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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 “산은 엄마의 품과 같아”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 최고의 소설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해 11월 출간된 소설이 5개월 만에 벌써 65만부 이상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다. 사회 각계에 ‘모성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저자 신경숙(申京淑․46)씨는 여기저기 낭독회나 강연 다니느라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 바쁜 와중에도 북한산이 보이는 평창동 언덕, 그녀의 표현대로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조용한 미술관에서 잠시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차분한 복장에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은 항상 그대로다. 그녀만의 매력이다.

-댁이 이 부근이신가 봐요?

“한 20년 전부터 북한산 자락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평창동과 구기동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 전엔 구기동에서 7년 살다가 평창동으로 이사 온 지 4년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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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이 그녀의 매력이다.

-이곳에서 계속 사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특별한 이유? 그런 건 없어요. 그냥 산이 좋아서, 특히 북한산이 좋아서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작품 구상을 할 때나,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어김없이 산에 올라가죠.”

-산은 언제부터 다니셨습니까?

“특별히 먼 산행을 계획해서 떠나거나 그러진 않아요. 구기동, 평창동에서 거의 20년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산에 가는 일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20대 때부터 시작된 산행은 그냥 산이 친구가 됐어요. 특히 북한산은요.”

‘산이 친구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산에 대한 상당한 깊이가 있어야 한다. 통상적으로 친구라 하면 ‘뜻이 맞고 교감이 잘 되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가. 1~2년 만에 그 정도 쌓일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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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로 미국 횡단종주하면서 그랜드 캐넌에서 잠시 휴식.

-산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산은 겉에서 보는 거하고 들어가서 걸으면서 보는 것 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생명을 기르고 있는 품이 넓디넓죠. 물과 나무가 다 있을 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이 있지요. 사계절 동안 산에 다니며 산을 관찰하다보면 그대로 한 세상이 보여요. 게다가 항상 변하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산은 든든하고 안심이 돼요.”

이 정도면 산의 깊이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산에 대한 상당한 내공이 쌓인 그녀의 소설엔 알게 모르게 산이 등장한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산에 놀러가자며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왜 하필 산이었을까? 그녀의 네 번째 장편소설 바이올렛의 주인공은 이름 자체가 ‘산이’ 다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전부 산에서 교감을 얻었다고 했다. 작품을 쓰다가 글이 막힐 땐 어김없이 산에 올라간다. 그녀가 북한산 자락을 떠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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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씨지만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등산이 소설 쓰시는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나요?

“마음이 작품 외의 것으로 산만해져 있을 때 산에 가면 정리가 돼요. 스스로를 향한 질타 같은 것도 생기고요. 계곡의 물이 메말라있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것 같기도 하죠. 산에 다녀오면 나 자신에게는 혹독해지는 것 같은데, 타인에겐 너그러워지는 마음이 생겨나는 걸 느껴요. 그런 부분들이 영향을 끼치겠죠. 실제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소설에 등장하기도 해요.”

산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품안과 같이 하나의 해결책이다. 어머니 품안에 있으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그냥 안겨져 있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그녀는 글이 막힐 때 어머니한테 가끔 전화를 한다. 작업 중 거의 유일한 습관이다. 15세 때 시골을 떠나 어머니와 생이별한 그리움이 배어서일까? 한참 통화를 하다보면 전혀 다른 얘기를 했음에도 문제가 해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어머니가 해결책이었던 거다. 그녀에겐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다. 어머니란 말을 써놓고 더 이상 작품 진행이 안 될 때 ‘엄마’라고 고쳐놓으니 일사천리로 글이 써졌다고 한다. 엄마가 훨씬 친근한 이미지다. 친근하면 스스럼없다. 그녀에겐 엄마가 산이었고, 산이 곧 엄마였던 거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 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행동으로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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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하면서 어느 절에서.

잠시 그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꿈 많던 어린시절 형제 많은 집안의 넷째 딸로 성장한 그녀다. 시골에서 오빠 세 명을 대학 보낼 정도로 부모님은 자식들을 억세게 키웠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편도 아니었다. 형제 많은 집안은 항상 시끌벅적했고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신경숙은 많은 형제들에 치였다. 오빠들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할 때가 많았다. 참을 수밖에 달리 대안도 없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길 원했다. 시골에서는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5세 때 고교 입학하러 서울로 올라왔다. 어린 신경숙이 부모와 언제 다시 같이 생활할지 기약도 못하는 생이별의 순간이었다. 실제로 그 이후로 부모와 같이 장기간 생활해 본적이 없다. 결혼 후 보름 간 같이 지낸 게 전부다.


상경한 그녀는 오빠들과 같이 어려운 생활을 했다. 가난을 몰랐던 그녀는 서울에서 가난을 알았다. 대도시가 주는 공허함과 비정함을 어린 시절에 느꼈다. 정규 고교 진학도 여의치 않아 산업체 특별학급이 있는 학교로 가야만 했다. 취직하러 온 게 아니라 진학을 위해 왔는데, 둘 다 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도시의 비정함은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고 열심히 하게 했다.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될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 꿈을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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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넌에서 신경숙.

“어린 시절 책을 읽는 모습을 어머니는 무척 좋아하셨어요. 시골의 남자형제 많은 집안의 네 번째 여자아이로 자란다는 건 그만큼 뭔가 할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죠. 어머니는 심부름 시키려고 방문을 열어보고는 책을 읽고 있으면 가만히 문을 닫아 주셨죠. 책읽기는 오빠들이 빌려온 거에서부터 시작되었죠. 난독이어서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돕니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책을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책속엔 다른 세상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일찍 하게 된 게 행운이었던 거 같아요. 다른 시행착오가 없었으니까. 대학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받았고, 그 때는 좋아하는 작품들을 필사해보기도 했죠. 필사하면 그냥 눈으로 읽는 거와는 달라요, 양감이 훨씬 뚜렷하게 감지되고, ‘눈이 내리는 군요’라고 써보면 진짜 눈이 내리는 듯하지요. 꿈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이 있었다기보다는 항상 작가와 책이 곁에 있었어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본격 창작 수업을 받았지만 누구의 가르침만으로 다 훌륭한 소설가가 되는 건 아니다. 84년 졸업 후 취직한 출판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집 앞 독서실에 자리를 얻어놓고 새벽까지 소설을 썼다. 나무 의자에 앉은 채 이희승 국어백과사전에 얼굴을 대고 잔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그렇게 쓴 소설이 ‘겨울우화’다. 독서실 생활을 꼬박 두 달 한 끝에 탄생한 작품 ‘겨울우화’를 문예중앙에 보냈다. ‘등단’이란 커다란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 그게 85년, 그녀의 나이 스물 둘이었을 때였고,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초기엔 그녀만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어디 산길에 표지도 없고, 저자 이름도 없는 책이 한권 떨어져 있어도 문체만 보면 ‘아 이건 신경숙 소설이네!’라고 할 정도의 작품을 쓰려고 했다. 실제로 ‘풍금이 있던 자리’와 ‘깊은 슬픔’이 자기문체 중심 소설이다. 삼십대 들어선 역사와 사회를 내재화 시키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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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표정으로 포즈를 잡았다.

“90년대엔 모든 사회 분위기가 공동체 중심이었잖아요. ‘공동체가 행복해야 개인도 행복하다’가 모토처럼 전면화 되어있을 때였어요. 난 반대로 생각했어요. ‘개인이 빛이 나야 공동체도 빛이 난다, 그래서 역사와 사회 속에서 사장된 개인을 발굴해 내는 작업을 했어요. 그런 작품들이 ’외딴방‘이나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대표적이라고 봐요. 지금 40대엔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요. ‘리진‘이나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서사가 소설의 중심에 놓여졌어요. ‘소설은 이야기다‘라고 본다면 거꾸로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에게 위로받자는 소설이 아니라 엄마를 위로하자는 쪽에 코드가 맞춰져 있는 소설이죠. 엄마 자체도 엄마가 필요할 정도로 모성이라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나아가서 사회 자체가 모성성 덩어리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변화했다고 봐요.”

그녀는 그녀의 소설을 나름대로 시기별로, 내용별로 구분했다. 정확히 자신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인간의 이야기고, 시대가 배경이다. 소설가는 기본적으로 시대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인간에 애정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 애정을 가진 인간 신경숙의 앞으로의 방향, 즉 미래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미래의 시간이 어떻게 펼쳐질지 나도 궁금해요. 아무 것도 정해진 건 없어요. 작가로서 바람이 있다면 오래 전에 쓴 작품이 아니라 방금 쓴 작품으로 소통되는 현재진행형의 작가로 지내고 싶어요. 예전에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예쁘면서도 질투심 같은 게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한없이 예쁘기만 하고, 그들이 꿈을 잘 이뤄가며 잘 지냈으면 해요. 내가 하는 일이 그들에게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가득해요.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겠죠. 그리곤 잘 늙으신 분들을 만나면 그 분 곁으로 가까이 가서 가만히 바라보게 돼요. 아마 잘 늙고 싶기 때문이겠죠. 작가이니 새로 쓰는 작품들과 함께 잘 늙고 싶어요. 먼 훗날 누군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말이예요.”

‘잘 늙은’ 신경숙, 아마 모든 사람이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혼자만의 신경숙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늙기 위해서는 즐겁고 평안해야 한다. 그녀는 요즘 즐겁다. 탈고한 소설이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켜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든다. 어려운 시기 혼자만 즐거운 게 아닌가하는 노파심이다.

작품을 탈고 했을 때의 순간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와 비슷하다. 힘든 과정을 겪고 나면 성취감과 충만감도 준다. 이보다 더한 이상한 평화가 밀려든다. 정신적 안도감이다. 엄마가 필요하다. 그녀에게 엄마는 정신적 안식처이다. 엄마는 곧 산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아니 모든 사람에게 그럴지 모르겠다. 산은 항상 새롭고 다시 태어난다. 산은 또한 모든 사연을 간직하고 들어주고 품어준다.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이 다 알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지금 일고 있는 ‘모성 신드롬’이 사회에 필요한 이유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안영일

    05.07,2009 at 10:51 오후

    댓글을 적어봄니다, 시류에 어지간히 민감한 여자분의 자전전 이야기겠군요, 북한산 구의동 평창동 좋은동네일것입니다 맟은편산속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아래의 ***승가사***에는 이나라의 어머니들의 젊어서의 처절한 한이라할가?머리 파르라니깍고서 이순간도 자신을찿아구도를 하는 여인들 —그리고 인류역사이래 산이 에미라 –그러면 애비는 바다고 –좋은 이시대의 말 작난 –이숭녕 국어사전에 고전을 아무리 뒤집어보아도 배부르고 등따시고 휏대아래 새끼의 소재가 없는 여자의 지-망상 이 이대의 엇그름에 맛아지는것이 아닌지? 처절한 배고프고 춥고 어름 처럼찬 빙하의 골짜기같은 머리 속에서 나오는 글은 언제 이시대에 등장하려는지? 어느 다달희1-2권 일생을 그래도 책을보는 그저 독자가–이런생각을 해보았읍니다, 좋은 주말을 맟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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