에 합류했다. 대부분 이돈명 변호사와 직간접으로 맺은 인연들이다. 중동문화의 권위자 정수일 교수는 간첩혐의로 출감 후에도 대한민국 국적회복이 없는 상태였다. 이돈명 변호사가 이번에도 나섰다. 이 변호사는 정수일 교수의 부인 정순희씨를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깐수 정수일 교수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해 모든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 정도는 꼭 산에서 회를 먹는 일이 생긴다. 산에서 무슨 회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유명인사들이다 보니 무슨 단체나 국가에서 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수상하면 항상 수상턱을 산에서 냈다. 당사자는 일요일 아침 일찍 직접 영등포 시장에 가서 싱싱한 회를 산에 사들고 왔다.

이들도 여느 산악회와 마찬가지로 점심때는 많은 진기한 음식들이 나온다. 밥과 떡은 기본이다. 횟감에 술도 곁들인다. 술은 시음장을 방불케 한다. 소주와 막걸리에 인삼주, 더덕주 등을 반주로 한다. 막걸리도 그냥 막걸 리가 아니다. 강화도 막걸리 등 별미 막걸리가 다 나온다. 하산 뒤엔 2차, 3차로 술자리가 이어진다. 마음 맞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번 만나 술로서 회포를 푸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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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교수와 깐수 정수일 교수, 박석무 원장이 산행 중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산악회가 노령화 돼 갔다. 젊은 피 수혈이 필요했다. 90년대 들어 언론인 이진섭, 이도윤씨와 지금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는 이정용 교수 등이 합류했다. 이들도 지금은 60이 넘었다. 2000년대 들어선 이돈명 변호사가 덕수 법무법인에 있는 ‘젊은 피’ 여치현, 도재현 변호사 등을 영입했다 이들은 지금 강원대와 이화여대 법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재직 중이다. 이들은 40대이나 그나마 젊은 편이다.


수십 년 동안 매주 다닌 산행횟수도 엄청나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은 없다. 산행,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등산한 지 30년이 넘었으니, 대충 어림잡아도 1,000회는 훌쩍 넘는다. 해외는 못가지만 지리산, 덕유산, 한라산 등산은 매년 한 차례 정도 했다.


통행금지 있던 시절엔 휴게소에서도 많이 잤다. 강원도와 같이 조금 먼 산에 가면 오는 길에 항상 통행금지에 걸렸다. 죽전 휴게소 2층이 여관이었다. 남자, 여자 따로 없는 혼숙이었다. 산에서 취사가 가능했던 옛날엔 온갖 조리할 수 있는 음식을 가져와 버너로 직접 끊여 푸짐히 먹었다.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미 옛날 얘기가 됐지만.

노령화된 산악회라 체력도 천차만별이다. 정해진 산행코스는 상명대 뒤로 해서 북한산 지능선을 타고 올라 비봉 올라가기 전에 짐을 풀고 민생고를 해결한다. 내려오는 길은 좀 다르다. 체력이 되는 사람은 비봉을 거쳐 대남문까지 가기도 하고, 백운대까지 내달리는 멤버도 있다.

70세를 훌쩍 넘긴 김병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공동이사장은 내달리는 멤버에 속한다. 그는 아침마다 체조로 건강을 다져 피부가 팽팽할 정도다. 네팔 트레킹도 몇 차례 다녀왔다. 산 없이는 못살 정도다.


거시기 산악회와 등산한 추억을 못 잊어 나온 시집도 있다. 아주대 의대 교수로 있는 문혜원 교수의 <우리 시의 넓이와 깊이>는 거시기산악회의 초기 멤버이자 작고한 시인 조태일과 매주 일요일 등산했던 기억을 더듬어 시집으로 발간한 것이다.


지금 6년째 거시기산악회 산행대장을 맡고 있는 정기용 세무사도 70이 넘었다. 70년대 초 이돈명, 정익상, 이중재씨 등이 이름도 없이 산에 다닐 때 집안의 형인 정익상씨의 소개로 80년대 거시기 산악회에 몸을 담았다. ‘산행대장을 넘겨줘야지’하면서도 딱히 맡을 사람이 없다. 차일피일 하면서 몇 년 흘렀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창립멤버 이돈명 변호사는 나오지 못한지 몇 년이 됐다. 전립선암 수술에 신부전증에 관절도 좋지 않아 집 근처 가벼운 산책만 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에 이길 장사는 없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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