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이 왜 수락산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수많은 등산객들이 수락산을 찾지만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전해온다. 첫 째는 의정부 내원암 일대 계곡에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서 수락(水落)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과 같다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수락산은 전체 형세가 서울을 등지고 있다.
또 어느 사냥꾼 아버지가 호랑이가 물고 간 아들을 찾아 ‘수락’이라는 이름을 외쳐 부르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은 뒤, 비 오는 날만 되면 “수락아, 수락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산이름이 수락산이 됐다는 설도 전한다.
어찌된 일인지 수락산 능선상의 암봉들은 모두 서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조 건국 후 수락산을 서울의 수호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성계의 수락산에 대한 언급으로 많은 지사들이 은둔하고 풍류를 즐기려 찾아들었다.
수락산 자락에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을 찾아 이정표를 세워놓고 있다.
김시습에 대한 안내판.
매월정
일찍이 삼각산(북산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매월당 김시습은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 사르고 정처없이 유랑의 길을 떠나 첫 번째 숨어들었던 곳이 바로 수락산 서쪽의 석림사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서계(西溪) 박세당도 김시습의 뜻을 따르며 그의 명복을 위하여 청절사를 짓고 이곳에 주거를 마련했다. 여기서 그는 실학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낸 것으로 전한다.
수락산 남서쪽 절경에 벽운동천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눈에 띈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이 이곳에 우우당(友于堂)을 짓고 당대의 석학들과 더불어 정치와 충효를 논했다고 한다.
수락산과 불암산의 경계를 이루는 곳을 덕릉고개라 한다. 이 이름에 대한 유래도 재미있다. 덕릉이라 하면 일단 왕의 무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왕이 아니면서 능으로 이름 붙여진 거의 유일한 무덤이 이곳 주위에 있다. 그 무덤의 주인공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이다.
불암산에서 수락산으로 넘어가는 덕릉고개로 등산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조선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은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하성군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위하여 묘소만이라도 능으로 추존하고 싶어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정식으로 능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단념하고 한 꾀를 내었다. 동문 밖의 땔감상인을 불러 명하기를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수레와 숯수레꾼이 지나갈 때 불러들여 어디를 지나서 왔느냐고 물어, 그 장사꾼이 덕흥대원군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고, 만일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하면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 장사꾼의 나무와 숯을 높은 값으로 사들이라”고 명했다.
이 명을 받은 땔감상인은 그대로 이행해서, 이후 덕흥대원군 묘소는 저절로 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상계동에서 올라가는 깔딱고개와 수락산 동쪽 의정부에서 올라가는 기암절벽 코스 등 등산로도 다양하다. 특히 ‘수락팔경’이라 불릴 정도의 경치도 품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다.
수락산 등산로를 따라 등산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수락산에는 기이한 바위들이 많다.
독수리 바위