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종합건강검진 기관에 하나의 획기적 사건이 발생했다. 개인병원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심혈관 질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상동맥질환을 초고속 전자선 단층 촬영장치(EBT, Electron Beam Tomography)로 정확히 읽어내는 기기를 도입했다. 당시까지 전국 종합병원에서도 서울대 병원 등 두 세군데 밖에 없었으며, 개인 건강검진 기관으로는 신기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이후 많은 병원 및 개인검진기관에서 최신 기기를 도입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 첫 작업을 이룬 건강검진기관이 하트스캔이며, 이 병원을 세운 사람이 바로 하트스캔 박성학(55) 원장이다. 도전과 열정으로 이룬 금자탑이었다. 도전과 열정은 많은 사람이 쉽게 얘기하지만 실제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도전과 열정이 넘쳐흐르는 사람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미안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한마디로 심심한 걸 못 견디는 전형이다.
하트스캔 박성학 원장이 암벽을 오르고 있다. 한때 푹 빠져 전국의 암벽을 누빈 적도 있다.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모습이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일어난다. 어떤 일이 있어도 6시 이전에 사무실에 도착해 업무를 준비한다. 오후 3시쯤 공식적인 일과가 대충 끝난다. 이후부터는 주로 업무 외적인 일이다. 요리학원, 목공예, 영화감상, 박물관 관람, 음악감상, MTB, 와인스쿨, 맥주만들기, 전통주 제조, 독서, 그리고 주말엔 등산학교 등 궁금한 것과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배운다. 가만있지를 못하는, 뭔가를 배우고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그와 함께 지리산에 갔다. 경상대 의대 교수로 있는 그의 친구의 촌집이다. 남들은 별장이라고 하지만 전혀 별장 같지 않은 그런 시골집이다. 시골엔 시골집이 있어야 제격이지 별장이 있으면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별장을 지으면 더러 주변에서 꼴불견이란 소리까지 듣는다.
그는 특히 눈 쌓인 겨울산행을 좋아한다.
그가 서울에서 진료를 마치고 매주 토요일 내려가는 집이 지리산 골짜기 경남 산청군 중산리 부근 거림골 초입의 남대마을 시골집이다. 93년도에 2억원을 주고 매입했다. 그는 “경제 개념 없는 교수니까 그만한 돈을 줬지, 보통 사람 같으면 엄청 깎았을 것”이라고 했다. 여하튼 2억 원짜리 집이다. 당시 돈 가치로 짐작하면 으리으리할 것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초라하고 볼품없는 전형적 시골집이다. 박 원장이 수차에 걸쳐 엄청 손을 봐서 지금의 형태를 갖췄지, 초기엔 거의 사람 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집무실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다.
내려가는 길에 슬쩍 그의 차의 계기판을 봤다. 운전한 거리가 거의 20만㎞가 다 되어갔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새 차여서 의아했다. “이 차 구입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2005년 구입했으니, 이젠 딱 4년 됐네요.” “아니 얼마나 뛰었으면 벌써 20만㎞가 다 되어 갑니까, 이 차로 영업했습니까?” “매주 토요일 12~1시 전후해서 병원 진료 마치자마자 지리산 내려왔으니 그 정도 되죠. 지난 1년 동안 40번 이상 내려왔을 겁니다. 올해도 몇 주 안 빠지고 다 내려왔어요.”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1년에 50주를 매주 서울~지리산까지 왕복 1,000㎞씩 4년을 달리면 정확히 20만㎞가 나온다. 놀라운 열정이고 집념이다.
팀을 이뤄 빙벽을 오르고 있다.
지리산 촌집에 도착했다. 남대마을 위쪽에 자리 잡아 산과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촌집이었다. 한 채는 잠을 자는 건물인 듯 했고, 다른 채는 창고 같아 보였다. 차에서 잔뜩 짐을 내렸다. 창고인 듯한 건물로 가더니 문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타났다. 마치 허름한 봇짐에 보석을 감춰놓았기라도 한 듯 창고문을 열자마자 정돈된 부엌과 난로, 대형냉장고 등이 주인을 기다리는 양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나타났다.
그가 신장을 제공한 경상대 의대 교수로 있는 그의 친구와 함께 산 정상에서.
능숙한 솜씨로 박 원장의 요리가 시작됐다. 요리 잘 한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뚝딱뚝딱,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을 무색하게 했다. 분주한 순간이 지나자 먹음직스런 요리가 나왔다. 다음 날 아침까지 김치를 이용한 요리부터 고기구이, 피자까지 다 먹었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고, 정말 맛있었다. 요리가 등산 못지않은 취미라고 했다. 그러나 등산이나 요리가 취미라기보다는 그의 성향과 관련 있는 듯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일이 있으면 푹 빠져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다. 골프와 음악이 그러했고, MTB도 그러했다. 등산과 요리는 가장 길게 가면서 아직 끝이 나지 않은 상태다.
한 때는 야간산행도 심심찮게 즐겼다.
등산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준 게 있는데, 그 사람이 망해서 돈 대신 MTB자전거를 줬어요. ‘그래 그냥 이거라도 받아 자전거나 배우자’ 싶어 받았죠. 관련 장비를 전부 샀어요. 대모산과 구룡산을 샅샅이 뒤질 정도로 탔습니다. 그 전까지는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자전거 타면서 단련된 다리로 어느 날 등산을 했더니 전혀 힘이 들지 않고 상쾌하더라고요. 그래서 산에 다니게 됐죠.”
암벽을 오르며 자기확보하고 있다.
그게 2000년대 들어서다. 그 전까지는 지리산 촌집에 등산이 아닌 그냥 놀러가는 수준이었다. 힘들지 않은 산행에 ‘필’이 한번 꽂힌 뒤부터 푹 빠져들었다. 급기야 한국산악회 등산학교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다. 2004년 13기 과정을 수료하고, 겨울 동계반에 바로 들어갔다. 등산에 이어 암벽과 빙벽, 모두 섭렵했다. 전국의 암벽을 찾아 팀을 꾸려 등반하기까지 했다. 지리산 촌집에서 팀들과 수차례 합숙했다. 지금도 등산하면 만약을 대비해서 밧줄 한 동을 꼭 들고 간다.
지리산 촌집 방 한 칸은 그의 전용 공간이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 등산용품점 온 것 같은 착각에 들 정도다. 삼면이 그의 등산장비와 용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냥 아무렇게나 걸린 게 아니라 매장같이 걸려있다. 정말 예사 수준이 아닌 듯했다. 한번 빠지면 끝장 보는 그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암벽을 오르면서 여유를 보이고 있다.
지리산 관련 책도 수북했다. 책에 나오는 지리산 구석구석의 샛길을 차로 찾아갈 수 있는 데까지 누볐다. 차가 갈 수 없는 곳은 걸어서 파악했다. GPS로 위치를 체크하며 지도에 정확히 표시했다. 1대 2만5000 지도를 전자화해서 컴퓨터에 사용할 수 있도록 그가 속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이 지도를 바탕으로 지리산길의 완벽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작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지리산은 지리산학이라고 할 정도로 연구할 대상이 많아요. 길, 마을, 유적, 계곡, 소(沼), 나무 등 모든 게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역사를 말하죠. 아마 세계적으로도 이만한 산은 없을 겁니다.”
그의 지리산 사랑이 물씬 배어나오는 말이다. 지리산은 어릴 때 그의 고향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생활하기 전 그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마을이 청학동 근처 하동쪽 산골마을이다.
암벽에서 자기확보하며 산 능선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내가 지리산에 흠뻑 빠진 건 지리산이 가지는 마력이 있어서겠지만 어릴 때 봤던 지리산의 잔영이 다시 찾았을 때 가슴에 되살아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지금 지리산에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 떠났던 고향을 되찾아 오는 부류들일 겁니다. 고향도 고향이지만 산이 마음의 고향인 셈이죠.”
눈 쌓인 겨울산행 하며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그래서 그는 지금은 일가친척 아무도 없는 지리산을 다시 찾았다. 그의 친구가 산 집으로.
“산에 그렇게 다녔지만 산에 대해서 아직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정답인지 모르죠. 산을 알려고만 했지, 산이 뭔가에 대해선 아직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는 2006년 한해에만 지리산을 약 40회 올랐다. 거의 전투적으로.
그 전투적인 산행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장 투석을 하고 있던 경상대 의대 교수인 친구에게 2007년 초 장기를 기증했다. 이후 회복기 1년여 간 산행을 못하고 요리 등 다른 취미에 더욱 심취했다. 수술한 친구와 같이 2008년 2월에 천왕봉 정상을 밟아 산행을 재개했다. 이 때부터는 친구들의 산행능력에 맞춰 우보산행을 즐기는 그런 코스를 찾고 있다. 현재의 느긋한 산행 스타일로 변화하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지리산 곡점능선을 배경으로.
등산과 함께 그가 아직 끝장을 보지 못한 요리도 지금 계속 학원에 다니며 배우고 있다. 무려 5년이 넘었다. 이태리 요리부터 시작해서 중국요리, 지금은 한식요리를 배우고 있다.
그 스스로 때로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끝을 보지 못하는 몰입’이 자신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 되면 통섭이 가능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요즘 요리에 대해 뭔가가 조금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한 차원 높은 뭔가 이지 않을까 여겨요. 한식을 글로벌 요리로 만들 수 있는 길이라든지, 전통주가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방법 등이 살짝 엿보여요. 계속 몰입하면 더 큰 차원의 뭔가가 언젠가 열리겠죠.”
그는 요즘 목공을 새로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학원에 나간다. 원하는 집을 가꾸고 만들고 싶어서다. 지리산 시골집을 그가 원하는 대로 짓기를 원한다. 과연 어떤 집이 나올 지 몇 년 후가 기대된다.
열심히 빙벽을 오르고 있다.
빠지는 건 일종의 도전이다. 한번 해보자는 거다. 한없는 호기심을 지닌 사람. 자유스러우면서도 자신에게는 엄격한 원칙을 지키는 사람. 심심한 걸 참지 못하고 한순간도 뭔가를 해야 하는 부지런한 사람. 수시로 뭔가를 배우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일에, 산에, 요리에 도전하는 거다. 나아가 이 세상에 도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의 후배는 “형은 한 10년 늦게 태어났으면 정확하고 제대로 살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매사에 앞서갔다는 의미다. 그의 그런 성향에 순수까지 더했다. 그의 친구와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었다. “너는 돈과 명예,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돈이 뭐가 중요하냐, 난 당연히 명예를 택하겠다.” “너가 그러니 순수하다는 거다. 너 정도 위치의 사람은 농담이라도 ‘두 가지 다 중요하다던가, 두 개 다 선택하겠다’는 등으로 두루뭉술 넘어가야지 결정하면 안 된다”
그가 명예를 선택하겠다는 의미도 남달랐다.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폐가 되지 않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농어촌 무료검진도 실시하는 봉사의 삶도 실천하고 있는 그다. 경상대 의대 교수로 있는 친구에게 신장을 기증하는 그것이 그가 말하는 명예, 즉 봉사와 희생인 것이다.
아직도 그의 도전과 열정은 계속 된다. 제대로 된 세상과 산의 의미를 알 때까지. 그 몰입의 끝은 어디일까? 끝이 있을까, 없을까 궁금하다.
장경서
12.08,2009 at 4:08 오후
박원장님 참 부럽씁니다. 저도 한때는그랬씁니다. 앞으로도 그래주십시요///
나는 못난이
12.08,2009 at 10:40 오후
대단하십니다
저두 지리산 밑에(경남 산청) 살아요
아직 천왕봉 한번도 가보지 못한게 부끄럽습니다.
내년에는 꼭 도전할려구요
올해는 법계사까지만…중간에 너무 많이 먹고 퍼졌지요
감사합니다. 열정이 멋져요
박종배
12.09,2009 at 10:53 오전
매년 건강검진을 통해 뵙는 원장님이시네요^^*
존경합니다. 박원장님을 본 받는 삶을 가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9.12.09 10:5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